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황제 폐하는 한국 전체에 관한 일체 통치권을 완전히 또 영구히 일본 황제 폐하에게 양여함.'
114년 전 1910년 8월29일. 우리나라가 국권을 일본에 완전히 빼앗겼다. 경술년에 벌어진 국가적 치욕이라는 의미에서 '경술국치'로 불린다. 이날은 경술국치일로 역사에 기록됐다.
'한일합병조약'으로 국권을 상실하면서 '한일합병'이라고도 불린다. '국권피탈'이라고도 한다. 이 조약으로 한국은 1945년 광복을 맞기까지 36년간 일제강점기를 보내며 민족적 수난을 겪었다.
일본은 1904년 한일협약을 강제로 체결하면서 일본 정부가 추천하는 고문을 재무, 외무에 두도록 했다. 이로써 재정권과 외교권을 빼앗았다.
이후 한국 침략을 두고 러시아를 견제하면서 미국, 영국과 전략적으로 손을 잡았다.
러일전쟁에서 승리를 거머쥔 일본은 미국과 1905년 7월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맺었다. 일본 총리대신 가쓰라와 미국 루스벨트 대통령 특사 태프트 육군장관이 손을 맞잡고 비밀협약을 맺어 붙여진 이름이다. 일본이 미국의 필리핀 지배를 인정하는 대신 미국이 일본의 한국 식민지화를 묵인하는 것이 주된 내용이다.
영국과는 영일동맹을 통해 한국에서의 독점적 지위를 승인받았다.
이후 1905년 11월 일제는 고종을 협박하고 매국노들을 매수해 을사조약(제2차 한일협약)을 체결했다. 이를 계기로 외교권이 완전히 박탈돼 주한 외국공관이 철수하는 데까지 이르렀다.
고종은 을사조약을 무효화하고 나라를 지키려 1907년 6월 네덜란드 헤이그 평화회의에 특사를 파견했지만 이를 알게 된 일제가 고종을 강제로 퇴위시키면서 내정권까지 장악했다.
이어 언론을 탄압하고 군대 강제 해산을 단행하면서 국권 침탈 작업을 속도감 있게 이어갔다. 한일합병조약 체결에 앞서 경찰을 통합시키고 기존 사법경찰권은 물론 일반경찰권까지 빼앗았다.
36년간 최악의 나날들, 우리 말도 못 썼다 한일합병조약은 조선의 3대 통감으로 온 데라우치 육군대신이 총리대신 이완용에게 합병조약안을 수락하도록 독촉하면서 맺어졌다. 앞장서서 친일 반민족 행위를 한 대표적인 매국노로 꼽히는 인물이다.
조약안을 보면 "한국 황제 폐하는 한국 전체에 관한 일체 통치권을 완전히 또 영구히 일본 황제 폐하에게 양여함. 일본국 황제 폐하는 양여를 수락하고 완전히 한국을 일본 제국에 병합하는 것을 승낙함"이라는 내용이 담겼다.
이어 조약이 조인되면서 한국은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했다. 조선왕조 건국 519년, 대한제국 성립 14년 만에 벌어진 일이었다. 일제는 조선총독부를 세우고 본격적인 식민 통치를 시작했다.
토지조사사업이라는 미명으로 농업 지배 체제를 확립하면서 토지를 탈취했다. 또 한국 기업 설립이 불가능하도록 조치했고 문화, 교육 등 모든 영역을 파괴했다. 우리 말과 역사를 가르치지 못하도록 감시했다. 학교에서도 일본어, 일본 이름을 써야 했다.
"국권 회복 못 한다면 살 이유도 없다" 경술국치는 문자 그대로 국가적 치욕이었다. 조선의 마지막 충신으로 꼽히는 학부대신 이용직은 "망국안에 목이 달아나도 찬성할 수 없다"면서 뛰쳐나갔다고 한다.
치욕적인 소식에 자결하는 애국자들도 속출했다. 러시아 공사를 지낸 이범진은 "국권을 회복할 방책이 없다면 더 이상 살아야 할 이유가 없다"며 "자결 외에 할 수 있는 일이 아무 것도 없다"는 말을 남기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고종은 퇴위당한 이후 비밀리에 항일운동을 벌였다는 설, 해외 독립운동 자금을 지원했다는 설 등이 돌았지만 확인된 것은 없다. 그러다가 1919년 덕수궁에서 사망했는데 일본에 독살됐다는 설이 제기되면서 반일 정서가 커졌고 전국적으로 독립운동이 벌어지는 계기가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