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서 더 나아갈까 싶은데, 어김없이 해냈다. 본 적도 들은 적도 없는 캐릭터가 등장만으로도 간담을 서늘하게 만든다. 전사가 그려지지 않은 캐릭터를 위해 액션에서부터 말투, 의상, 타투까지 직접 상상해 만들었다.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는 또다시 이정재 하면 떠오를 인물 ‘레이’를 만들어냈다.
레이는 자신의 형제가 청부살인업자 인남(황정민)에게 암살당한 것을 알고 그를 향한 무자비한 복수를 계획한다. 한 번 정한 목표물은 놓치지 않는다. 인남(황정민)과 레이의 추격전이 주를 이룬 이 영화를 위해 이정재는 외면에서부터 내면까지 진짜 레이 그 자체가 됐다.
31일 오전 서울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만난 이정재는 “레이 캐릭터를 만들어내기 위해 내 상상력을 많이 투여했다”고 말했다. 인터뷰 내내 레이 캐릭터를 위한 고민의 흔적이 고스란히 묻어났다. 인남을 지구 끝까지 쫓아가는 악랄함의 끝을 보여주지만, 그는 “레이가 왜 악역이냐, 우리 형을 죽인 복수를 하는 건데”라고 반문하며 자신이 해석한 레이 캐릭터를 풀어놓기 시작했다.
“시나리오 상에서는 레이가 독특한 캐릭터라고는 안 느껴졌어요. 레이에 대한 부연 설명이 없다 보니까 내 상상력을 많이 투영했죠. 관객이 레이를 보면 ‘그래 저 인간은 저럴 것 같아’ 라는 생각이 들었으면 했거든요. 이런 작업을 해보는게 도전이라고 해야 할까요? 내가 맡은 캐릭터가 부연 설명이 없는 건 처음이에요. 왠지 이거 가능할 것 같은데, 이걸 잘 해낸다면 성과가 있지 않을까 생각하기도 했고. 관객이 각자 생각하는 레이의 이야기가 달랐으면 좋겠는데, 자신이 본 느낌이 가장 정확한 느낌이라 생각해주셨으면 합니다.”
‘신세계’ 이후 황정민과 두 번째 호흡을 맞추는 것 또한 관심을 모았다. 이정재는 “좋았다 이상의 표현이 있을까 싶다”며 흡족해했다. 또 영화의 비밀병기 유이 역을 맡은 박정민에 대해서는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신세계’와 이번 작품에서 다른 캐릭터를 연기하다 보니 내가 하는 연기와 표현방식이 다르잖아요, 자극이 되죠. 시나리오와는 또 다른 연기를 보여주니까요. 제일 궁금했던 역할은 유이(박정민)였어요. 상상 곱하기 열 배로 잘해서 정말 놀랐어요. 유이는 정말 잘해내기 힘든 역할이에요. 본인도 부담됐을 텐데, 작은 애드리브에서부터 시작해 행동이나 말투, 표현력 모든 것들이 놀라웠어요. 이번 영화의 가장 큰 공로자가 아닌가 싶어요. 황정민이나 나는 액션으로 도움받은 부분이 없지 않아 있는데, 유이를 맡은 박정민은 오로지 연기만으로 소화를 해냈잖아요. 극 중간에 재미적 요소를 톡톡히 해내서 우리 영화가 풍요로워지지 않았나 생각해요.”
주인공이지만 분량이나 대사가 크게 많지는 않다. 그러나 한 번씩 등장할 때마다 존재감은 강렬하다. 첫 등장신에서 형의 장례식장에 하얀 코트를 입고 등장한 그는 무심하게 형의 죽음을 확인하고는 이내 돌아선다. 목 전체를 뒤덮은 문신과 화려한 액세서리, 오색찬란한 의상은 레이 캐릭터에 대한 호기심을 자아낸다. 이정재는 “레이의 독특한 면이 돋보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해 거기에서부터 시작했다”고 설명했다.
“형에 대한 죽음이 레이에게 얼마나 영향력이 있을까 생각을 했는데, 그게 너무 커도 일차원적일 것 같았어요. 내가 해석한 레이 형의 죽음은 의미가 크지 않았어요. 그냥 내 주변을 건드렸으면 나를 건드린거나 마찬가지라는 생각을 했죠. 한마디로 나는 당장 누군가를 사냥하고 싶은 욕구가 있는데, 내 형을 죽인 누군가를 사냥하러 떠나야 한다는 핑계가 생긴 거예요. 장례식장에서 흰 코트를 입은 것도 형에 대한 정중한 마음의 표현이 아니거든. 어떤 비주얼로, 어떤 행동으로 사람을 대하고 제압을 할까를 상상하면서 하나씩 만들어나갔어요.”
그는 자신이 해석한 레이 캐릭터를 구현하기 위해 갖은 노력을 기울였다. 대본에 나와 있지 않은, 사소한 소품 하나까지 챙겨가며 디테일을 살렸다.
“현장에 가기 전부터 소품들을 준비해달라고 제작진에게 요청했어요. ‘아이스커피에, 빨대가 꼭 있어야 한다’ 이런 것들이요. 눈에 띄지도 않는 설정들을 계속 요구했어요. 돈을 전달할 때는 태국 시장에서 쓰는 비닐봉지를 구해달라고 했어요. 정말 무심하게 비닐봉지에 넣은 돈 다발을 던져주고 싶다는 생각이었죠. 피 묻은 얼굴을 얼음으로 닦아내는 장면이 있는데, 얼음도 어떤 형태의 얼음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해 제작진에게 제안했어요.”
영화에서 레이의 잔인함을 극단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은 일명 ‘셔터신’이다. 레이 혼자서 가게의 셔터를 열고 들어가 태국 마피아들과 싸우는 장면이다. 대본에 제시된 내용은 말 그대로 혼자 들어가서 싸우는 것 뿐이었다. 촬영을 2~3일 앞두고 셔터신을 준비해야 했던 이정재는 급하게 연습을 했고, 레이를 캐릭터를 보여줄 수 있는 포인트 몇 가지를 직접 뽑아냈다.
“태국에 도착해서 처음으로 촬영한 게 ‘셔터신’이에요. 무술감독이 보여준 영상을 보는데 그냥 막 난리가 났더라고요.(웃음) 급하게 오전부터 밤늦게까지 계속 연습을 했어요. 제가 만들어낸 포인트는 셔터 안으로 들어갈 때 더 여유롭게, 표범이 미끄러지듯이 들어가는 동작이라던가. 상대방이 긴 칼을 휘둘렀을 때 짧은 칼로 막아 쇠끼리 부딪혔을 때 불꽃이 얼굴 앞에서 튀었으면 좋겠다고 했죠. 마지막 액션이 끝난 다음에는 아이스박스에서 얼음을 꺼내서 피 묻은 얼굴을 닦고, 얼음을 씹어먹는 장면들이었어요.”
몸으로 부딪히는 액션신도 힘들지만, 액션 연기를 소화하기 위한 몸 관리가 먼저였다. 한 컷이지만 상반신을 노출하는 장면도 나와 그는 몸을 만들어야 했다. 하나부터 열까지 준비를 했지만 가장 힘든 건 다이어트였다.
“죽어라 몸 관리를 했어요. 다이어트는 기본이죠. 하루에 한 끼밖에 안 먹었어요. 다이어트를 계속 했기 때문에 레이의 눈빛이 살아난 것도 있어요. 연기자니까 무슨 노력이라도 해야되는 게 제가 해야 하는 일이잖아요. 다양한 준비를 했지만 제일 힘든 게 다이어트였어요. 스트레스 받거나, 촬영 끝나면 맥주도 한잔 하고 싶잖아요. 그런 걸 참아야 했죠. 원초적인 것을 참기가 제일 힘들었어요.”
‘암살’, ‘도둑들’, ‘관상’ 등 지금까지 수많은 악역을 해왔다. 이번 작품의 레이는 또 다른 결의 악인으로, 앞으로도 한국 영화에서 회자될 캐릭터로 보인다. “‘인생 캐릭터’를 경신할 수 있을까?”라는 물음에 그는 “그럴 수 있을까요?”라고 되물었다.
“관객분들이 잘 봐주셔야 하는데…. 어떻게 하는 것 마다 호평을 받을 수 있겠어요. 그래도 매번 보여드리는 캐릭터를 관객들이 좋아해주시고, 사랑해주셨으면 하는 마음이 있어요. 사실 그 마음 때문에 새로운 캐릭터를 만들어내려고 하고, 또 원동력이 되죠. 항상 새로운 이야기와 캐릭터를 갈망해요. 그래서 전 작품과는 다른 캐릭터를 찾는 게 습관이라고 해야 하나. 늘 맡은 캐릭터를 조금은 더 다르게 만들려고 하는 저만의 노력이 있죠. 그에 따른 재미도 생겨요. 관객들의 반응도 궁금하고, 배우가 노력해야 되는 여러 가지 것 중에 하나라고 생각해요.”
어느덧 데뷔 28년 차를 맞았다. 곧 30주년을 앞두고 있는 그에게 지금까지의 배우생활을 되돌아 봤을 때 드는 생각과, 이정재라는 배우가 앞으로 잊지 말아야 할 소신이나 지향점에 대해 물어봤다.
“앞으로만 나아가고 싶어요. 30년이라는 숫자가 나오니까 맥이 빠지네요. 제가 아역부터 한 거죠?(웃음) 연기를 오래 했고, 다양한 캐릭터를 많이 해봐서 연기는 하면 할수록 어려워요. 또 다른 아이디어를 끄집어내는 것도 쉽지 않고, 다른 모습을 보여줘도 편차가 크진 않은 것 같아요. 확 다르게 보여주고 싶은 욕심이 있지만 쉽지가 않아요. 항상 신선한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요. 오래 연기를 하다 보면 신선도는 숙성으로 가잖아요. 나는 아직도 좀 불안정하지만, 아직도 신선한 느낌이 유지됐으면 좋겠어요. 숙성 보다는 신선을 추구해요.(웃음). 이번 레이 캐릭터도 특별한 건 없고, ‘이정재가 또 잘했네’ 그 정도의 평가를 받았으면 좋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