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미니스트 딸에게 ‘엄마’라는 화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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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 페미니스트, 내 머리맡의 책] 마이 디어 아스터
엄마와 여행 갔을 때 찍은 엄마의 뒷모습. 사진을 자주 찍는 편이 아닌데 풍경이 마음에 들었는지 열심히 촬영하는 모습이 귀여워서 찍었다. (촬영-정한새)    


[필자 소개] 정한새. 패배한 사랑과 함께 가는 사람. 퀴어, 페미니스트, 계약직 노동자. 서평가, 북튜브/팟캐스트 ‘페어북 ; 페미니스트 퀴어 북클럽’의 공동 기획자 겸 진행자. 주중에 읽고 쓰고, 주말에는 누워있는다. [email protected]
 
“엄마가 혹시 다시 살게 되면, 나 낳지 말아요.”
“갑자기 무슨 소리니, 그게?”
“나 안 낳아 줘도 돼. 그러니까 엄마 마음대로 살았으면 좋겠어.”
(중략)
“아빠 말고 더 좋은 사람 만나요. 좀 멋있는 남자로. 엄마가 힐 신어도 될 만큼 훤칠하게 크고, 얼굴도 잘생기고, 엄마 그림 그리는 것도 이해해 줄 사람.”
-〈마이 디어 아스터〉 1화, 한민트 저
 

어렸을 때, 아주 어린 건 아니고 성차별에 대해 인지하기 시작할 즈음에는, 엄마처럼 살지 않겠다고 다짐하곤 했다.
엄마가 나쁜 사람이거나 불행한 삶을 살아서는 아니었다. 그보다는 ‘엄마’라는 존재가 놓여 있는 위치 때문이었다.
 
아들을 낳지 않아 출산 직후 노심초사했던 ‘엄마’(그렇다. 나는 대를 끊은 딸이다), 밖에서는 돈을 벌고 안에서는 집안일을 하는 ‘엄마’(그렇다. 나는 엄마가 벌어온 돈으로 먹고 자랐다), 명절마다 ‘시댁’에 가서 집안일 다 하고 하룻밤 자고 다음 날 도착한 ‘친정’에서도 집안일 다 하고 엉덩이 한 번 제대로 못 붙이는 ‘엄마’, 남편이 술 마시고 전화하면 데리러 나가야 했던 ‘엄마’, 딸더러 살 빼라고 일부러 상처 주는 말만 골라 했던 ‘엄마’(그렇다. 나는 한동안 동네 보이기 창피한 딸이었다), 이 외에도 글로 쓰려고 하자니 너무나 작고 사소하지만 오랜 시간 나를 괴롭혔던 수많은 ‘엄마’의 순간이 있었다.
 
나는 이런 것을 전부 감당하고 싶지 않았다. 폭력적인 남편과 말 안 듣는 딸(자기객관화가 나의 큰 장점이다), 명절마다 예배 보며 교회 가라고 성화인 시댁 등등과 전부 결별하고 싶었다. 이 일을 겪는 당사자는 엄마임에도, 나는 엄마에게 아주 쉽게 이입할 수 있었다.
 
그러나 몇 년이 지나 나이를 먹고 사회생활이라는 걸 하면서부터는 마음이 바뀌었다. 엄마가 ‘엄마’의 위치에 놓인 게 엄마의 잘못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엄마의 결혼 여부가 문제가 아니라는 걸 알았다. 문제는 ‘아빠’, 그러니까 ‘아빠’라는 단어로 대표되는 가부장제 그 자체였다. 내가 “‘엄마’처럼 살기 싫다”고 했을 때의 그 ‘삶’은 결국 가부장제가 여성에게 강제해 버린 역할 그 자체였다.
 
이 사회가 ‘아들을 낳아야 한다’고 압박을 가하지 않았다면, 엄마는 나를 낳고 노심초사할 필요가 있었을까? 사회가 여성의 일은 ‘용돈벌이’ 정도로 취급하고, 남성이 가장이며 남성이 번 돈만이 진짜로 가족을 먹여 살리는 돈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면, 엄마가 퇴근 후 집이 원래 가지고 있는 의미대로 안전하게 쉴 수 있지 않았을까? 왜 며느리는 시댁에 가면 쉼 없이 일해야 할까? 그리고 친정에 가도 정작 대접받는 건 사위일까? 왜? 왜? 왜?
대학에서 여성학을 배우고, 지금까지 내가 알던 인간관계에서 벗어나 성별 불문, 나이 불문 다양한 사람을 만날 때마다 위화감은 커지고 질문은 늘어났다.
 
결국 사회가 가부장제 하에서 운영된다면, ‘엄마’처럼 살지 않겠다는 다짐은 사실상 무용하다. 자식을 가져 ‘엄마’라는 타이틀을 획득하지 않더라도 우리의 일부는 거의 본능처럼 ‘엄마’처럼 움직이도록 훈련되었기 때문이다. 삶의 주도권을 남성에게 넘기라고 꾸준히 요구받고, 공적인 영역에서 성공하려고 하지 말 것이며, 저임금을 받고 돌봄의 영역에서 적당히 머무르며, 결혼과 출산을 통해 남성의 삶에 이바지할 것. 이 외에도 일상적으로 무수히 가해지던 압박들.
 

그것이 40년, 50년, 60년, 일평생이 걸려서라도 어머니가 날 낳기 전으로 시간을 돌렸을 바로 그 자식이고 그 마법사이니까요. (중략) 살아 있는 하루하루, 숨 쉬고 있는 것을 자각할 때마다, 한순간도 그 생각을 하지 않은 적이 없었습니다. 어머니의 인생을 잡아먹고 태어나서는 안 되었다고. 낳아주신 것을 원망한 것은 아니지만, 어머니가 나를 사랑하는 것도 알고, 이따금, 때때로, 그런대로 만족하며 즐거워하시는 것도 알고, 내가 어머니를 다소나마 행복하게 해 드릴 수 있다는 것도 알지만.
-〈마이 디어 아스터〉 45화, 한민트
 
내 화두가 ‘엄마처럼 살지 않겠다’가 아니라, ‘엄마, 다시 살게 되면 나 낳지 말고 마음대로 살아’로 바뀌는 건 순식간이었다.
 

웹소설 〈마이 디어 아스터〉(한민트 저) 표지    


엄마는 주관적으로 보나 객관적으로 보나 괜찮은 사람이다. 자기 전공을 살려 취직해 정년에 가까운 지금까지 성실하고 진지하게 일하고 있다. 언제나 가정 경제 상황을 점검하며 그 안에서 최선을 다해 남편이 친 사고를 수습하며 딸 둘을 키워냈다. 책 읽기를 좋아해서 만화부터 철학서까지 두루두루 읽고, 그만큼 타인을 생각하는 시각이 넓었다. 엄마의 대학 후배들도 엄마를 존경해 오랜 시간 교류를 이어왔고 10대, 20대, 30대 이후에 만난 친구 여럿과 교우 관계를 유지할 정도로 성격이 좋다. 공장식 축산의 문제점에 관해 알게 된 이후로 여러 해째 비건식을 지향하고 있다.
 
내가 양성애자(bisexual)라고 얘기했을 때도, 엄마는 딱 한 번 ‘엄마는 엄마니까, 네가 다른 사람처럼 평범하게 살면 얼마나 좋을까 싶다’라고만 얘기한 뒤, 나 몰래 성소수자에 대해 공부하고 아빠에게도 은근슬쩍 다양한 성정체성에 대해 알렸다. 엄마는 한순간도 당신 딸이 퀴어/비혼이라서 자신을 부끄러워하거나 양육에 실패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엄마가 완벽하다고 이야기하려는 게 아니다. 타인에게 엄마의 단점을 말하고 싶지 않아 쓰지는 않겠지만, 여러 단점이 있다(세상에 딸만큼 엄마 흉 잘 보는 사람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엄마가 가진 흠결은 여타 한 사람이라면 모두가 가질 법한 정도다. ‘엄마가 되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을 때 ‘엄마’가 가진 단점이, 엄마 개인의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는 뜻이다.
 
이 글을 쓰려고 준비하면서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엄마와의 이야기를 써도 되는지 물어보고 싶었고, 다음에 태어나면 나 낳지 말고 자유롭게 살라고도 말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엄마는 내가 전혀 생각지 못했던 답을 했다.
 
-다음 생이 있다면 남자로 태어나고 싶은데.
 
내세 같은 건 믿지도 않는데 별스러운 가정을 다 한다던 엄마가 결국 투덜거리듯 말했다.
 
나는 아무리 차별받고 무시당해도 여자인 지금이 좋아서 남자로 태어나고 싶다는 생각은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는데, 엄마의 삶에서 성별은 내 생각보다 훨씬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나 보다.
 
-그래도 여자로 다시 태어난다면, 네 엄마 하는 건 좋아.
 
그리고 엄마는 비밀스럽게 덧붙였다.
 
-남편은 바꿔야지.
 
나는 웃으며 아빠한테 이 대화를 비밀로 하자며 전화를 끊고, 웃은 만큼 울었다.
 
다시 태어나고 싶지도 않고, 만약 다시 태어나면 남자로 태어나고 싶은데, 그 모든 바람을 어겨 결국 또 여자로 태어나도 내 엄마를 해주겠다는 말 앞에서 모든 게 무장해제 되는 기분이었다.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어디 있단 말인가.
 
그래서 엄마가 ‘엄마’가 아니었다면 지금보다 훨씬 나은 삶을 살게 되지 않았을까, 같은 상상은 하지 않기로 했다. 지금의 엄마는 불행하지 않고, 나의 그런 상상은 엄마가 가꿔 온 엄마의 삶을 무시하는 일이니까. 그저 ‘엄마’의 앞에 놓인 것은 ‘아빠’에게 주어진 것보다 적고 좁은 선택지였고, 엄마는 그 안에서 최선을 다해 살았을 뿐이다.
 
그러니 다음 생에도 기꺼이 다시 내 엄마로 살겠다는 엄마를 믿고 나아가기로 한다. 공기처럼 존재하는 성차별과 유리처럼 존재하는 혐오를 인식하며 퀴어의 얼굴로, 페미니스트의 얼굴로 따박따박 걸어가기로 한다. 지금도, 내세에도 세상이 나를 괴롭힐 때 엄마가 기꺼이 안아줄 것을 알기 때문이다.
 
또한 나는 안다. 엄마는 아무런 죄가 없다. ‘엄마’도 아무런 죄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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