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장 뜯으려다 인내심 뜯기는 악마의 포장…근데 그거 뭐지? [그거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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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2024.06.24. 오전 1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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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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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거사전 - 22] 뜯다가 짜증 폭발하는 플라스틱 포장 ‘그거’

“그거 있잖아, 그거.” 일상에서 흔히 접하지만 이름을 몰라 ‘그거’라고 부르는 사물의 이름과 역사를 소개합니다. 가장 하찮은 물건도 꽤나 떠들썩한 등장과, 야심찬 발명과, 당대를 풍미한 문화적 코드와, 간절한 필요에 의해 태어납니다. [그거사전]은 그 흔적을 따라가는 대체로 즐겁고, 가끔은 지적이고, 때론 유머러스한 여정을 지향합니다.



다양한 블리스터 포장. 칼 포장을 뜯기 위한 칼 포장을 뜯기 위한 칼 포장을 뜯기 위한 칼(무한반복)이 필요하다. [사진 출처=visipak.com]
명사. 1. 블리스터 포장 2. 진공 성형, 겟도바시·게또바시【예문】급하게 쓸 일이 있어 가위를 사 왔다. 새 가위의 진공 블리스터 포장을 벗기려니 가위가 필요했다. 너 사탄 들렸어?


블리스터 포장(blister packaging·blister pack)이다. 가열한 플라스틱 시트 주변의 공기를 흡입, 금형에 밀착시켜 모양을 만들고 반대편에 두꺼운 판지(대지라고도 한다)나 알루미늄 포일, 플라스틱 시트 등을 부착해 밀봉하는 포장 방법이다. 플라스틱 제품을 생산하는 방법 중 열성형(thermoforming)의 한 갈래로 진공 성형(vacuum forming)이라고도 한다. 금형과 플라스틱 시트 사이의 진공 상태를 이용해 모양을 만들기 때문이다.

‘겟도바시’라는 정체불명의 단어는 예상대로 일본어다. ‘걷어차다’ ‘일축하다’라는 의미의 게토바시(蹴飛ばし)가 발음 대로 정착한 것인데, 이는 진공 성형 공정 때 기계의 페달을 발로 밟아서 작동시키는 모습에서 나온 명칭이란 설이 유력하다.

진공 성형 공정. [사진 출처=케이에이치테크 홈페이지]
열받게 만드는 포장임에도 불구하고 멋있긴 하다. [사진 출처=Formech 홈페이지]
블리스터(blister)는 피부의 물집·수포나 표면의 기포, ‘(표면이) 부풀어 터지게 하다’를 뜻하는 단어다. 제품 부분만 볼록하게 튀어나온 모습에서 이름의 유래를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엄밀히 말하면 물집처럼 부풀어 오르는 것이 아니라, 주변부가 흡착되면서 금형 부분만 도드라져 보이는 것이지만 이런들 저런들 어떠하리.

플라스틱 시트의 재질은 다양하게 쓸 수 있지만 포장재 용도로는 주로 PP(폴리프로필렌)·PET(폴리에틸렌 테레프탈레이트) 등이 많이 쓰이는 데 문제는 이 재료들의 강도가 무척 높다는 점이다. 거기에 더해 플라스틱 포장재끼리 맞붙이고 고열로 녹여서 밀봉하는 열접착(히트 실링) 포장 방식을 쓸 경우 손아귀 힘만으로 뜯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설령 어떻게든 뜯어낸다고 해도, 날카롭게 뜯긴 부분에 다치기 일쑤다. 가위나 칼을 이용해 뜯다가 다치거나 내부의 제품이 손상되는 경우도 왕왕 발생한다. 여기까지만 들으면 세상에서 없어져야 할 ‘악마의 포장’이라는 세간의 비난이 과하지 않다.

블리스터 포장 대참사. 하필이면 선이 종이 사이에 가려져 있어 포장을 뜯다가 마우스 선까지 잘라버렸다. 포장 디자이너의 순수한 악의 마저 느껴진다. [사진 출처=인터넷 커뮤니티]
블리스터 포장은 튼튼하고 저렴하다. 모든 공정을 자동화 작업으로 대체할 수 있어 생산성도 높다. 금형을 만들고 수정하는 비용과 수고가 적고 시간도 많이 소요되지 않아 다품종 생산에 적합하다. 다른 포장 방식에 비해 부피도 작은 편이라 물류비용을 아낄 수 있다. 박스 포장과는 달리 제품을 투명 플라스틱 포장 너머로 한눈에 볼 수 있어 판촉에 유리하다. 성형 단계에서 구멍이나 걸이 부분을 만들어두면 진열도 용이하다. 뜯기 어렵다는 단점 마저 ‘도난이 어렵다’ ‘재포장으로 인한 내용물의 변경·위조가 어렵다’는 장점으로 치환할 수 있다. 온전하게 뜯기 어렵다 보니 소비자의 단순 변심으로 인한 환불도 미리 방지하는 효과도 탁월하다. 장점을 찾다 보니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포장이다. 정작 뜯어야 하는 소비자만 빼놓으면 말이다.

블리스터 포장 때문에 태어난 표현도 있다. 바로 포장 분노(wrap rage)다. 포장, 그중에서도 블리스터 포장을 열 수 없어서 분노와 좌절이 극도로 치솟는 상황을 뜻한다. 2003년 영국에 있는 일간지인 데일리 텔레그래프에서 처음으로 사용한 이 용어는 언어학 교수와 작가 등으로 구성된 미국방언학회(ADS)에서 2007년 가장 유용한 단어로 선정하기도 했다. 2017년 제프 베조스 아마존 창업자 겸 이사회 의장(당시 CEO)은 한 대담에서 ‘포장 분노’를 언급하며 구매자의 상품평 중 포장에 대한 불만이 상당했으며 “(이는) 어떠한 혁신적 시도보다 앞서 해결해야 할 문제”라고 강조한 바 있다. 블리스터 포장의 불편함에 대해 공감해준 건 고마운데, 아마존의 ‘자칭 친환경’ 종이 포장이 얼마나 허술한지 경험해본 사람이라면 마냥 기쁘지는 않다.

택배 상자(였던 것). 아마존은 그 어떤 값비싼 물건도 부실한 골판지 상자와 대충 구겨 놓은 종이 완충재로 대충 포장해서 보내는 쿨한 구석이 있다. 카메라 렌즈도, 한정판 블루레이도 가차 없다. 하지만 북미 지역 대표 배송 업체인 UP*·페덱*에 비하면 양반이라는 게 업계의 정설이다. [사진 출처=인터넷 커뮤니티]
블리스터 포장 따위 없어졌으면 - 홧김에 생각했다면 마음을 고쳐 먹기 바란다. 현대 사회에서 진공 성형으로 만든 제품 없이 살기에 도전한다면 단 하루도 버티기도 힘들기 때문이다. 전자제품, 문구 등 다양한 공산품 제품 포장 외에도 편의점 도시락 용기, 배달 음식 배달 용기도 블리스터 방식으로 만든다. 욕조, 자동차 내외장재, 항공기나 선박 부품 일부도 블리스터 방식에 빚지고 있다.

무엇보다 블리스터 포장이 없으면 약(藥)도 없다. 엄격한 조건이 따라붙는 의료·제약용 멸균 플라스틱을 블리스터 포장 재료로 쓸 수 있어 의약품·의료기기 포장에 쓰이기 때문이다. 자동화된 제조 공정을 통해 불순물과 오염 물질이 공급망에 유입될 가능성이 작고, 개별 밀봉 방식인 덕에 습도와 온도로부터 의약품을 안전하게 보관할 수 있다. 대용량 병 포장을 주로 사용하던 북미 지역에서도 블리스터 포장이 대세로 자리잡고 있는 이유다.

지금 당장 구급함을 열어 보자. 블리스터 포장 방식이 아닌 약을 찾기 힘들다. [사진 출처=Roberto Sorin, unsplash]
글로벌 시장조사기관 그랜드뷰리서치에 따르면 전 세계 블리스터 포장 시장 규모는 2022년 270억9500만 달러였으며 2023년부터 2030년까지 연평균 성장률(CAGR)이 7.2%에 달할 것으로 예상했다. 2030년 매출 전망은 467억2000만 달러에 달한다. 앞서 언급한 안전성과 다른 이점 덕에 블리스터 포장에서 헬스케어 부문이 차지하는 비중은 64.4%에 달한다.

블리스터 포장 중에는 클램셸(clamshell·조개 껍데기) 방식도 있다. 중앙에 경첩(힌지) 부분을 중심으로 접어서 뚜껑이 달린 포장 용기로 사용하는 방법이다. 접착 방식이 아니라, 겹쳐서 결합하는 방식이 많아 쉽게 여닫을 수 있고, 포장 분노를 일으키지도 않는다. 투명한 플라스틱 클램셸 포장은 딸기나 블루베리 따위의 무른 과일이 손상되지 않게 포장하는 용도로 많이 쓰이는데, 딸기류를 판매·유통하는 미국 기업 드리스콜스가 1990년대 처음으로 도입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클램셸 방식의 블리스터 포장은 무른 과일을 안전하게 보관, 운송, 진열하면서 동시에 소비자로 하여금 제품의 상태를 눈으로 확인할 수 있도록 돕는다. [사진 출처=Driscoll’s]
  • 다음 편 예고 : 새 양말 사면 달린 금속집게 ‘그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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