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 · 금융 경제·금융일반

내 인생 최고의 조언

다양한 분야(금융·법·기술·군사 기타 등등)의 권위자 21명에게 오늘날 그들을 있게 해준 조언이 무엇이었는지 물었다.

Photograph by HUGH KRETSCHMER


민디 그로스먼

HSN CEO

나이키에서 일할 당시, 팀원 중 누군가가 업무를 능숙하게 해내지 못하면 무척 안타까워했다. 그래서 그가 더욱 잘할 수 있게 도우려 했다. 이를 본 필 나이트 Phil Knight(나이키의 공동 창업주 겸 회장)는 내게 "민디, 자네가 초점을 맞춰야 할 일은 평범한 직원들을 뛰어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뛰어난 인재들을 고용하는 것이라네"라고 충고했다.

오늘날 인재 활용(그들을 기업 문화에 적응 시키고 핵심 역량을 발휘하게 하는 것)은 사업 성공을 위한 중요한 열쇠다. 하지만 이는 오직 적합한 인재를 채용했을 때만 가능한 일이다.


잭 보글
뱅가드 그룹 창업주 겸 은퇴한 CEO

나는 필라델피아에 있는 작은 증권회사에서 잔심부름을 하는 사람이었다. 작은 증권사들에 주식증서를 배달하는 일이었다. 당시 다른 회사의 한 심부름 담당직원이 내게 "보글, 투자 사업에 대해 알아야 할 모든 걸 말해줄게"라고 이야기 한 적이 있었다. 나는 "그게 뭐야, 레이?"라 반문했다. 그러자 그는 "그건 아무도 모른다는 거야"라고 대답했다. 레이는 옳았다. 사람들은 대단한 투자가들이 있다고 말하지만, 그들은 운이 좋은 것일 뿐이다. 누구도 시장보다 영리하지는 못하다.


더그 파커
유에스 에어웨이스

나는 말이 아닌 선례를 통해 조언을 얻었다. 내가 10년간 알고 지낸 허브 켈러허Herb Kelleher가 그 주인공이다. 나는 켈러허의 뛰어난 능력에 반해 그와 어울리며 장점을 흡수하려 했다. 허브는 경청을 잘했다. 그는 내게 직원들의 말을 경청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가르쳐주었다. 그가 일하는 모습을 보면 놀랍기 그지없다.

그는 일에 몰입해 누가 사무실에 남아 있는지 어깨 너머로 확인하는 법이 없다. 원칙에 따른 행동이 아니라 타고난 성격이다. 나는 1,000명의 직원 앞에 서는 것 보다는 포럼을 열어 직원들이 내게 말할 수 있는 기회를 주려고 노력하고 있다. 한 달에 4번, 30~40명의 조종사와 승무원들과 미팅을 갖는다. 내가 10분 정도를 말하면, 그들은 50분을 얘기한다. 직원들의 목소리를 듣는 건 단순한 존중의 표시가 아니다. 이러한 방식이 비즈니스 운영방식을 얼마나 개선할 수 있는지 잘 모를 것이다.

항공사같은 큰 사업을 운영할 때는 놓치기 쉬운 부분이 많다. 때문에 우선 직원들의 말을 듣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그 이후에 무엇이 옳은 판단인지 결정할 수 있다. 나는 경청에 관해선 허브를 따라가려면 멀었다. 하지만 어제 스태프 미팅에서 한 직원의 이야기를 귀담아 들었다. 여성 고객이 체크인을 하려고 했는데, 남은 좌석은 1등석뿐이었다. 그 고객은 열 살짜리 아들을 데리고 있었다. 하지만 규정상 아이는 1등석에 앉을 수 없었기 때문에 그 모자는 비행기를 타지 못했다. 이는 잘못된 일이었다. 심지어 나는 그런 규정이 있는지도 몰랐다. 하지만 이제 곧 시정될 것이다.


론 존슨
J.C.페니 CEO

나는 1984년 하버드 경영 대학원을 졸업했다. 당시엔 일자리가 많았고 선택의 폭도 넓었다. 나는 골드만삭스 Goldman Sachs와 임금이 골드만 삭스의 3분의 1 수준인 머빈스 Mervyn's를 두고 고민 중이었다. 그래서 아버지와 상의를 했다. 아버지는 당시 제너럴 밀스 General Mills에서 일하고 계셨다. 아버지는 "내가 만나 본 최고의 리더들은 대부분은 젊었을 때 자신의 분야에서 일을 시작했고, 그 분야 비즈니스의 모든 면을 섭렵하고 있었다. 대부분은 바닥에서부터 시작했다"고 내게 조언해 주셨다.

쉬운 길은 투자은행에 취업하는 것이었다. 그러면 지위와 연봉뿐만 아니라 즉각적인 만족감도 얻을 수 있었다. 아버지는 "그래도 되겠지만 머지 않아 다른 일을 하고 싶어질 게다. 어떤 분야에서 뛰어나고 싶다면 바닥부터 배워가야 한다. 성공에는 지름길이 없다"고 말씀해 주셨다. 스포츠 경기를 할 때만큼이나 유통업은 빠른 움직임을 필요로 한다. 나는 데이튼 허드슨 Dayton Hudsom(당시 머빈스의 모기업)에서 전략기획 관련 일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아닙니다. 저는 비즈니스를 배우고 싶습니다"라며 제안을 거절했다. 결국 나는 글렌데일 Glendale *역주: 로스앤젤레스 북쪽에 위치한 도시 지점에서 매장관리 수습사원으로 첫 커리어를 시작했다.

이 교훈은 지금도 내가 하는 모든 일에 적용된다. 타깃 Target *역주: 미국의 대형 할인매장에서 근사한 디자인을 할 때나 애플 스토어를 열 때나 모두 마찬가지였다. 성공에 지름길이란 없다. 애플이 힘든 시기를 겪고 있을 때를 기억한다. 하지만 나는 스티브 잡스만큼 고통스럽지는 않았다. 리더의 자리에 있을 때 힘든 시기는 훨씬 더 가혹하게 다가온다. 리더의 역할은 위기 때 자신의 팀을 지켜내고, 지름길을 택하는 유혹을 이겨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나와 동료들은 한 분기가 아닌 향후 100년을 바라보며 J.C.페니를 운영하고 있다.


스콧 그리피스
집카 회장 겸 CEO

나는 암을 이겨낸 사람이다. 15년 전, 생체 조직검사 후 의사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그는 호지킨 림프종 Hodgkin's lymphoma 2기라고 진단했다. 나는 형에게 전화를 걸어 검사결과가 나빠 아홉 달 동안 항암치료와 방사선 치료를 받아야 한다고 말했다. 형은 "넌 잘 이겨낼 거야. 그리고 이 모든 치료가 끝났을 때 어떤 사람이 돼 있고 싶은지 생각해 봐야 한다.

치료 후에 치료 전과 달라져 있는 모습을 생각해 봐"라고 조언했다. 가족이 이런 말을 했을 때, 적어도 나의 경우는 아주 심각하게 받아 들인다. 누구보다 나를 잘 아는 사람이 가족이다. 상처를 잘 받는 성격이라면 '지금 내가 뭐 어때서? 치료 후에 내가 왜 다른 사람이 되야 하지?'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이 일이 인생을 바꿔 놓을 수 있는 중대한 사건이라고 생각했다. 아주 젊은 나이에 죽음의 문턱까지 가봤다면, 그 이후에는 어떤 삶을 살고 싶겠는가? 당시 나는 보스턴에 살고 있었다. 30대 중반의 미혼남으로, 베인Bain에서 분사한 파르테논 그룹Pathenon Group이라는 회사에서 컨설팅 업무를 하고 있었다.

커리어에 욕심이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처럼 경영대학원을 졸업했고, 누가 봐도 괜찮은 경력을 쌓고 있었다. 고향으로 가는 대신 아스펜 Aspen *역주: 콜로라도 주에 위치한 스키 휴양지에서 스키를 즐겼고, 내 인생에 어떠한 소명의식도 없다고 생각했다. 형이 해준 말을 들었을 때 나는 큰 충격에 휩싸였다. 형의 말을 받아 적었던 것이 기억난다. 그러고 나서 '치료 후에는 내 삶이 달라져야한다'는 말의 의미가 조금씩 더 분명해지기 시작했다. 형의 말 덕분에 반드시 나만의 가치관을 확립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주위를 둘러보기 시작했다. 나 자신에게도 물었다. 주변에 나와 열정을 공유할 만한 사람은 있는지, 나의 가치관은 무엇이지, 왜 동호회에 가입했는지, 어떤 기사를 먼저 읽고 있으며 그 이유는 무엇인지에 대해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졌다. 나를 돌아보는 시간을 가진 후에 컨설팅 분야를 떠나기로 결정했다. 나는 '진짜 일'로 돌아가고 싶었다. 나는 항상 교통과 기술, 도시에 대한 흥미와 열정을 갖고 있었다. 나는 피츠버그에서 태어났다. 내가 고등학교를 다닐 무렵 피츠버그는 혼란 그 자체였다.

나는 어떻게 도시들이 그렇게 변하게 되는지에 대해 강한 호기심을 느꼈다. 그리고 기술과 획기적인 비즈니스 모델, 도시에 대한 나의 열정을 잘 조화시키면 어떤 결과가 나올지 궁금해졌다. 우연히 집카에 관해 알게 되었을 때 바로 이 것이 내가 찾던 일이라고 생각했다. 형이 내게 했던 조언을 실행하는 일이었다. 암 투병생활을 끝낸 후에는 일적인 부분 외에도 많은 것들이 변해 있었다. 무엇보다 열정과 일을 결합시켜야 한다는 신념을 갖게 되었다. 이를 실현했을 때 진정한 인생을 살 수 있다. 이것이 바로 내가 지금도 아침 일찍 침대를 박차고 일어날 수 있는 이유다.


트레이시 리스
패션 디자이너

우리는 낭비가 심한 사회에 살고 있다. 영구적인 제품은 거의 없다. 품질이 뛰어난 제품이 드물기 때문에 품질이 어느 때보다 더 중요해졌다. 우리 회사 본사에는 몇 년 전 고장 난 세탁기가 한 대 있다. 내부 기어가 녹아 본연의 기능을 할 수 없게 된 세탁기다. 24세 무렵 의류회사를 막 창업했을 때 아버지는 내게 "최고 품질을 갖추지 못한다면 사업은 결코 성공할 수 없다"고 조언해 주셨다.


레이 커즈와일

미래학자, 투자가, 저술가

1978년의 일이었다. 제록스가 내 회사 커즈와일 컴퓨터 프로덕츠 Kurzweil Computer Products에 관심을 갖고 투자했다. 1979년에는 아예 회사 인수를 제안했다. 제록스는 스캐닝과 문자인식 기술에 관심을 갖고 있었다. 프린트 사업을 하고 있던 제록스는 다양한 제품라인을 확보하고 있었다. 하지만 우리 회사 기술은 그 분야와 다른 방향으로 가고 있었다.

게다가 당시에는 기술을 개발하고, 회사를 설립한 뒤, 그 기술과 회사를 판매한다는 철학이 내 비즈니스에는 없었다. 나는 '이건 내 회사다. 내 역할은 회사를 세워 성장시키는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제록스에 제품을 공급하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다. 하지만 우리 회사 최고재무책임자(CFO) 해리 조지 Harry George는 "당신의 강점은 신기술을 만들어 세상에 내놓는 것이다. 하지만 신기술을 세계 시장에 공급하는 일을 더 잘할 수 있는 사람들은 따로 있다. 회사를 제록스에 팔아야 한다"고 조언했다.

나는 그의 조언을 받아 들였다. 제록스는 세계적인 기업으로 거듭났다. 덕분에 나는 사고의 전환을 경험하고, 비즈니스에 대해 새롭게 정의할 수 있었다. 내 비즈니스는 발명가로서 혁신 기술을 개발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기술들이 발전할 수 있게 적합한 회사에 파는 것이다. 나는 다섯 개의 회사를 매각했는데, 어느 하나 의미 없이 사라지지 않았다. 예컨대, 커즈와일 뮤직 Kurzwil Music은 지금 현대 Hyundai가 소유하고 있다. 관련 기술을 세계 시장에 공급하는 일은 작은 신시사이저 synthesizer제조업체보다 현대가 더 잘할 것이다.


유진 파마
이코노미스트, 저술가

1960년 시카고 대학에 진학했을 당시 많은 교수들은 아직 정식 학과로 정해지지도 않은 금융부문에 깊이 몰두해 있었다. 금융이란 학문이 이제 막 태동하고 있을 때 우연히 금융의 탄생지로 오게 된 것이다. 모두가 금융에 흥미를 갖고 있었기 때문에 나 또한 이 분야에 빠져들게 되었다.

스물한 살이었던 대학교 1학년 시절 해리 로버츠 Harry Roberts 교수의 중급 통계학 수업을 들었다. 교수님은 나와 비슷한 점이 많았다. 모든 스포츠를 좋아했는데 특히 달리기를 좋아했다. 나는 학부생 치곤 통계 공부를 많이 한 상태였다. 이미 데이터를 이용한 작업도 많이 해본 터였다. 덕분에 수업 초기부터 상당히 앞서 있었다. 하지만 내가 교수님으로부터 배운 건 철학이었다. 교수님은 통계를 대하는 태도를 가르쳐 주셨고, 나는 아직도 그 가르침을 마음에 새기고 있다. 공식 통계에선 우선 가설을 설정한 뒤 이를 실험한다. 교수님은 개인적인 판단 기준에 따라 가설의 거부나 수용 여부를 결정해서는 안 되며, 데이터를 통해 배우는 것을 그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고 항상 말씀하셨다.

최선은 데이터를 통해 세상을 보는 눈을 키우는 것이다. 나는 이 말을 연구의 지향점으로 삼아왔다. 단순히 가설이 참인지 거짓인지를 확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시장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해 시장 자료를 활용해야 한다. 이야말로 가장 사실적인 모델이다. 진정한 판단기준은 '통계 분석 전후를 비교했을 때 분석 후에 시장을 더 잘 이해하게 됐나?'가 돼야 한다. 교수로 재직한 49년 동안 내 학생들에게도 줄곧 해리 교수님의 가르침을 전하고 있다.


론 콘웨이
슈퍼 엔젤 투자가

알토스 컴퓨터 Altos Computer의 주식을 상장했을 때, 공동 설립자 데이비드 잭슨 David Jackson과 나는 당시 미국에서 가장 빠르게 성장하던 이 회사를 어떻게 운영해 왔는지 돌아봤다. 우리는 고객들과 인간적인 관계를 형성했기 때문에 성공할 수 있었다. 잭슨은 처음부터 "무엇을 아는지가 아니라, 누구를 아는지가 중요하다"는 말을 활용해 사업을 시작했다. 이후 나는 비즈니스란 결국 인간관계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결코 이를 간과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고객을 잘 알아야 했고, 심지어 그들의 가족도 파악해야 했다. 우리 회사의 최대 계약은 컨트롤 데이터 사 Control Data Corp.와의 딜이었다. 그 회사의 CEO와 함께 야구를 보러 가면서 진짜 친구가 되었다. 이렇게 만난 사람들과 지금도 친구로 지내고 있다. 나는 여전히 데이비드의 조언을 활용하고 있다. 내 투자는 실리콘밸리의 가장 큰 네트워크를 기반으로 한다. 내가 투자한 회사의 위기를 해결해 줄 때 마다 나는 그 회사의 CEO에게 이렇게 말한다.

"무엇을 아는지가 아니라, 누구를 아는지가 중요하다."


베스 컴스톡
제너럴 일렉트릭 수석 부사장(SVP) 겸 최고마케팅책임자(CMO)

직장생활 초기에 까다로운 상사를 만났다. 나는 그 여자 상사에게 잘 보여야 했다. 하지만 그녀는 아주 비판적인 사람이었다. 하루는 그녀가 나를 한쪽으로 불러 "가끔 일을 매듭짓지 못한다는 느낌을 받는다. 시작은 좋지만 마무리가 좋지 못하다"라고 말했다. 나는 그녀가 내게 그런 첫인상을 가졌다는 것이 정말 싫었다. 일을 잘 마무리한다고 여기고 있던 나는 그녀가 틀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몸에 좋은 약은 때론 입에 쓰기 마련이다. 그리고 쓴 조언을 해주는 사람의 말은 믿어야 한다. 비판을 받으면 먼저 자문해봐야 한다. 내가 상처받았던 이유는 상사의 말이 맞았기 때문이다. 대화가 끝난 후, 내 부족한 능력을 보완하기 위해 특강 몇 개를 들었다. 덕분에 나는 일을 마무리 짓지 못하는 변명거리를 찾지 않게 되었다. 지금의 나는 마음속으로 항상 이렇게 자문한다. "일을 완벽하게 매듭 지었나?"


사라 블레이클리
스팽스 창업주

어렸을 적 아버지는 나를 식탁에 앉혀놓고 한 주 동안 어떤 일에 실패했는지 묻곤 하셨다. 내가 학교에서 하는 연극에 지원했다가 떨어졌다고 말하면 하이파이브를 해주셨다. 이처럼 언제나 내가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도록 독려해 주셨다. 아버지의 조언이 미래와 내가 정의하는 실패의 개념에 어떤 영향을 끼칠지 몰랐다.

기업가로 활동하면서 많은 사람들이 막연한 두려움 때문에 그들의 꿈을 좇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아버지는 '실패를 통해 더 좋은 길을 찾을 수 있다'는 교훈을 일러 주셨다. 이러한 양육 방식은 상당히 독특했다. 실패해보지 않았다면 지금의 나는 없었을 것이다. 나는 변호사가 되기 위해 로스쿨 시험에 응시했다가 두 번이나 낙방했다. 그것은 내가 새로운 길을 찾을 수 있게 해준 수많은 실패 중 하나에 불과했다.


데이비드 보이스
보이스 실러 앤드 플렉스너 설립자 겸 변호사

아버지는 내가 열세 살 때 "말하기 전에 먼저 듣거라. 너의 대화 상대 모두는 경청할 만한 가치를 가지고 있다"고 말해주셨다. 하지만 한동안은 이 말의 뜻을 이해하기 어려웠다. 내가 배우고 싶어 하는 것에 대해 선생님이나 박식한 사람들의 말을 경청하는 것은 이해가 됐다. 하지만 보통 대화 상대보다는 내가 더 많이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누구든지 내가 갖추지 못한 지식이나 통찰력 혹은 경험을 갖고 있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그들은 비록 틀렸더라도 나의 사고를 전환시켜 줄 무언가를 말해줄 수 있다). 특정한 사람을 향한 내 유일한 관심사가 그를 가르치고, 설득하고, 유혹하는 것이라 할지라도 경청은 여전히 중요하다. 누군가의 말을 경청한다면 그도 내 말을 잘 들어줄 것이다.


존 히켄루퍼
콜로라도 주지사

어머니는 두 번이나 남편을 잃었고 네 아이를 홀로 키우셨다. 어머니는 항상 절약했고 모든 일을 스스로 하셨다. 고장 난 냉장고를 고치기 위해 은박지와 랩을 씻어 냉장고문에 붙이기도 하셨다. 경쟁심이 강한 어머니는 우리들에게 자주 "게임을 하거나 인생을 살다 보면 어쩔 수 없는 일이 많이 생긴다. 하지만 그런 일에 어떻게 반응하느냐는 오롯이 너희들 몫이다. 절대 포기해선 안 된다"고 말씀하셨다.

지질학자로 일하던 1986년, 나는 당시 닥친 엄청난 경제 침체로 일자리를 잃게 되었다. 그 이후 거의 30개월 동안 직장을 찾지 못했다. 하지만 어머니로부터 배운 끈기와 절약정신 덕분에 내 자신을 추스를 수 있었고, 브루 펍 brewpub *역주: 맥주를 파는 선술집을 열기 위한 작업에도 착수할 수 있었다. 충분한 자금이 없어 중단 위기를 맞았던 적도 몇 번이나 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어머니는 내 사업에 투자하지 않았다. 어머니는 "누가 펍에서 저녁 식사를 하겠느냐"는 반응을 보이셨다. 나 또한 투자할만한 사람은 모두 만나본 것 같았다. 이미 32개 은행에서 대출 거절을 당한 상태였다.

하지만 어머니의 조언에 따라 33번째 은행을 찾아갔고, 잠재적 투자자인 '내 친구의 친구'를 만날 수 있었다. 1987년 마침내 임대 계약을 체결해 부지를 확보했다. 당시 임대료는 1 제곱피트당 1달러였다. 나는 배관과 전기작업을 제외한 모든 작업을 스스로 해결했고, 1988년 말 드디어 레스토랑 문을 열었다. 모든 레스토랑 장비와 가구를 중고로 구입해 비용을 아꼈다. 덕분에 우리 가게만의 특별한 분위기를 조성할 수 있었다. 사업은 계속 번창했고, 이후 전국 주요 도시에 지점 15개를 열었다. 이 '작은 제국'을 건설하는데에는 끈기와 절약정신이 큰 밑거름이 됐다.


로리 골러
페이스북 인사 총괄 부사장

내게 최고의 조언을 해 준 사람은 바로 셰릴 샌드버그 Sheryl Sandberg였다. 페이스북 입사를 고려하고 있을 때 셰릴에게 전화를 걸어 페이스북의 가장 큰 어려움이 무엇인지 물었다. 그녀는 인재채용이라 답했다. 내가 리쿠르팅 회사에서 일한 경력이 많지 않다고 말하자, 그녀는 남자들 대부분은 그런 걱정 때문에 새로운 기회를 놓치진 않는다고 대답했다. 실제 연구 결과에 따르면, 여성들은 새 일에 뛰어 들기 전에 모든 요구조건을 다 갖춰야 하거나 최소한 근접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남성들은 그렇지 않다. 나는 셰릴의 조언을 받아들여 페이스북에서 새로운 직책을 맡았다. 그녀가 내게 격려했던 것처럼, 다른 여성들이 새 일에 과감하게 뛰어들기를 적극 권장한다.


마그누스 칼센
세계 1위 체스 플레이어

내 코치였던 시멘 아제슈타인 Simen Agdestein은 노르웨이 최고의 체스 기사였다. 내가 열살 때 그는 단순하지만 유익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항상 새로운 장벽을 무너뜨려야 한다는 것이었다. 내 체스 실력은 괜찮은 편이었지만 매번 비슷한 오프닝*역주: 체스의 초반 포석법을 사용했다. 코치는 내가 더 멀리 보도록 이끌어 주셨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다른 오프닝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시합에 나가 크게 패했고, 그 다음 날 나는 프렌치 디펜스 French Defense라는 완전히 새로운 오프닝을 사용하기로 결심했고, 오랜만에 승리를 만끽할 수 있었다. 다양한 전략을 사용하도록 도와준 코치의 조언 덕분에 나는 한 가지 방식만을 고수하지 않는 체스 플레이어가 되었다.


필리프 브루귀뇽
익스클루시브 리조트

1970년대 중반 나는 아코르 호텔 Accor Hotel에서 일했다. 당시 그 호텔의 규모는 작은 편이었다. 젊은 패기가 있었던 나는 대형 미국 호텔들과 맞붙고 싶었다. 그래서 몇 달간 열심히 일했다. 하지만 내가 야심 차게 시작했던 모든 일들이 실패로 끝나가고 있었다. 눈앞에서 내가 한 모든 일이 무너져 가고 있을 때, CEO 제라르 펠리송 Gerard Pelisson 이 나를 집무실로 호출했다. 일을 잘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엄청나게 초조했다.

그는 내게 앉으라고 한 뒤, 해고 통지를 하거나 무능력을 지적하는 대신 이렇게 말했다. "오래 살기 위해선 우선 젊게 살아야 한다. 조금 아프더라도 살아있다는 것은 건강하게 죽은 것보다 훨씬 낫다." 그 이후로 그의 조언은 언제나 내 마음속에 자리잡고 있다. 비난과 질책 대신, 장기적 비전을 갖되 단기적인 일들도 간과해선 안 된다는 교훈을 가르쳐 준 것이다. 매주 일요일 나는 자리에 앉아 내일 할일뿐만 아니라 장기적인 목표가 무엇인지 생각한다. 그날 그가 가르쳐 준 것은 100%를 추구하다가 늦는 것보다 시간에 맞춘 98%가 훨씬 낫다는 사실이다.


빅토리아 랜섬
와일드파이어

공동 설립자이자 내 약혼자인 알랭 Alain'어쩔 수 없는 일은 걱정하지 말고 대처할 수 있는 일만 걱정하라'고 조언한다. 우리 회사는 여러 플랫폼을 기반으로 운영된다. 플랫폼이 변하면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우리 회사에 엄청난 영향을 미친다. 이러한 환경은 엄청난 스트레스다. 게다가 한창 우리 회사가 성장할 당시 경제상황은 더 큰 스트레스였다. 알랭은 내게 우리가 해결할 수 있는 문제라면, 두 팔을 걷어붙이고 해결하면 된다고 말해주곤 했다. 그의 조언이 없었더라면 걱정을 하는 데 소중한 시간을 낭비하고 있었을 것이다.


대니얼 리버스킨트
세계 무역센터 재건축 마스터 플래너

뉴욕 쿠퍼 유니온 미술학교 Cooper Union에서 보낸 첫 해는 인생의 기초를 닦은 시기였다. 그 이후 나는 예술가도 건축가도 될 수 있었다. 브롱크스 Bronx에 있던 집에서 어머니와 함께 나눴던 얘기가 생각난다. 나는 "건축가 대신 예술가가 될 겁니다. 왜냐하면 예술이 더 재미있으니까요"라고 말했다. 당시 어머니는 근로환경이 열악한 공장에서 일하고 계셨다. 어머니는 내 말에 "예술가가 되면 가난해진다. 대신 건축가가 되거라. 건축을 하는 과정에서 언제나 예술가가 될 수 있다. 하지만 예술을 하면서 건축가가 될 수는 없단다"라고 조언해 주셨다.


조지 로고테티스
리브라 그룹 회장 겸 CEO

나는 열아홉 살 때 가족이 운영하던 선박사업을 물려받았다. 두 대에 불과했던 선박 수는 70대까지 늘어났다. 이후 배들을 팔고 회사에 있던 유능한 인재들을 뽑아 세계 각지로 보내 사업을 시작했다. 그 결과 한 선장은 2억 달러 규모의 부동산 회사, 한 과일 판매업자는 라트비아에서 6개의 바이오 가스 공장을 운영하게 되었다. 적합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제대로 된 일을 해달라고 부탁한 것과 마찬가지였다. 이런 방식은 할아버지로부터 배운 것이다. 할아버지는 "불가능이란 없다. 기적이란 시간이 오래 걸리는 일일 뿐이다"라고 말씀하시곤 했다.


안소니 부르댕
요리사, 저술가, 선동가, 여행 채널 '노 레저베이션 앤드 더 레이오버(No Reservation and the Layover)' 진행자

1980년대 말이었다. 엉망이 된 내 삶을 바로잡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우선 약물 중독 치료를 받았다. 하지만 내 커리어 전반기는 난장판이 된 상태였다. 전문 요리사로서의 명성도 사라졌다. 다행히 내가 처음으로 일했던 곳의 사장님이 점심 요리사로 나를 다시 한번 고용해주었다. 내 책에선 그를 빅풋 Bigfoot 이라고 불렀다. 그가 내게 해준 조언은 명령이었다. 그는 "우리 가게에서 일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시간 엄수다. 교대 시간 15분 전에는 도착해야 한다. 14분 전에 도착하면 월급 한 푼 못 받고 집으로 가야 할 것이다"라고 강조했다. 그 이후 지금까지 어떤 경우에도 지각을 한 적이 없다. 최소한 시간을 잘 지켜 동료와 고용주에 대한 존중을 보여야 한다는 이 요구사항은 내 인생에 커다란 변화를 가져왔다.

열심히 노력해 다시 주방장이 되고, 고용주가 되었을 때, 직원들에게 가장 강조했던 것이 바로 시간 엄수다. 업무 기술처럼 어려운게 아니기 때문이다. 8시에 모여 하노이 시장 촬영을 하기로 했다면, 쇼의 모든 스태프는 내가 5분 전에 도착해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솔선수범은 나의 신념이다. 나 같은 직업(요리와 술을 맛보는 일)을 생업으로 삼는 운 좋은 사람들이 시간을 지키지 않는다는 건 생각할 수 없는 일이다. 일찌감치 도착하면 현장 분위기를 잡을 수 있다. 나 스스로 매일 시간을 엄수하면, 다른 사람들도 같은 행동을 취하게 마련이다.


배리 블랙
미국 최초의 흑인 상원 원목

나는 27년간 미 해군에서 복무했다. 해군 교육 사령부의 군종병으로 있을 땐 키휴네 Kihune 중장이 나의 지휘관이었다. 하루는 그에게 리더십 철학에 대해 물었다. 그는 "나는 기본 원칙을 실천한다"고 말했다. 그 원칙이란 내가 대접받고 싶은 것처럼 다른 이들을 대하는 것이다. 이후 나는 진급을 거듭해 준장이 됐다.

한 번은 공군성 장관(the Secretary of the Air Force), 다른 3, 4성급 장군들과 함께 회의를 한 적이 있었다. 훈련소를 마친 신병들에게 올바른 정신을 갖도록 할 방법을 논의하는 자리였다. 논의의 초점은 악영향을 미치는 주범들을 색출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내가 만약 신병이었다면 정신교육에 그런 징벌적인 방법을 원치 않았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나라면 켄 블랜차드 Ken Blanchard *역주: '칭찬은 고래를 춤추게 한다'의 저자의 1분 관리 모델 방식(옳은 일을 한 사람에게 긍정적인 보상을 해주는 것)을 선호할 것이다.

그래서 나는 "신병의 입장에서 옆 사람이 벌을 받아 쫓겨나는 것을 보면 어떤 기분이 들겠습니까?"라고 말하며 그들의 전제를 반박했다. 나는 의원들과 의회에서 논의되는 문제들을 이야기 할 때도 정기적으로 이 방식을 사용한다. 의원들은 당적과 관계없이 대부분 애국심 강한 미국인들이다. 다만 국익을 위한 최선이 무엇인지에 대해 다른 철학을 갖고 있을 뿐이다. 내가 어떤 대접을 받고 싶은지 생각해 봄으로써 결과를 예측하고 행동 지침을 얻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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