중3 소년을 음악으로 이끈 이름 없는 테이프… 그는 ‘영원한 청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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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2024.07.24. 오전 1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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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기 추모 기고… 음악평론가 강헌

1970년대 초 기독교방송 라디오 프로그램에 출연해 노래를 부르고 있는 김민기(왼쪽)와 양희은.

김민기가 떠났다.

추모 글을 쓰면서 형이나 선생, 혹은 님의 호칭을 붙이고 싶지 않은 것은 그의 이름이 내 세대에게는, 아니 적어도 나에게는 하나의 고유명사가 아니라 보통명사이기 때문이다.

‘아침이슬’이 세상에 나온 지 50년이 되던 2021년, 나는 김창남 성공회대 교수와 가수 한영애, 박학기와 인사동의 허름한 밥집에서 이를 기념하는 헌정 음반과 공연을 만들기로 작당했다. 김형석 음악감독과 정태춘, 노찾사, 윤도현, 이은미, 나윤선에서 크라잉넛과 이날치에 이르는 수많은 뮤지션들과 배우 황정민까지 기꺼이 자신들의 삶과 음악에 깊은 울림을 준 그에게 저마다의 방식으로 헌정했다. 그리고 나는 알았다. 이것이 내가 어설프게나마 몸담았던 한국 대중음악과 관련한 마지막 일일 것이라는 것을.

2021년 음악평론가 강헌의 주도로 제작된 '아침이슬 50년, 김민기에 헌정하다'의 음반 커버. 윤도현, 장필순, 메이트리, 유리상자, 이은미, 윤종신, 나윤선, 크라잉 넛,알리,박학기, 웬디(레드벨벳), 한영애 등이 참여했다. /강헌 제공

1975년 늦은 가을, 지방 도시의 공장 동네에 살던 나는 공장의 어린 여성 노동자들에게 (불법적으로) 카세트에 노래를 녹음해주던 리어카의 장발의 청년에게서 서비스로 테이프 하나를 선물받는다. 그는 은밀히 내 귀에 속삭였다. 너만 들으라고. 절대 다른 사람에게 들키지 말라고. 잡혀가더라도 길에서 주운 것이라고 말하라고.

그 카세트 테이프의 겉면엔 가수 이름도 곡명도 없었다.

흑백 TV에 나오던 사람만 가수로 알았던, 그리고 긴급조치 9호가 뭔지도 모르는 철부지 중학교 3학년이었던 내가 그 테이프에 담긴 목소리의 주인공이 김민기와 한대수라는 사실은 고등학교에 가서야 대학생이었던 친구 누나를 통해 알게 되었다. 가수가 누군지도 제목이 뭔지도 몰랐지만 나는 그 노래들과 곧바로 사랑에 빠졌다. 김민기의 단정한 아름다움과 한대수의 껄렁한 아름다움은 한마디로 새롭고 놀라운 경험이었다. 팝송을 주로 듣던 시대, ‘가요’를 듣는다는 것이 수치였던 시절 이 어둠의 테이프 하나로 우리 대중음악에 대한 길고 긴 애증이 시작되었다.

고작 21세였던 1972년부터 김민기는 어둠의 운명을 강요받는다. 그가 예술적 시민권을 다시 돌려받게 되는 것은 1987년 시민 항쟁이 일어난 후이다. 하지만 이 어둠의 시간 속에서, 세상의 낮은 곳들을 떠돌아야만 했던 그 숨 막히는 공간 속에서 그는 공식적으로는 발표할 수 없는 별처럼 빛나는 수많은 노래를 만들었고 대학생이 된 나는, 그리고 우리는 마치 구전 민요를 습득하듯이 입에서 입으로 그의 노래를 소중하게 가슴속에 담았다.

아, 그리고 영원히 잊을 수 없을 것이다. 1987년 시민 항쟁의 도화선이 된 연세대생 이한열의 운구식 때 신촌에서 시청 광장까지 도로를 꽉 메운 백만 시민들이 한목소리로 부르던 ‘아침이슬’을. 그의 노래는 이렇게 어둠 속에서 광장으로 단숨에 떨쳐 나와 역사가 되었다.

당국의 요시찰 대상에서 벗어나 자유의 몸이 되었지만 그는 스스로 자신을 규정한 ‘뒷것’의 스탠스를 일관되게 유지한다. 그것은 그저 겸양의 제스추어가 아니라 그의 확고한 철학이었다. 그는 맨손으로 ‘학전’ 소극장의 터를 일구고 곧 소멸할 운명인 소극장 공연과 자본주의 흥행 논리에서 주목받을 수 없는 아동 뮤지컬에 남은 자신의 시간을 바친다.

강헌 음악평론가

그는 스스로 말한 대로 ‘먹고살기 위해 재미없는 일을 선택하지 않고 굶어 죽더라도 자꾸 눈에 보이는 걸 (어쩔 수 없이) 쫓아간’ 사람이다. 가왕 조용필과 인터뷰 중에 같은 또래지만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었던 김민기를 존경한다고 해서 나는 너무 놀랐다. 이유를 물었더니 어떤 길이든 일관되게 자신의 길을 걷는 사람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우리가 김민기를 존경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 아닐까?

정태춘은 또한 이렇게 말한다. 김민기는 ‘첫 번째 반항아/첫 번째 이단자/첫 번째 소외자’라고. 그리고 그이의 노래는 여기 고통스러운 현대사를 비추는 큰 거울이었다고. 그리고 덧붙이자면 그는 숱한 오욕의 상처로 얼룩진 우리 현대 대중문화사를 저 한편에서 고요히 지키고 있는 한 그루 상록수다. 전쟁 유복자로 태어난, 해방 후 첫 세대인 김민기에게는 예술적 아버지가 없었다. 그러나 그는 식민지 예술의 틀을 본능적으로 거부하고 스스로 길을 만들고 평생을 홀로 걸어갔다. 그래서 생물학적 나이와 상관없이 김민기는 언제나 청년인 것이다.

김민기가 떠났다. 결코 재현될 수 없는 하나의 시대가, 하나의 정신이 이렇게 저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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