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리빨리’서 ‘미리미리’로... 현대차, 추격자서 선도자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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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2024.07.08. 오전 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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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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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적의 50년, 현대차의 기적] [4]

지난해 7월 현대차 고성능차 브랜드 ‘N’ 소속 직원들과 드라이버들이 영국에서 열렸던 자동차 축제 ‘굿우드 페스티벌 오브 스피드’ 참가 일정을 성공적으로 마친 뒤 기뻐하며 해단식 기념 촬영을 하고 있는 모습. 최근 현대차그룹은 회사 행사도 과거 형식과 복장에 엄격했던 분위기에서 많이 달라졌다는 평가를 받는다 ./현대차그룹

2016년, ‘군대식’으로 유명했던 현대차그룹의 조직 문화를 바꾼 결정적인 사건이 일어났다. 쏘나타·투싼·싼타페 등 주력 차종의 ‘세타2′ 엔진에서 시동 꺼짐, 소음 등의 결함이 미국에서 발견된 것이다.

현대차·기아는 처음에는 미국 엔진 생산 공장의 청결 문제로 생긴 일이라고 했지만, 결국 미국뿐 아니라 국내에서도 리콜(무상수리)을 결정했다. 또 현대차·기아는 이 엔진을 쓴 모든 차량 469만대에 대한 평생 품질 보증을 약속하면서 2019~2022년 약 7조7000억원의 충당금을 쌓아야 했다. 미국 정부에 낸 과징금 8100만달러(1120억원)까지 합치면 8조원에 가까운 비용이 들었다.

그래픽=김하경

리콜 사태 직전까지 현대차·기아는 앞만 보고 달리는 경주마 같았다. 2014~2015년 2년 연속 글로벌 800만대 판매를 돌파하며 정점을 찍었다. 그러나 리콜 사태 이후 내부 충격이 작지 않았다. 연구개발 분야 임원은 “‘우리가 단기간 너무 빠르게만 달려왔다’는 인식이 생겼다”며 “회사 전체가 고민에 빠졌고 그때부터 이를 해결하기 위해 내부 TF(태스크포스)를 여럿 만들었다”고 했다.

현대차·기아는 반세기 가까이 강력한 ‘패스트 팔로어’였다. 선두 주자를 따라잡기 위해 장시간 근무도 마다하지 않았고, 일사불란하게 목표를 향해 뛰었다. 그런 힘이 작년 ‘글로벌 톱3′의 비결 중 하나였다. 하지만 ‘8조원의 교훈’을 통해 현대차그룹은 달라지기 시작했다. 목표 달성도 중요하지만, 그 과정에서 ‘아니오’라고 말하고 새로운 의견을 낼 수 있는 기업 문화를 만들기 시작한 것이다.

그래픽=김의균

◇‘빨리빨리’에서 ‘미리미리’로

연구개발(R&D) 메카인 남양연구소도 몇 년 전까지만 해도 ‘패스트 팔로어’의 전형이었다. 오랫동안 연구소 별명은 ‘불이 꺼지지 않는 곳’이었다. 연구소 내에선 늘 ‘도요타 캠리보다 연비가 0.01%라도 우수한가’ ‘폴크스바겐 티구안보다 출력이 높은가’ 등을 따졌다. 전략을 정할 때도 도요타나 폴크스바겐은 어떻게 하고 있는지를 먼저 살펴야 했다. 20년 차 실장급 연구원은 “연구를 물건 파는 영업사원처럼 목표를 정해놓고 하던 시절이었다”면서 “우리가 정답이니 너는 따라오기만 하라는 상급자가 많았다”고 했다.

하지만 이제는 ‘빨리빨리’ 대신 ‘미리미리’를 더 강조하고 있다. 지난 130여 년을 지탱해온 내연기관차 시대가 저물고, 새로운 미래차 시대가 열리면서 도요타·폴크스바겐은 물론 테슬라마저도 한 치 앞을 예견할 수 없기 때문이다. 불확실성 속에서 자유로운 의견 개진과 과감한 시도로 변화에 미리 대비하고, 시장을 선도하자는 것이다.


실제 본지가 최근 만난 연구원들은 요즘 연구소는 크게 달라졌다고 입을 모은다. 가장 큰 변화는 ‘실패해도 좋다’고 말하는 분위기다. 입사 5년 차 한승우 연구원은 이런 문화 덕에 2021년 연구소 아이디어 공모전에서 최우수상을 받았다. 자동차 시트를 고정하는 차체 바닥 중요 부품 5~6개를 하나로 결합하는 아이디어를 냈는데, 실제 생산하는 자동차에 적용돼 원가 절감에 기여하고 있다. 그는 “입사 3년 차에 테슬라 사례를 보면서 고민하다가 혹시나 하고 옆자리 선배에게 말을 꺼냈는데 흔쾌히 부족한 부분을 피드백해줬다”고 말했다.

연구소 보고 체계도 간편해졌다. 과거 각종 실험 데이터를 파워포인트나 엑셀 파일로 만들어서 정리해야 하는 일이 대폭 줄었다. 문제가 있다면 바로 실무자가 팀장과 함께 담당 임원을 만나 문제를 상의할 수 있는 분위기가 됐다. 15년 차 남양연구소 연구원은 “팀원들끼리 이런저런 메모를 하며 끄적거린 종이 쪽지를 그대로 임원에게 건네며 보고해도 될 정도”라고 했다.

◇결재판 수거하고 복장도 바뀌어

2019년에는 리콜 사태 이후 2~3년 내부적으로 고민한 제도들이 잇따라 도입되기 시작했다. 우선 그해 직장 내 서열을 의미하는 사장 이하 직급 개수를 11개에서 6개로 줄였다. 좀 더 수평적인 조직을 만든다는 취지다.

현대차는 ‘기본 복장’을 ‘넥타이에 양복’으로 정해 놓은 복장 규정도 있었는데, 2019년 3월에는 근무 상황에 맞추는 자율복장제로 전환됐다. 5년이 지난 지금, 그룹 본사나 남양연구소에서 칼라(collar)가 없는 티셔츠에 면바지를 입거나, 슬리퍼에 반바지를 입은 직원을 흔히 볼 수 있다.

그해 ‘결재판 수거함’까지 만들면서 보고 방식도 바꿨다. 종이 문서를 결재판에 넣어 상급자에게 가져가는 보고는 이제 필요 없고, 사내 메신저나 이메일로 충분하다는 취지다. 지난달엔 ‘현대 웨이’라는 기업 문화 캠페인도 따로 발표했다. ‘협업’ ‘집요함’ ‘회복탄력성’ ‘민첩함’ ‘전문성’ 등 10가지 일하는 방식을 정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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