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2년 조미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된 후 미일전쟁으로 모든 개신교 선교사들이 철수해야 했던 1942년까지 내한한 선교사는 1529명으로 추정된다. 1885년 부활절인 4월 5일 첫 내한 선교사인 미국 북장로회 호러스 언더우드와 북감리회 헨리 아펜젤러가 인천 제물포항에 내렸다. 이들은 어떤 마음으로 이역만리 낯설고 척박한 미지의 땅을 찾았을까. 한국기독교 140주년을 맞아 지난달 27일부터 지난 2일까지 한국을 사랑한 선교사들의 흔적을 따라가봤다.
지난달 28일(현지시간) 찾은 미국 뉴저지주 노스버겐의 그로브개혁교회. 언더우드가 12세 때 영국 스코틀랜드에서 가족과 함께 이민 와서 다녔던 교회다. 9개 교회를 개척하고 한때 1000명을 넘었던 이 교회 성도수는 지금은 40~50명으로 줄었다. 교회 묘지에는 언더우드 가족묘가 있었다. 하지만 언더우드는 한국에 묻히길 원해 1999년 한국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으로 이장했다. 이번 탐방을 주선한 소강석 한국교회미래재단 이사장(새에덴교회 목사)은 “언더우드 심장에 하나님을 향한 불이 타오르고 언더우드의 신적 소명과 신심이 오늘의 대한민국을 만드는 동력이 됐다”며 “그가 다니던 교회 모습을 보니 마음이 아프고 다시 미국에 빚을 갚아야겠다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언더우드는 뉴욕대를 졸업한 뒤 뉴저지 뉴브런즈윅신학교에 입학해 신학을 공부하고 목회자가 됐다. 언더우드는 다섯 살 때 돌아가신 어머니의 유언대로 형제들이 돈을 모아서 선교사로 보냈다. 큰형 존 토머스 언더우드는 타자기 사업으로 큰돈을 모았고 이를 동생의 선교자금으로 댔다. 이들에겐 세계선교가 꿈이었고 언더우드를 통해 그 꿈을 실현했다. 인도로 선교를 하러 가려던 언더우드는 선교잡지에 실린 이수정의 선교요청 서신을 접하고 한국으로 방향을 틀었다. 병원도 없는 척박한 땅으로 떠나겠다고 하자 약혼녀는 파혼을 선언했다. 하지만 그의 선교 열정을 꺾지는 못했다. 뉴브런즈윅신학교의 글로벌 기독교 언더우드 센터장인 김진홍 석좌교수는 “언더우드의 선교편지를 보면 조선은 (일본에) 나라를 잃었지만 1919년 3·1운동을 계기로 크리스천코리아가 될 것이라는 꿈이 있었다”고 했다. 언더우드는 새문안교회를 비롯해 국내에 24개 교회를 세우고 조선기독대학(연희전문대학)과 경신학교를 설립했다.
언더우드와 아펜젤러 중 누가 먼저 제물포항에 발을 디뎠을까. ‘레이디 퍼스트’의 미국문화상 아펜젤러 부인이라는 농담이 전해지기도 한다. 하지만 지난달 29일 아펜젤러가 신학을 공부한 뉴저지주 매디슨의 드루신학교에서 만난 아펜젤러의 증손녀 쉴라 플랫(76) 여사는 두 선교사가 팔짱을 끼고 동시에 내렸다고 증언했다. 그는 또 올여름 사촌집에서 드루대 친구들과 약혼녀에게 보낸 아펜젤러 편지와 사진들이 발견됐는데 아펜젤러가 상당히 유머 있고 선교사로 아주 헌신적이었음을 보여준다고 말했다.
지난달 30일 뉴저지에서 남쪽으로 차로 한 시간여 거리에 위치한 펜실베이니아 수더튼의 임마누엘 레이디스 교회를 찾았다. 아펜젤러가 태어나서 고등학교를 마칠 때까지 다녔던 교회다. 이 교회는 선교에 대한 관심이 컸고 지금도 300~350명이 출석하는 미국에선 제법 큰 교회다. 교회 옆에는 아펜젤러 가족묘가 있고 멀지 않은 거리에 아펜젤러가 살았던 집이 있다. 아펜젤러는 드루신학교를 졸업한 뒤 목회자가 됐고 부인과 함께 한국에 입국했다. 정동제일교회와 인천 내리교회를 세우고 배재학당을 설립했다. 그는 몸이 아파 미국에 갔을 때 친구가 미국교회 담임을 맡아 목회할 것을 권유했으나 “나는 미국뿐 아니라 조선에서도 하늘나라에 갈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고 했다. 아펜젤러는 배를 타고 가다 충돌 사고를 당했을 때 어린 여학생을 구하다 목숨을 잃었다. 2021년 11월 기독교대한감리회가 이곳에 세운 아펜젤러 추모비에는 “그의 삶과 가르침은 한국교회에 깊은 인상을 남겼고 여전히 한국 감리교 신앙의 아버지로 기억되고 있다”고 적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