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외칼럼

[해외칼럼] 민주주의의 붕괴

폴 크루그먼 뉴욕시립대 교수

공화당, 하향식 동일체 구조 지속

지도부 노선 맹목적 추종 무리 많고

출세지향주의자가 주류로 자리잡아

비겁함이 국민에 의한 정치 위협

폴 크루그먼폴 크루그먼




미국의 민주주의 실험은 조만간 끝날 것이다. 과장이 아니다. 정치판에 관심을 가진 사람이면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 공화당은 합법적으로 집권할 수 있다. 하지만 그들이 유권자를 압박해 선거에서 승리할 수도 있다. 공화당 의원들은 민주당 선거인단 인증을 거부하고 도널드 트럼프 혹은 그의 정치 후계자를 승자로 선언할 가능성도 있다. 이들은 집권하기 위해 가능한 모든 방법을 동원할 것이다.



어쩌다 이런 지경이 됐을까. 우리는 거의 매일 분노에 찬 공화당 지지자들과 의회 내부의 극단주의자들에 관한 기사를 접한다. 이들은 아무런 근거 없이 지난 2020년 선거를 도둑맞았다거나 마스크 착용을 요구하는 것은 홀로코스트(유대인 대학살)에 버금가는 만행이라고 주장한다.

미국 정치사에서 음모론은 결코 새로운 현상이 아니다. 리처드 호프스태터는 이미 1964년 저서 ‘미국 정치의 편집광적 스타일’에서 이를 언급한 바 있다. 백색 분노 역시 민권운동 이후 막강한 위세를 이어왔다.

요즘 들어 달라진 것은 이에 대한 공화당 엘리트들이다. 선거를 도둑맞았다는 완전한 거짓말(big lie)은 풀뿌리 사이에서 솟아난 게 아니라 위에서 조장한 것이다. 시초는 트럼프 자신이었지만 유력한 공화당 정치인들 중 그의 거짓말을 반박한 사람이 거의 없었다. 오히려 대다수가 앞다퉈 이를 지지했다.

근본적 문제는 미치광이들이 아니라 출세욕에 사로잡힌 보신주의자들에게 있다. 마저리 테일러 그린 하원의원의 광기가 아니라 케빈 매카시 하원 공화당 원내대표의 줏대 없는 태도가 문제라는 얘기다.

이는 공화당의 뿌리와 맞닿아 있다. 미국의 양대 정당은 대단히 다른 심층 구조를 갖고 있다. 민주당은 노동조합, 환경보호주의자와 성 소수자 옹호 세력 같은 이익집단들의 연합체다. 반면 공화당은 강한 응집력을 지닌 단일 이념의 추진체다. 하지만 최근 몇 년 사이에 갑작스레 보호주의를 수용하고 사회정의를 입에 올리는 기업들을 공격하는 등 보수주의 이념 운동보다는 강력한 권력 의지를 더욱 분명하게 보여줬다. 아주 오랫동안 보수의 응집력은 공화당 정치인들과 관리들에게 편안함을 안겨줬다.



민주당 정치인과 관료는 가끔 서로 충돌하는 다양한 이익집단의 요구를 놓고 어려운 협상을 벌여야 했다. 이와 달리 공화당 정치인과 관리들은 그저 당의 노선만 충실히 따라가면 그만이었다. 충성심은 안전한 자리로 보상받았고 설사 선거에서 패한다고 해도 당내 평판이 좋으면 억만장자 지지자들이 만든 이른바 ‘윙너트 웰페어’로 불리는 안전망에 의해 우익 싱크탱크 또는 폭스 뉴스로 자리를 옮겨 두둑한 연봉을 챙길 수 있다.

관련기사



물론 이런 생활이 모든 공화당 정치인들에게 매력적인 것은 아니다. 진정한 정책 전문가로 당 내부가 아닌 외부의 평가를 중요시하는 사람들에게 공화당은 이미 오래전부터 편안한 곳이 아니었다. 뻔히 거짓임을 아는 주장에 동조해야 하기 때문이다.

경제학 분야에서 탄탄한 학문적 평판을 가진 공화당원이 별로 없다. 오히려 이 분야는 민주당이 장악하고 있다. 사회과학이나 자연과학 분야의 경우 이런 쏠림 현상은 더욱 두드러진다. 그러나 공화당은 이들 분야에 관한 정책 조언을 정치색이 강한 전문가들에게 의존한다.

조 바이든 행정부와는 완전히 딴판이다. 현재 공화당 내에서 평판을 지니고 있고 행정부에서 일한 적이 없으며 정치색 없는 조세정책이나 노동시장 전문가는 찾아보기 힘들다.

정책 개발에 신경 쓰고 원칙을 지키며 당적 여부와 상관없이 선거구민을 챙기는 공화당 정치인은 더더욱 드물다. 게다가 비겁한 출세지향주의자들이 당의 주류로 자리를 잡은 탓에 독재자의 출현에 취약한 상태다.

공화당 의원들의 다수는 지난 대선을 도둑맞지 않았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고 있다. 의회에 난입한 폭도들이 트럼프 지지자로 위장한 반대파라거나 단순한 관광객들이었다는 억지 주장을 실제로 믿는 공화당 의원들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그러나 수십 년간 지속돼온 공화당의 하향식 동일체 구조로 인해 당은 지도부의 노선을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무리로 채워졌다.

우리가 항상 동아시아와 전쟁을 벌여왔다고 선언하면 트럼프 혹은 트럼프와 같은 부류의 인물은 앵무새처럼 같은 주장을 반복한다. 그가 선거에서 압승을 거뒀다고 말해도 의원들은 사실 여부에 상관없이 그의 말을 그대로 되풀이한다.

미국의 민주주의가 이렇듯 위태로운 지경에 처한 이유는 공화당의 정점에 위치한 과대망상증 환자나 밑바닥 지지 기반의 분노 때문이 아니다. 광기가 아닌 비겁이 국민에 의한 정치를 조만간 지구상에서 사라지게 만들 것이다.

/여론독자부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더보기
더보기





top버튼
팝업창 닫기
글자크기 설정
팝업창 닫기
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