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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휴정PD의 Cinessay 천번의 여름이 올 때까지 기다리겠다고 했지만…<셸부르의 우산>





예전 어른들이 “사랑이 밥 먹여주냐”고 타박을 할 때면 어쩌면 저렇게 세속적일까 싶었지만 이제는 알 것 같습니다. 그 말은 사랑을 폄하한 것이 아니라 ‘현실’이 얼마나 무섭고 위중한가를 강조했다는 것을요. 그리고 한 발 더 들어가보면 냉정한 현실 앞에서 인간의 마음이 얼마나 허약한지, 사랑이라고 부르기에는 2% 부족해 보이는 정(情)이나 의리도 충분히 가치 있는 사랑이라는 조언도 포함돼 있습니다. 아픈 이별 뒤에는 다시는 이런 사랑을 못할 것 같아도 또 다른 사랑이 나타나고 절대로 이해 못할 것 같던 이별의 이유도 세월이 지나면서 용서할 수 있게 됩니다. 그래서 ‘셸부르의 우산(1964년 작, 자크 데미 감독)’도 젊은 시절에 처음 봤을 때는 가슴 아픈 주인공들의 사랑만 눈에 띄더니 이제는 현실감 있는, 그러나 속 깊은 조연들의 사랑이 더 크게 보입니다.


프랑스의 작은 도시 셸부르에서 우산가게를 하는 에물리 부인의 외동딸 주느비에브(카트린 드뇌브 분)와 가난한 자동차 수리공 기(니노 카스텔누오보 분)는 열렬하게 사랑하는 사이입니다. 단 하루라도 떨어져 살 수 없을 것 같던 두 사람이었지만 기가 입대하면서 시련이 시작됩니다. 입대 전날, 두 사람은 함께 밤을 보내고 주느비에브는 영원히 기다리겠다는 약속을 합니다. 하지만 사랑하는 남자는 소식이 끊기고 배는 불러오고, 집안 형편 또한 점점 더 어려워지자 주느비에브는 흔들립니다. 주느비에브를 짝사랑하던 젊은 보석상 카잘은 그의 아이도 ‘우리 아이’라며 진실 되게 구애하고 에물리 부인도 딸에게 결혼을 권합니다. 너무 어린 나이에 닥친 사랑과 이별·임신·가난을 한꺼번에 감당하기 힘들었을 주느비에브는 카잘과 결혼하고 셸부르를 떠납니다. 전쟁에서 돌아온 기의 입장에서는 기가 막힐 노릇이지요. 기는 절망합니다. 그런데 착한 마들렌이 나타나 기를 다시 일으켜 세웁니다. 기는 마들렌과 결혼해 주유소를 차립니다. 그렇게 세월이 흐른 후 눈이 많이 내리던 어느 크리스마스 이브. 기의 주유소에 멋진 차가 도착합니다. 차에는 그토록 사랑했던 주느비에브와 귀여운 소녀가 타고 있습니다. 처음 보는 아이지만 낯설지 않습니다. 아이의 이름은 프랑수아즈. 기의 아들 이름도 프랑수아즈입니다. 두 사람이 아이를 낳으면 짓기로 했던 이름입니다. 기도 알고 있겠지요. 차에 탄 프랑수아즈도 자신의 아이임을. 주느비에브는 자신의 딸을 보겠느냐고 하지만 기는 거절합니다. 배신의 상처가 아물지 않아서일까요, 지금 봐야 무슨 소용이겠느냐는 마음이었을까요. 두 사람은 지난 일에 대한 원망도 설명도 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짧은 재회가 끝나고 주느비에브 모녀는 주유소를 빠져나갑니다. 이어 주유소로 돌아온 아내와 반갑게 포옹하는 기. 서로가 없으면 하루도 버틸 수 없다던 두 사람이었지만 이렇게 지금은 다른 사람과 행복할 수 있는 것이 사랑의 잔인함, 현실, 쓸쓸함, 그리고 위대함일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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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 번의 여름이 올 때까지 기다리겠다던 주느비에브는 1년도 기다리지 못하고 다른 남자와 결혼합니다. 전쟁이라는 특수성을 감안해도 무척 빠른 결단이지요. 너무 전속력으로 기를 사랑해서 그만큼 빨리 지쳤던 것 같습니다. 그런 면에서 미혼모가 될 뻔한 주느비에브를 조건 없이 사랑해준 카잘이나 몸도 다치고 가진 것도 없는 기를 행복한 가장이 되게 해준 마들렌이 현실에 뿌리를 내리고 건강하게 사랑을 키워간 좋은 사람들입니다. 두 커플 모두 해피엔딩이어서 다행인데도 마음이 싸하게 아픈 것은 왜일까요.

KBS1라디오 <함께하는 저녁길 정은아입니다> 연출

고광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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