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딩크 감독은 프랑스 보르도 와인 샤토 탈보(Chateau Talbot)를 좋아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탈보는 영국군 총사령관의 이름입니다. 탈보 장군은 잔 다르크가 활약한 프랑스와 영국의 ‘백년전쟁’의 마지막 전투에서 전사합니다. 프랑스 와인에 영국 장군의 이름이 붙은 이유는 무엇일까요? 프랑스 보르도 지역의 와인이 지금처럼 유명하게 된 이유와 맞닿아 있습니다. 당대 최고의 엄친딸인 엘레오노르의 재혼으로 보르도가 ‘뜨거운 감자’가 되면서 이야기는 시작됩니다.
이번 주 김기정의 와인클럽 주제는 유명 와인산지 프랑스 보르도와 백년전쟁입니다.
하지만 더 큰 차이는 프랑스 보르도가 한 때 영국 땅이었고 상당히 오랜 기간 보르도 와인의 주요 소비자도 영국인이었기 때문입니다.
프랑스 보르도가 와인의 주요산지로 떠오른 것은 12세기에 들어와서입니다. 그 배경에는 당시 유럽의 귀족사회를 흔들어 놓았던 ‘세기의 결혼’이 있었습니다. 주인공은 엘레오노르 다키텐. 프랑스 루이 7세의 왕비였다가 영국(잉글랜드) 헨리 2세의 왕비가 된 인물입니다.
1152년 프랑스왕 루이 7세와 이혼한 엘레오노르는 노르망디 공작 앙리(Henri)와 재혼합니다. 엘레오노르는 보르도 지역을 포함한 아키텐 공국의 상속녀였습니다. 아키텐 공국의 땅은 당시 프랑스 왕의 영지보다 더 넓었는데요. 당시는 결혼 때 신부가 지참금을 가지고 가는 풍습이 있었습니다. ‘다이아몬드 수저’ 엘레오노르는 결혼 지참금으로 자신의 상속분을 가지고 앙리에게 시집을 갔는데요. 상속받은 보르도 땅도 결혼 지참금에 포함됐습니다.
전 남편인 루이 7세 사이에선 딸만 둘을 두었는데 헨리 2세와의 사이에선 무려 5명의 아들과 3명의 딸을 낳습니다. 엘레오노르의 후손들이 유럽 각 나라의 왕과 왕비가 되면서 엘레오노르는 ‘유럽의 할머니’라는 별칭을 얻게 됩니다.
주목할 점은 프랑스 왕과 결혼했던 엘레오노르가 상속받은 영토를 어떻게 재혼하면서 영국으로 가져갈 수 있었느냐는 점인데요. 그 이유는 엘레오노르와 전 남편 프랑스 왕 루이 7세 사이에 아들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루이 7세가 엘레오노르와의 이혼에 동의했던 것도 엘레오노르가 아들을 낳을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인데요. 당시 ‘아들’은 왕위 계승자란 측면에서도 중요했지만 엘레오노르가 물려받은 재산권을 행사하는데도 중요한 키워드였습니다.
엘레오노르의 아버지는 딸이 결혼을 한 뒤 지참금을 남편에 빼앗길 것을 우려했습니다. 그래서 상속 재산을 남편인 루이 7세가 아닌 부부 사이에 태어난 ‘아들’에게 주는 것을 조건으로 달아 놓았습니다. 사위보다는 손자가 더 믿음직하고 안심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겁니다. 엘레오노르는 루이 7세와의 사이에선 아들 없이 딸만 둘을 낳았기 때문에 고스란히 자신이 상속받은 재산을 재혼한 헨리 2세에게 가져갈 수 있게 됩니다.
영국 왕실은 프랑스에 있는 보르도의 충성심을 확보하기 위해 보르도 와인에 세금혜택을 주었고, 그 결과 보르도 와인이 영국 시장을 독점합니다.
당시에는 프랑스 남서부 와인들도 우수한 품질을 인정받아 보르도 항구를 통해 해외에 수출됐었는데요. 보르도 와인상들은 보르도 지역 와인이 모두 팔린 이후에만 다른 지역 와인의 보르도 반입을 허용합니다. 이를 통해 보르도 와인은 입지를 다지고 지금까지도 프랑스 남서부 와인을 압도하게 됩니다.
부연하자면 지금의 유명 와인산지인 보르도 ‘오 메독’ 지역은 당시에는 늪지대였습니다. 17세기 네덜란드 상인들이 늘어나는 보르도 와인수요를 충당하기 위해 간척한 땅입니다. 지금의 보르도와 당시 보르도는 생산하는 와인도, 지역도 달랐지만 보르도 와인의 명성은 엘레오노르가 결혼 지참금을 가져온 시점부터 시작됐다고 해도 무방할 듯합니다.
보르도는 백년전쟁이 끝날 때 까지 300년 동안 영국 영토였습니다.
필리프 4세의 아들이자 프랑스 왕 샤를 4세가 후계자 없이 1328년 사망합니다.
필리프 4세는 ‘아비뇽 유수’를 일으킨 인물로 이를 통해 ‘교황의 와인’으로 불리는 샤토뇌프 뒤 파프(Chateauneuf du Pape)가 탄생한 스토리를 살펴본 적이 있습니다. ☞ 교황의 와인 샤토뇌프 뒤 파프
당시 영국왕 에드워드 3세는 자신이 프랑스 왕 샤를 4세의 후계자라고 주장합니다. 에드워드 3세의 어머니가 필리프 4세의 딸이자 샤를 4세의 누이였기 때문입니다. 복잡한가요? 쉽게 말해 에드워드 3세가 필리프 4세의 외손자였던 셈이죠.
하지만 프랑스 귀족들의 생각은 달랐어요. 영국에게 보르도 등 방대한 프랑스 영토를 잃은 것도 속이 상한데 왕권마저 영국에 넘길 수는 없다는 정서가 강했습니다. 그래서 카페 왕조가 아닌 발루아 백작이 필리프 6세로 왕위에 오릅니다. 필리프 6세는 필리프 4세의 동생이 낳은 아들입니다. 프랑스 카페왕조는 막을 내리고 발루아 왕조가 시작됩니다.
에드워드 3세는 자신이 샤를 4세를 이을 적통이라며 “필리프 6세가 자신을 왕이라 칭한다”고 주장합니다. 에드워드 3세는 무역보복으로 양모 수출을 금지하고, 필리프 6세는 이에 맞서 보르도를 몰수한다고 선언하며 긴장감이 고조됩니다. 결국 에드워드 3세는 프랑스와 전쟁을 선포하며 노르망디에 상륙합니다. 네 맞습니다. 2차대전 ‘노르망디 상륙작전’의 그 노르망디입니다. 백년전쟁의 시작입니다.
얘기가 길어졌습니다. 백년전쟁에 참전한 탈보 장군과 또 다른 장군의 스토리는 다음 회에 계속 이어가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