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심 한복판서 메뚜기춤 추며 “이쁜 언니, 커트 하고 가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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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2024.05.20. 오후 1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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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유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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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주말]
신장개업한 미용실
내레이터 모델 체험기

얼음. 마이크 쥔 손이 달달 떨렸다. “머, 머리… 머리를….” 무엇을 말하고 싶은 걸까. 집에서 키운 지 3년 된 앵무새도 나보다는 길게 말하겠다. 3분간의 침묵. 위기다. ‘에라, 모르겠다.’ 냅다 소리를 질렀다. “여러분, ××× 헤어 오픈했습니다, 머리 하러 오세요!”

조유미(가운데) 기자가 새로 문을 연 미용실 앞에서 피에로들과 함께 물티슈를 나눠주고 있다. 전단은 안 받지만, 물티슈는 그나마 행인들이 받아준다고 한다. /임화승 영상미디어 기자

일명 ‘신장개업(新裝開業)’ 행사를 기억하시는지. 전자제품 매장이나 통닭집 등이 새로 문을 열면, 가게 앞에서 춤도 추고 호객용 내레이션도 하며 전단 나눠주는 홍보 행사 말이다. 최근 몇 년간 보기 어려워 사라진 줄 알았는데, 코로나 국면이 끝나며 다시 조금씩 활기를 띠고 있단다. 그래서 다녀왔다, 이벤트 알바!

피에로와 함께 춤을


행사 당일, 약속 장소에 30분 일찍 도착했다. 내가 홍보를 맡게 될 가게는 직영점만 38곳이 넘는 상계역 인근 건물 2층의 꽤 큰 체인 미용실이었다. 매장 앞에 설치된 스피커에서 ‘둠칫둠칫’ 신나는 노래가 흘러나왔다.

이벤트 업체인 ‘심스 이벤트’ 직원 박성민(22)씨가 “입으라”며 가게명이 적힌 형광색 조끼를 건넸다. 그는 행인에게 나눠줄 물티슈 캡을 가판대에 정리하느라 바빴다. 물티슈 겉면에 미용실 홍보 문구가 적혀 있었다. ‘오픈 이벤트. 남성염색 4만원, 여성염색 5만원’.

행사 전 175㎝쯤이던 피에로들의 키는 300㎝가 돼 있었다. 밟고 올라서는 키다리용 사다리(일명 ‘스틸트’)를 착용한 덕. /임화승 영상미디어 기자

눈을 쳐다보며 말을 걸고, 손가락으로 2층 매장을 가리킬 때 더 효과가 좋았다. /임화승 영상미디어 기자

박씨는 이날 함께 홍보에 나설 ‘피에로’ 3명 중 한 명이었다. 박 피에로가 매장 옆에 주차된 스타렉스 차량 안에 앉아 다른 피에로와 함께 분장을 시작했다. 얼굴은 새하얗게, 코와 뺨은 새빨갛게.

오후 2시, 행사가 시작됐다. “물티슈 하나 더 주면 안뎌?” 할머니 한 분이 내 손을 꼭 쥐고 이렇게 물었다. 생각보다 물티슈를 거절하는 사람이 적었다. 오히려 “하나 더 달라”는 사람도 있었다. 10년 경력의 내레이터 모델 신모씨가 “하나 더 드려요”라고 했다. “전단은 안 받는데, 물티슈는 그나마 받아줘요.”

행사 전 175㎝쯤이던 피에로들의 키는 300㎝가 돼 있었다. 밟고 올라서는 키다리용 사다리(일명 ‘스틸트’)를 착용한 덕이다. 박 피에로가 “이것도 요령이 필요해 2~3일 정도, 하루 5시간 이상 연습이 필요하다”고 했다. 힘들지 않은지 묻자 길쭉한 풍선으로 꽃 모양을 만들던 ‘과묵한 피에로’(이날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가 말 없이 웃었다.

피에로들은 길쭉한 풍선으로 꽃 모양 등을 만들어 아이들에게 나눠줬다. /임화승 영상미디어 기자

피에로들은 춤을 잘 췄다. 나는 매우 부끄러웠으나 덩실덩실 어깨춤을 추다가 국민 MC 유재석의 ‘메뚜기 춤’ 같은 걸 췄다. “미용실 개업했어요.” “올려다 보고 가세요.” 아주머니 한 분이 내 옆으로 오더니 “신난다”며 같이 춤을 추기 시작했다. 우리는 흥의 민족이었다.

‘미싱’이나 ‘부품 조립’처럼 반복되는 일을 할 때 노래를 크게 틀곤 하는 이유를 조금은 알 것 같다. 지치다가도 아는 노래가 나오면 힘이 났다. 눈앞에 정차한 버스 창문 앞으로 홍보 문구가 적힌 ‘워킹 배너’를 들이밀고 온 몸을 흔들어 본다. 한번 봐 주길 바라며. 스피커에서는 김건모의 ‘잘못된 만남’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망했다고 생각했는데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큰일이다. 행사의 꽃은 단연 ‘내레이션’. 하지만 마이크를 받아 들자 며칠간 연습했던 멘트가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다. 듣기만 해도 흥이 나는 내레이터의 리듬감 있는 목소리와 달리, 내 목소리는 어색했다. 설상가상 행인들에게 안부만 묻고 있다.

계속 인사만 하는 그냥 인사성 바른 청년이 될 무렵, 지나가던 아이들이 피에로가 만들어 준 하트 모양 풍선을 내 목에 걸어줬다. “언니, 힘내요.” 뭔지 모를 힘이 났다. “할인 행사 하고 있습니다” “2층으로 모시겠습니다.” 생각해 온 멘트를 조금씩 하기 시작했다. 중간중간 ‘아무 말’이나 했다. 컵라면을 박스째 사 들고 가는 아버님에게 “라면 맛있죠?”라고 했다. 부추를 사 들고 가는 어머님에게는 “오늘 저녁은 부추전인가요?”, 산책하는 개(정확히는 그 주인)를 보고는 “너도 머리 하러 올래?”

마이크를 받아 들자 며칠 간 연습했던 멘트가 하나도 기억나지 않았다. /임화승 영상미디어 기자

‘망했다.’ 난 이렇게 생각했다. 근데 무표정으로 물티슈만 받아 가던 행인들이 옅은 미소를 보이며 매장 쪽에 눈길을 주기 시작한다. 눈을 쳐다보며 말을 걸고, 손가락으로 2층 매장을 가리킬 때 더 효과가 좋았다. 한 여성이 내게 “나 며칠 전 여기서 머리 했다”고 했다. “어쩐지, 스타일이 너무 고급스럽더라”며 단전에서부터 칭찬을 길어 올렸다.

행인 한 명이 내 호객 행위에 매장 안으로 들어갔다. 세상에! 방방 뛰는 날 본 과묵한 피에로들은 말 없이 축하의 박수를 쳐 줬다. 미용실 건물 1층에 있는 콩나물 국밥집 사장님이 “고생한다”며 캔 음료를 가져다 줬다. 감사한 마음을 담아 “사장님도 퇴근하시고 2층에서 머리 하시라”고 권했다. 이 정도면 앵무새보다는 말 잘하는 것, 맞겠지?

유리 벽 너머의 외침


이날 내레이션은 45분간 진행하고, 15분 쉬는 식으로 총 5시간 동안 이어졌다. 휴식 시간, 내레이터 신씨는 “몇 년 전만 해도 일하러 가면 옆 가게에서도, 앞 가게에서도 아는 얼굴을 만났다”고 했다. 내레이터 모델 전성기는 통상 1990년대로 여겨진다. 개업하는 가게가 늘며 배우려는 사람도 많았다고. 이후 줄긴 했어도 입소문을 타며 꾸준히 찾는 곳이 있었단다. 하지만 코로나를 거치며 일감이 뚝 끊겼다. 다행히 최근에는 찾는 곳이 다시 늘고 있다고.

알바 4시간째. 지치기 시작한다. 종아리가 땅기고, 발이 부어 운동화가 발톱을 옥좼다. 한참 덩실거리다 다소 얌전해진 날 보고 한 피에로가 “처음부터 ‘텐션’을 너무 올리면 안 된다. 꾸준히 끝까지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다.

마침내 오후 7시. 알바 시간이 끝났다. 박 피에로가 “고생했다”며 남은 물티슈를 한 아름 안겨줬다. 한 박스당 물티슈는 334개. 총 5박스 가까이 나눠줬으니, 약 1670명에게 미용실 홍보를 한 셈이다.

서 있을 힘도 없어 택시를 탔다. 물티슈를 많이들 받아 갔다지만, 그럼에도 눈길도 안 주는 행인이 있었다. 바빠서, 부담스러워서, 받아가면 미용실에 와야 할 것 같아서…. 뭔가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들에게 나의 말은 쓸모없는 소음이었을지도. 앞으로 내가 마주할 세상은 유리 벽을 두고 끊임없이 소리쳐야 하는 곳일지 모른다. 그럴 때마다 그날의 물티슈가 떠오를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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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조유미 기자입니다. 바다를 사랑합니다. 간다간다, 뿅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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