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험계리사 경력 뒤로 하고
세계일주 요트대회서 완주
위험도 숫자로 컨트롤 가능
직업에서 비롯된 강박증
죽을 위험 넘긴 후 변화돼
“인생은 매일 크고 작은 도전”
영국 임페리얼 칼리지 런던에서 전기전자공학을 전공하고, 독일과 싱가포르의 재보험 업계에서 근무하던 이나경 씨(38)의 삶은 안락하고 평온했다. 계리사인 그의 업무는 ‘위험 관리’를 위해 리스크를 수치화하는 것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안정한 직장과 금융계 커리어를 뒤로한 채, 돌연 예측 불가능한 위험에 몸을 던졌다. 길이 23m 요트에 의지해 바람과 파도의 힘만으로 4만 해리(약 7만 4000km)를 항해하는 여정에 나섰다.
지난달 이 씨는 전 세계 바다를 11개월간 요트로 항해하는 ‘클리퍼 세계일주 요트대회’(Clipper Round the World Yacht Race) 완주에 성공했다. 한국 여성 최초이자, 한국인으로선 두 번째 기록이다. 그가 속한 다국적 팀 베케젤라(BEKEZELA)는 지난해 9월 영국 포츠머스에서 출항해 스페인, 우루과이, 남아프리카공화국, 베트남, 미국, 파나마 등 14개 항을 거쳐 포츠머스로 돌아왔다.
매일경제와의 인터뷰에서 이 씨는 코로나19로 인한 재택근무와 격리 생활 중 자신을 돌아볼 기회를 얻었다고 말했다. “평생 안정감과 편안함을 추구하며 살아왔지만, 어딘가 허전함을 느꼈어요. 그전까지 제 삶의 선택 대부분은 내면의 소리보다는 주변과 사회의 관점에 의해 이루어졌었죠.” 이어 그는 “지금껏 미루기만 했던 인생의 버킷리스트를 정리해 봤다”며 “그중에 가장 위험하고 어려워 보이는 것을 고른 게 바로 요트 세계일주”라고 했다.
호주 동남쪽 태즈먼해에서 강풍과 파도를 맞닥뜨렸을 땐 죽음의 공포가 그를 덮쳤다. “바람이 너무 강해 돛을 다루기가 거의 불가능했어요. 배는 몇 번이고 뒤집힐 뻔했죠. 배에서 떨어지면 실종되거나 심장마비, 저체온증으로 위급한 상황을 맞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어요.” 과거 사망자가 발생하기도 했던 클리퍼 세계일주는 가장 위험한 항해 대회 중 하나로 꼽힌다.
힘든 순간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사방이 트인 망망대해에서는 바다 위로 달이 뜨고 지는 모습도 볼 수 있어요. 제가 아는 단어로는 형용하기 어려운 벅찬 광경이었죠. 돌고래들이 자주 놀러와 함께 시간을 보냈고, 운이 좋은 날엔 고래도 가까이서 볼 수 있었어요.”
11개월의 대장정을 마친 이 씨는 세계일주가 자신의 인생관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고 말했다. “보험사에서 일할 땐 모든 것을 숫자와 통계 안에서 컨트롤해야된다고 믿었어요. 제 삶에 있어서도 모든 것을 통제해야 한다고 생각했죠. 하지만 안정을 추구할수록 그 중에서 컨트롤되지 않는 것들에 대한 고민은 더 커지곤 했어요.”
그는 바다에서 내려놓는 법을 배웠다고 말한다. “그 어떤 것도 확신할 수 없는 공간에서 오히려 자유로움을 느꼈어요. 마찬가지로 인생에서도 모든 걸 통제하려 하기보다는 흐름에 몸을 맡기는 것도 필요하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다만 이 씨는 “사실 제가 배운 것들이 꼭 바다에 나가봐야만 얻울 수 있는 건 아니었다”며 “세계일주를 꼭 해봐야 한다고 권하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라고 말했다. “우리는 모두 매일 크고 작은 도전에 직면하며 살고 있어요. 제 여정의 기록이 도전을 앞둔 누군가에게 작은 용기를 줄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 도전 뒤엔 값진 깨달음이 꼭 함께 올 것이라고 전하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