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바 ‘시× 적금’ 들고 동물 먹방 보는 요즘 MZ
#1. 통장 거래 내용이 숫자 ‘18′로 가득하다. 금액 18원과 1818원이 잔뜩 찍혀 있다. 욕과 함께 저주를 퍼붓는 것 같은 이 통장 주인은 평범한 7년 차 직장인 김현진(28)씨. 통장에 입금한 사람은 누굴까? 자기 자신이다. 자유 적금 통장을 개설한 뒤 화가 날 때마다 이유와 함께 18원, 1818원 등을 입금하는 이른바 ‘시X 적금’이다.
#2. 햄스터가 앞발로 숙주 한 뿌리를 들고 먹는다. 그냥 먹는다. 아삭아삭 소리가 들린다. 이번엔 스테이크 한 조각을 먹는다. ‘쩝쩝’ 소리가 들린다. 다음은 양배추. ‘사각사각’ 소리가 들린다. 50초 안팎인 ‘서서 밥 먹는 먹방 전문 햄스터’라는 제목의 이 유튜브 숏폼 영상은 183만회나 재생됐다. 직장인 이모(29)씨는 요즘 퇴근 후 잠들기 전까지 이른바 ‘동물 먹방’을 본다.
별 상관 없어 보이는 두 사례에 공통점이 있다. 자기 통장에 ‘분노의 18원’을 입금하는 사람들과, 햄스터가 마냥 숙주 씹어대는 영상을 보는 사람 모두 “스트레스가 풀린다”고 입을 모은다는 것이다. MZ세대 사이에서 ‘시X 적금’(달리 부를 말이 없다)과 ‘동물 먹방’이 인기다. 과거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친구들과 쇼핑에 나섰다면 이젠 화가 나는 만큼 혼자 돈을 모으고, 동료들과 술을 진탕 마시고 노래방에서 소리를 지르는 대신 집에서 조용히 동물이 무언가 먹어대는 영상을 본다. 전문가들은 “초(超)개인주의적 MZ 성향에 특유의 ‘위트’를 더한 현상”이라고 말한다.
김씨는 지난달 6일 ‘시X 적금’ 통장을 개설하고 이 내용을 블로그에 올렸다. 그가 공개한 거래 메모를 살펴보니 읽기만 해도 화가 난다. ‘대뜸 전화해서 자기 할 말만 하는 것 짜증 난다’(1818원) ‘새벽 3시에 (회사에서) 메신저가 왔다’(1818원) ‘외부 미팅 일정을 하루 전에 말한다’(1818원)…. 직장 내 고충이 절절하게 적혀 있다.
통장 개설 방법은 간단하다. 금액과 무관하게 언제든 입금할 수 있는 자유 적금 상품을 하나 고른다. 만기일 선택은 자유지만 되도록 3·6개월 등 기간이 짧을수록 좋다. 모은 돈을 빨리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통장명에 반드시 ‘시X’이라고 이름 붙일 필요는 없다. ‘저주 통장’ ‘1818 통장’ ‘죽어라 통장’ 등 분노를 표현할 수 있는 이름이라면 뭐든 좋다. 입금액도 죽을 사(死)를 표현한 ‘4444원’ 등 자기 마음대로다.
이들은 직장 생활을 하며 답답함을 느끼거나, 소위 상사가 ‘열 받게 했을 때’ 통장에 숫자 18이나 4로만 된 금액을 입금한다. 메모난에 욕설도 살짝 곁들인다. 그럼 그 나름대로 ‘소심한 복수’를 했다는 생각에 스트레스가 풀린다. 김씨는 현재까지 총 18회, 3만2724원을 넣었다. “요지경 상황에서도 ‘내가 저축했다’는 사실에 위안이 된다”고 했다.
이런 식으로 스트레스를 푸는 건 그만이 아니다. X(옛 트위터)에서 관련 내용을 검색하면 ‘퇴근 시간인데 나에게 똥(하기 싫은 일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을 줬다. 강소주가 생각나 18적금에 4444원을 입금했다’ 같은 내용이 한가득 있다. 워낙 소액이기에 모인 금액도 소액이지만, 만기일이 되면 오롯이 자신만을 위해 쓴다. 평소 가보고 싶었지만 ‘사치’라며 손가락질받기도 하는 10만원짜리 오마카세를 먹으러 가거나 ‘내 돈 주고’ 사긴 아깝지만 갖고는 싶었던 물건을 사는 식이다.
동물 먹방에는 온갖 동물이 출동한다. 그야말로 ‘거북이’ 같은 속도로 브로콜리를 먹는 반려 거북이 먹방(조회 수 1550만), “녀석, 잘 먹네” 소리가 나오는 통통한 반려 미니피그의 육회 먹방(조회 수 82만), 반려 날다람쥐의 번데기 먹방(조회 수 222만)….
MZ가 동물 먹방에 빠진 이유는 크게 두 가지다. ‘사람 먹방’보다 자연스럽다는 것이 첫째. 한 끼에 라면 20봉지, 삼겹살 15인분을 해치우는 최근 먹방 트렌드에 피로감을 느끼는 이들이 ‘억지로 먹지 않는’ 동물 먹방으로 옮겨갔다는 것이다.
마음을 포근하게 만드는 동물 특유의 ‘귀여움’이 더해진다. 133만명이 ‘하트’를 눌러댄 솜털 보송한 토끼가 가지에 달린 딸기를 먹는 인스타그램 영상, 255만회 조회된 강아지용 ‘보쌈’과 ‘김치’를 먹는 반려견 영상에는 “귀엽다”는 댓글이 달린다. ‘촙촙’ ‘호록’ 하는 ASMR(소리로 심리적 안정을 유도하는 영상)은 덤이다. 5년 차 직장인 김모(28)씨는 “먹방에 더해 보고만 있어도 마음이 편안해지는 귀여운 생김새와 귀를 편안하게 만드는 소리까지, 젊은 층이 열광하는 소셜미디어 영상의 모든 장점을 모아 놓은 셈”이라고 했다.
모두 ‘혼자’ ‘조용히’ 스트레스를 해소할 수 있다. 힘든 일이 있어도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혼자 해결해 보려는 MZ의 개인주의 성향이 부른 현상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타인에게 화풀이하거나 우울함을 토로하지 않는 젊은 층의 ‘조용한 노력’이라는 것이다. 최근 약 8개월간 붓던 ‘시X 적금’이 만기가 돼 적금액 6만2499원을 좋아하는 가수의 콘서트를 보러 가는 데 썼다는 대학생 조민정(23)씨는 “친구에게 힘들다고 이야기해 봐야 우울한 감정만 옮기지 않느냐”며 “독특하다고 밉게만 보지 말고, 해결법을 찾으려는 노력을 예쁘게 봐줬으면 한다”고 했다.
전문가들은 “스트레스가 정말 풀리는지 알 수 없지만 분명한 건 MZ의 스트레스 해소법이 기성세대와 다르다는 점”이라고 말한다. 송재룡 경희대 특임교수(사회학)는 “어려운 점이 있으면 인생 경험이 많은 언니, 형, 누나에게 조언을 얻던 4050세대와 달리 MZ의 특성 중 하나는 ‘멘토’조차 없다는 것”이라며 “대신 같은 상황의 온라인 공간 속 친구들에게 위안을 얻거나 조언을 구하는 만큼 서로 동물 영상에 댓글도 달고 적금 내용을 공유하며 평온함을 얻는 것”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