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례길 벌어진 강간 살인...끔찍한 비극 막으려 ‘이것’ 시작됐다는데[히코노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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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영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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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는 맛보기에 어려운 식재료입니다. 채권, 이자, 화폐라는 단어만 들어도 쓴맛이 올라옵니다. 맛있게 즐기려면 ‘역사’라는 양념이 필요합니다. 히스토리와 경제를 결합한 연재물 ‘히코노미’는 먹을만한 요리를 내는 걸 목표로 합니다. 격주로 여러분의 경제 근육을 키워드리겠습니다.



[히코노미-1] 낯선 곳을 여행할 때 설렘과 두려움이 함께 싹을 틔우기 마련입니다. 새로운 풍경을 눈에 담을 수 있다는 기쁨과, 이방인들의 표적이 될 수 있다는 두려움이 교차합니다. 누군가 나를 공격할까봐, 돈을 빼앗아갈까봐 신경은 늘 곤두서 있습니다. 여행자 누구나 옷깃을 여미고 주변을 경계합니다.

1000년 전, 중세 유럽에서도 상황은 비슷했습니다. 성지 ‘예루살렘’으로 떠나는 여행자들은 신의 흔적을 볼 수 있다는 경외감과 함께 먼 여로에서의 안전을 우려합니다.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성지 순례길에서 돈을 빼앗기고 비참하게 객사를 맞았지요. 진리를 찾는 길은 예나 지금이나 험난하기 그지 없었습니다.

“순례 가는 길은 때론 너무 길어~” 다비드 테니에르스의 17세기 작품 플랑드르 순례자.
정의의 사도들이 결기로 일어섭니다. 그들은 맹세합니다. 하나님께로 향하는 순레자들을 보호하자고, 이단자들의 공격을 막아내자고. 성전기사단의 탄생이었습니다. 신의 뜻을 따르고자 한 집단의 탄생은 역설적으로 현대 은행의 시초가 됐습니다. 종교적 실천이, 자본주의적 금융기관의 씨앗이 된 아이러니. 역사로 버무린 경제를 표방하는 연재물 ‘히코노미’(History Enonomy)의 첫 주제입니다.

예루살렘의 탈환...그러나 계속되는 고난
“우리 하나님의 도시 예루살렘을 다시 되찾았다.”

성지를 되찾겠다는 일념 하에 모인 기독교 국가들이 ‘십자군’이라는 이름으로 연합했습니다. 첫 출전만에 승리를 거두고 예루살렘을 이슬람 세력으로부터 되찾았지요. 1099년의 일이었습니다. 이제 지중해에 면한 서아시아의 주요 성지들이 모두 기독교인의 손에 떨어지지요.

“드디어 주님의 도시를 되찾았다.” 십자군의 예루살렘 점령을 그린 19세기 화가 에밀 시뇰의 그림.
유럽은 흥분의 도가니에 빠졌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숨결이 살아있는 옛 도시를 다시 방문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대한민국 사람이 평양, 개성을 다시 자유롭게 여행하게 될 때의 기분 같았겠지요. 유럽 전 지역에서 예루살렘을 순례하겠다는 순례자들이 폭발적으로 늘어난 배경입니다.

순례는 그러나 쉬운 여정은 아니었습니다. 유럽에서 서아시아까지 가는 길은 멀고도 험했습니다. 오늘날처럼 대중교통이 있는 상황도 아니었기에 그야말로 산 넘고 물 건너 또 다시 산을 넘어야 하는 지난한 과정. 마을을 벗어나면 치안은 공백상태였지요.

언제 어디서든 강도를 만나 돈과 생명을 빼앗길 수 있었습니다. 순례자 수백명이 한꺼번에 죽임을 당한 사건도 비일비재했습니다. 강도·강간·살인은 순례객을 계속 위협합니다.

“이불 밖은 아니, 도시 밖은 위험해” 프란시스코 고야가 그린 노상강도.
순례객을 보호하기 위해 모인 사람들
“우리가 순례객을 보호하겠소.”

순례객을 보호하겠다는 사람들이 의연히 일어납니다. 프랑스 기사 ‘위그 드 파옌’이었습니다. 1119년 그는 예루살렘의 기독교 왕 볼드윈2세를 찾아갑니다. 순례객들을 보호하기 위한 조직의 필요성을 설명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성스러운 그들의 뜻에 볼드윈2세가 동감을 표시합니다. ‘성전 기사단’의 시작이었습니다. 볼드윈 2세가 정복한 예루살렘의 모스크를 기사단의 본부로 선뜻 내어줬지요.

“저 성스러운 주님의 아이들을 보호해야하오.” 프랑스 기사 위그 드 파옌.
‘시작은 미약했으나, 그 과정은 창대’했습니다. 한 마리의 말을 타고, 순백의 망토를 갑옷 위에 걸친 전사들. 순례객을 지키겠다는 9명의 기사단의 ‘이상’에 유럽 전역이 감동합니다.

자기 전 재산을 기부하겠다는 부족들, 기사단에 합류하겠다는 귀족들이 넘쳐납니다. ‘청빈’은 기사단이 태동할 때 내세운 지고의 가치였지만, 조직에는 이미 돈이 넘쳐 흐르기 시작합니다.

1139년 교황 인노첸시오 2세는 성전 기사단을 공인합니다. 기사단은 앞으로 교황의 권위 아래 모든 기독교 국가 국경을 자유롭게 통행할 수 있고, 세금을 낼 의무도 면제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성전 기사단’은 이제 모든 기사단의 이상향으로 자리합니다. 프랑스, 잉글랜드, 포르투갈, 이탈리아를 비롯해 유럽 전역에 기사단 본부가 설치된 배경입니다.

“기사단은 이제 우리의 가족이오. ” 교황 인노첸시오 2세. [사진출처=Hugo DK]
금융 서비스는 성전기사단으로부터 태동
“제 돈을 성지에서 찾을 수 있겠습니까.”

당대 순례객들은 성지까지 가는 먼 거리까지 실물 화폐를 가지고 다니기를 꺼렸습니다. 강도 혹은 이교도들에 의해 모두 빼앗길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기사단은 순례객의 우려를 십분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여기서 하나의 ‘서비스’를 만들어냅니다. 지점별 ‘입출금 시스템’입니다.

“동네에서 맡기고 성지에서 찾으세요.” 성전 기사단을 묘사한 중세 그림.
상황은 이렇습니다. 유럽의 기사단 본부에 돈을 맡기면 하나의 증서를 내어줍니다. 성지에 도착해 그 증서를 제시하면 기사단 본부에서 돈을 지급하는 개념입니다. 순례객이 잉글랜드에서 입금한 돈을 예루살렘에서 출금할 수 있다는 혁신적 서비스지요. 강도들이 순례객의 증서를 보더라도 그 의미를 알 수 없기에 빼앗는 경우도 드물었다는 점에서 착안한 것입니다.

오늘날 여행자들이 현금대신 신용·체크카드를 들고 다니는 것과 같은 원리입니다. 경제학자들은 오늘날 ‘수표’가 그 때 처음 태동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종교와 금융은 서로 배척되는 개념같지만, 역사적으로 둘은 서로를 동력으로 삼아 발전합니다. 기사단의 사례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세상 참 좋아졌네, 돈 없이 순례를 가니~” 벨기에 지방에서 떠나는 예루살렘 순례자 형제단의 회원들. 얀 반 스코렐 작품.
더 많은 서비스를 제공하는 성전 기사단
수 차례 벌어진 십자군 전쟁은 기사단의 규모를 더욱 키워갔습니다. 수중에 있는 돈과 토지도 더욱 늘어갔지요. 특히 이들이 제공하는 ‘금융 서비스’도 더욱 범위를 넓혀갔습니다.

신도들로부터 ‘예금’만 받는 것에서 유럽의 주요 국가에 대규모 대출을 실행하는 서비스까지 나아갔지요. 순례지의 현지 화폐로 바꿔주는 환전 업무를 담당한 것도 기사단이었습니다.

“기사단 양반, 돈을 좀 빌려주시게.” 19세기 화가 앙리 데케인이 그린 루이7세 초상화.
기사단이 성직자의 꼼꼼함과 정확함으로 장부를 관리했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2차 십자군 전쟁 당시 프랑스의 왕 루이 7세에게 대규모로 돈을 빌려준 것도 기사단이었습니다.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세워진 기독교 왕국인 ‘라틴제국’의 황제 보두엥2세 역시 예수가 못박힌 십자가를 담보삼아 기사단에게 급전을 빌리기도 했습니다. 기사단이 유럽의 주요국가들의 대부업자로서 ‘활약’(?)하고 있었던 셈입니다.

“보두엥 왕이 급전을 빌려달라는데, 그거 쉽게 받을 수 있겠어?” 체스를 두는 기사단을 묘사한 그림.
예루살렘 빼앗겨도 기사단은 ‘융성’
기사단은 유럽 전역에 설치된 본부를 활용해 무역업을 진행하기도 했습니다. 돈과 무력 두 가지 무기를 가지고 있으니, 안전한 무역환경을 제공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양모, 목재, 올리브유 뿐만 아니라 노예까지 거래했다는 기록이 전해집니다. 이렇게 모은 돈으로 지중해 동부 ‘키프로스’ 섬을 사들이기도 했었지요. 지금도 유럽 곳곳에 남아있는 ‘성전 교회(Temple Chruch)’는 모두 옛 기사단이 소유했던 건물입니다.

영국 런던에 자리한 템플처치는 템플 기사단이 사용하던 건물이다. [사진 출처=존 새먼]
1187년 예루살렘은 다시 이교도의 손에 들어갑니다. 이슬람의 영웅 살라흐 앗딘이 이끄는 군사에 의해서였습니다(예루살렘이 이슬람의 손에서 벗어난 건 약 800년 후인 1차 세계대전이었습니다).

십자군으로서는 치명적인 결과였지만, 기사단 조직은 줄어들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제공하는 ‘금융 서비스’가 유럽에서는 필수적으로 자리잡아서였습니다. 이들은 금융 노하우를 유럽의 왕들에게 공유해 세수 확보에 도움을 주기도 했습니다. 프랑스의 왕들은 성전 기사단의 재정 관리로 수입이 120%나 늘기도 했었지요.

“기사단도 나에겐 상대가 안 된다.” 십자군을 상대로 승리한 이슬람의 영웅 살라흐 앗딘을 묘사한 19세기 그림. 구스타브 도레 작품.
정경유착의 비극으로 위기 맞은 기사단
정경유착이 양날의 검인 건 역사가 증명합니다. 유럽의 왕실과 유착으로 크게 성장한 성전 기사단은 그러나 그 종말로 달려가고 있었습니다. 유럽 왕실이 더는 견딜 수 없을 정도로 대출을 실행했기 때문입니다.

지금이야 ‘디폴트’라는 이름으로 채무 불이행을 선언할 수 있다지만, 중세 유럽의 왕은 그보다 더 확실한 방법을 선호했습니다. 기사단을 이단으로 기소하고, 그 재산을 처분하는 일이었습니다. (참고기사 십자군 기사단의 몰락 )

“이단자를 불에 태워라.” 프랑스 왕의 명령으로 십자군 기사단을 학살하는 시민.
가장 큰 조직을 자랑하는 프랑스에서 사달이 일어났습니다. 필리프 4세가 기사단을 체포하고 이들을 화형에 처했습니다. 필리프 4세는 숙적 잉글랜드, 플랑드르와의 잇단 전쟁으로 감당 못할 빚을 기사단에게 지고 있었지요.

기사단은 저항했지만, 결국 강력한 군사력을 자랑하는 왕에게 굴복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프랑스 성전 기사단의 재산은 모두 필리프4세의 수중으로 돌아갔지요.

비슷한 상황에 놓여있던 유럽의 군주들도 비슷한 조치를 강행합니다. 성전 기사단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배경입니다(유일하게 남은 조직은 포르투갈의 그리스도 기사단이었습니다).

예루살렘 성묘교회. 이곳을 지키려는 기사단으로부터 은행 서비스가 잉태되기 시작했다. [사진출처=베르톨트 베르너]
기사단은 사라졌지만, 혁신은 남았다
“기사단으로부터 배우자.”

기사단의 물리적인 모습은 사라졌지만 그들이 남긴 혁신은 민간으로 스며들었습니다. 십자군 전쟁 이후 동서양 무역의 핵심으로 거듭난 이탈리아 상인들에 의해서였습니다. 피렌체, 베니스 등의 도시는 이미 유럽 여러 나라에 핵심 거점을 마련하고 있었지요. 마치 기사단 네트워크처럼요.

“기사단의 정신을 계승하면 큰 돈을 벌 수 있다.” 지오반니 디 비치 데 메디치는 메디치 은행을 설립하면서 가세를 확장했다.
피렌체 메디치 가문의 수장 지오반니는 1397년 첫 메디치 은행을 설립합니다. 탁월한 사업수완으로 그들은 이탈리아 금융산업의 대표주자로 떠오르지요. 로마 교황청이 예금을 맡기는 은행으로 성장했을 정도였습니다. 오늘날 은행의 초기 모습을 띤 형태였지요. 성전 기사단의 정의감이 오늘날 자본주의 혈관을 담당하는 은행의 모태로 작용한 셈입니다.

메디치 가문은 은행업으로 큰 돈을 벌어 수 많은 예술가들을 양성하는 데 힘썼다. 사진은 베노초 고졸리가 1459년 구린 프레스코화. 동방박사 3인의 행렬에 메디치 가족이 함께하는 모습을 그린 작품이다.
<네줄요약>

ㅇ1099년 십자군이 예루살렘을 점령하면서 유럽 전역의 순례객이 폭증했다.

ㅇ객지로 떠난 순례객들은 강도, 살인, 강간에 수시로 노출됐다. 이를 지키고자 성전 기사단이 탄생했다.

ㅇ폭발적인 인기로 여러 지점을 운영한 기사단은 순례객이 출발지에서 맡긴 돈을 성지에서 찾을 수 있는 ‘인출’ 시스템을 만들기도 했다.

ㅇ오늘날 은행의 태동이었다.

<참고문헌>

ㅇ마이클 해그, 템플러-솔로몬의 성전에서 프리메이슨까지 성전기사단의 모든 것, 책과함께, 201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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