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총선을 앞두고 이승만 초대 대통령을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 ‘건국전쟁’을 둘러싼 논란이 정치권 안팎에서 거세다. 한동훈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은 영화를 본 뒤 “대한민국이 여기까지 오게 된 중요한 결정을 적시에 제대로 하신 분”이라고 했다. 반면 더불어민주당은 “친일파 청산을 가로막았고, 한국전쟁 당시 국민을 버리고 서울을 탈출했다”고 반박한다. 영화 속 사실관계를 놓고 한국사 강사 황현필씨와 정치 유튜버 등의 ‘팩트’ 공방도 이어지고 있다.
이 전 대통령 공적과 과오에 대한 역사학계의 연구·평가는 사실상 이견이 없다. 그러나 보수 및 진보 진영에서 나타나는 ‘신화화’ 및 ‘악마화’ 공방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특히 건국전쟁 개봉 시점이 선거와 맞물리며 역사의 정치화 우려는 더욱 커진 상태다.
국민일보는 영화가 다룬 이 전 대통령 행적 중 ‘친일 논란’ ‘서울 피란’ ‘3·15 부정선거’ 등을 중심으로 사실관계를 확인했다. 영화 속 주장의 근거는 대체로 역사적 자료와 일치했지만, 이 전 대통령 발언·기록을 일부만 인용하거나 전후 맥락을 생략한 채 단편적으로 서술한 부분도 적지 않았다.
우선 영화에는 “이승만 대통령은 초대 내각에 친일파를 등용하지 않았다”는 주장이 나온다. 이 전 대통령에 대한 일각의 친일 비판은 과도하다는 것이다. 초대 내각에 친일 인사가 없다는 것은 대체로 사실이다. 국민일보가 제헌국회 회의록과 공보처, 친일인명사전 등을 토대로 이승만정부 초대 내각 19명을 조사한 결과, 친일 의혹 인사는 윤치영 내무부 장관 1명이었다. 윤 장관은 친일 논란으로 2010년 국가유공자 서훈이 취소됐다.
그밖의 내각 인사엔 독립운동가와 사회주의 계열 인사가 다수 포진한다. 상하이임시정부 재무총장 출신인 이시영 부통령과 광복군 참모장인 이범석 국무총리 겸 국방장관 등이다. 조봉암 농림부 장관과 김동원·김약수 국회부의장 등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도 내각에 포함됐다.
다만 이런 인선엔 현실적 이유도 작용했다는 것이 학계의 연구 결과다.
한국민족운동사학회장인 강혜경 숙명여대 교수는 29일 “독립운동가를 다수 배치한 것은 권력배분 문제를 둘러싸고 (이 전 대통령과) 맞선 한민당을 견제하기 위한 장치였다”고 분석했다. 홍용표 한양대 교수는 “이 전 대통령은 조직을 가지고 있지 않아 여운형 김규식 김구 등에 비해 불리한 위치였다”고 했다.
이와 별개로 이 전 대통령이 초대 내각에 친일 경찰과 군을 활용해 권력 기반을 다진 것도 사실이다.
서희경 서울대 한국정치연구소 연구원은 논문 ‘이승만의 정치리더십 연구’에서 “정부 수립 후 1949년 8월까지 서울시 경찰국 부국장 3인 모두 일제 경찰과 관리를 지냈고, 5개 부서 과장 9명 중 6명이 일제 경찰 출신이었다”고 분석했다.
이 전 대통령은 1952년 독도를 한국 영토에 포함하는 ‘이승만 라인’을 발표하는 등 반일(反日) 정책을 다수 시행했다. 그러나 반공(反共) 기조를 강화하면서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를 탄압했고, 그 결과 친일파 청산에 미온적이었다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게 됐다는 평가다. 서 연구원은 “반민특위 무산은 한국 현대 역사에 깊은 상처를 남겼다”고 했다.
영화는 6·25전쟁 당시 이 전 대통령 행적을 비판하는 목소리에도 오류가 있다고 주장한다. 특히 1950년 6월 27일 대전으로 피란한 뒤 방송된 라디오 육성연설에 “서울시민 여러분, 안심하고 서울을 지켜 달라”는 말은 없었는데, 실제 이런 말을 한 것처럼 퍼지며 그를 도망자로 폄훼하고 있다는 것이다.
KBS 현대사 아카이브에 공개된 12분47초 분량의 이 전 대통령 육성연설에 따르면 ‘서울에 남으라’는 취지의 발언이 없었던 것은 맞는다. 연설에는 “미국 원조가 있을 것” “국민이 피란을 떠나는 것은 이해할 수 있다” “군대가 강력하게 싸워야 한다” 등 발언이 담겼다. 이른바 ‘서울 사수’ 취지로 해석되는 내용은 없었다.
다만 정부 방송이 혼선을 키운 측면도 있었다. 이 전 대통령 남하 이전 국방부 특별발표엔 “의정부 전투에서 승리해 수원 천도 결정을 취소했다” “정부는 여전히 서울에 있고, 국회는 서울 사수를 결의했다” 등 내용이 수차례 담겼다. 전란 상황에서 국민에게 ‘서울 사수’ 의도로 이해될 수 있는 부분이다.
피란 당시 국민적 혼란은 당시 기록에 다수 남아 있다. 서울 수복 이후 열린 1950년 11월 9일 국회 본회의에선 “1950년 6월 27일 아침 방송이라든지, 정오 라디오 방송이라든지, 모든 백성이 갈 바를 몰라 3개월 동안 무서운 철의 장막 속에서 지낸 역사를 생각할 때에 누구 하나 정부를 원망하지 않을 사람이 없을 것”(태완선 무소속 의원)이란 성토가 나왔다. 이 전 대통령 최측근인 허정 외무장관은 1979년 회고록 ‘내일을 위한 증언’에서 “정부는 의정부를 탈환했느니, 해주를 점령했느니 하는 뉴스를 내보내면서 한마디 예고도 없이 서울을 버리고 떠났다. 국민의 불신도 무리는 아니었다”고 술회했다.
영화에는 “6·25전쟁 초기 ‘한강 인도교 폭파’에 민간인 희생자는 없었고, 경찰 77명만 희생됐다”는 주장도 나온다. 이 전 대통령이 남하한 다음 날인 1950년 6월 28일 새벽 2시30분 국군이 인도교를 폭파해 다리를 건너던 민간인 수백명이 희생됐다는 일각의 주장은 허구라는 것이다.
당시 민간인 사상 여부 및 규모는 사료마다 차이가 있다.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현 군사편찬연구소)가 1977년에 펴낸 ‘한국전쟁사 1권’에는 “경찰 병력을 트럭 8대에 분승해 한강 인도교를 건너려 했는데, 다섯 번째 차량부터 교량과 함께 폭파돼 경찰 77명이 순직했다”고 기재됐다. 미 군사고문단·종군기자 등 목격자 증언을 토대로 한 기록엔 “민간인 포함 사망자 수를 500~800명으로 추산한다”는 대목도 있다. 1950년 국회 본회의에는 서울시 사회국 제출 수치를 인용해 “한강교량 절단으로 추산된 (사상자) 수는 863명”(조광섭 의원)이라는 기록도 있다.
학계 연구에서도 민간인 희생자 규모에 대한 결론은 없다.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조사팀장을 지낸 신기철씨는 2014년 이전엔 민간인 사망자 수를 500~800명으로 추산했지만, 이후 정확한 집계가 불가능하다며 연구 결과를 바꿨다. 신씨는 “인도교 근처에 군과 경찰 가족 등이 있었을 수는 있지만, 민간인 희생자가 몇 명인지는 자료로 정확히 확인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영화는 4·19혁명 도화선이 된 1960년 3·15 부정선거의 주체는 이 전 대통령이 아니라 자유당이라고 주장한다. 선거 직전인 2월 15일 민주당 조병옥 후보의 급사로 이 전 대통령이 유일 후보가 되면서 부정선거를 벌일 이유가 사라졌다는 것이다. 실제 부정이 저질러진 것은 부통령 선거였지만 이 전 대통령이 모든 책임을 지고 하야했다는 주장도 했다.
결과적으로 조병옥 후보 급사 이후 단독 출마한 이 전 대통령의 4선이 확정된 상황은 맞는다. 그러나 급사 전 자유당 내 부정선거 논의에선 정·부통령 선거가 모두 조작 대상으로 거론됐다. 부정선거 혐의로 기소된 최인규 내무장관의 법원 판결에는 1959년 11월부터 그가 “기필코 자유당 후보가 당선되도록 해야 한다”며 전국 시·읍·면·동에 ‘공무원친목회’를 조직하고, “여하한 비합법적인 비상수단을 사용해서라도 이승만 박사와 이기붕 선생이 꼭 당선되도록 하라”고 언급한 내용 등이 담겼다.
영화는 또 이 전 대통령이 ‘인(人)의 장막’에 둘러싸여 3·15 부정선거를 알지 못했다는 주장도 한다. 1960년 당시 그는 85세 고령이었고, 실제 부정선거를 계획한 것은 자유당 강경파였다는 것이다. 이런 주장은 당시 이 전 대통령과 주변 인사들의 발언을 근거로 한 것으로 풀이된다. 이 전 대통령은 1960년 사임 담화에서 “3·15 선거에 많은 부정이 있었다 하니…”라고 했다. 허정 외무장관 역시 회고록에서 “국민과 격리시킨 일부 측근에 의해 그는 고립돼 있었다”고 했다.
그러나 이 전 대통령의 인지 여부와 부정선거 책임을 분리하긴 어렵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이 전 대통령은 선거 직전인 1960년 2월 담화에서 “1956년 선거처럼 대통령과 부통령 당선자가 서로 다른 당에서 나오면 대통령에 당선되더라도 응종치 않겠다”고 했다. 허 장관은 “이 대통령은 국민의 절대적 지지 위에서 자신이 민의를 대표하고 있다고 착각했다. 망상에서 깨어나자 자신이 독재자 위치에 놓여있음을 깨달았다”고 술회했다. 영화는 이승만정부의 발췌개헌·사사오입 개헌 등은 다루지 않았다.
영화는 1시간41분의 상영시간 이 전 대통령의 공적을 집중 조명한다. ‘농지개혁’과 ‘한미상호방위조약’과 함께 1954년 미국 방문에서 환대받는 모습이 담긴 영상 등도 공개했다.
‘여성 참정권 부여’와 ‘교육개혁’도 업적으로 제시했다. 여성 참정권은 1948년 5월 제헌국회 선거에서 도입됐다. 일본(1945년) 프랑스(1946년)와 비슷하고 스위스(1971년)보다 이른 시기다. 문맹률 역시 광복 직후 약 78%(12살 이상 인구 기준)에서 이승만정부가 출범한 1948년에 41.3%, 1958년엔 4.1%로 급감했다.
다만 이를 모두 이 전 대통령 공적으로 보는 것은 역사적 맥락을 배제한 해석이란 시각도 있다. 대한민국임시정부 임시헌장(1919년)과 건국강령(1941년)엔 이미 ‘남녀평등 원칙’과 ‘여성 참정권’이 명시됐다. 이승만정부가 이를 계승한 측면은 분명하지만 “여성 참정권을 이 전 대통령이 선물했다”는 영화의 해석은 다소 논리적 비약이 있다.
교육개혁 역시 이승만정부의 ‘문맹퇴치 5개년 계획’ ‘초등의무교육’ 등이 국민 계몽과 산업화 초석을 다졌다는 데는 학계 이견이 없다. 다만 “교육개혁으로 민주주의에 눈뜬 국민이 4·19혁명으로 이 대통령의 하야를 요구하기에 이르렀다”는 영화 속 주장엔 무리가 있다는 지적도 있다. 한 역사학과 교수는 “5·10 총선거 등 민주주의 선거에 대한 국민적 열망은 교육개혁 이전부터 있었다. 정치적 과오를 공적과 연결하려는 비논리적 해석”이라고 지적했다.
역사학계는 이 전 대통령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끝났다는 입장이다. 김성보 연세대 교수는 2008년 발표한 학술지에서 “이승만을 ‘건국의 아버지’로 보는 담론과 ‘분단 책임자’로 보는 담론에서 모두 벗어날 필요가 있다”고 진단했다. 강혜경 교수는 “영화 제목 중 ‘전쟁’은 역사가 아닌 정치적 전쟁”이라며 “진영 논리를 떠나 역사와 인물의 빛과 그림자를 두루 고려해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