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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7월23일. 서울시 서초구 서래마을에 거주 중이던 프랑스인 장 루이 쿠르조는 택배로 받은 간고등어를 냉장고에 보관하기 위해 냉동실 서랍을 뒤지던 중 수건과 비닐봉지에 싸인 영아 사체 2구를 발견했다. 갑자기 발견된 영아 사체에 그는 곧바로 경찰서에 신고했다.
해당 사건은 처음부터 여러 의혹이 나와 수사에 난항을 겪었다. 쿠르조의 집에서 일하던 필리핀인 가정부가 조사받았고 여중생 백인 소녀가 그 집을 들어갔다 나오는 모습을 봤다는 의혹이 제기돼 언론에서도 해당 사건은 큰 이슈를 일으켰다.
확실치 않은 여러 의혹 속에 사건은 미궁 속으로 빠질 뻔했으나 담당 형사의 부인이 제기한 가설로 수사는 다시 활력을 찾았고 범인 색출에 점차 다가갔다. 의혹은 많았지만 범인은 명확하지 않았던 서래마을 영아 살해 사건 속 용의자는 누구였을까.
사건 담당 형사 아내의 가설이 해결 실마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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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사건을 신고한 쿠르조의 아내인 베로니크는 서래마을 영아 살해 사건 조사 시작 단계에서 용의선상에 올랐다. 그러나 베로니크는 사건 발생 3년 전 자궁적출 수술을 받았기 때문에 용의선상에서 제외됐다.
경찰은 사건 조사에서 쿠르조 집에서 근무한 필리핀인 가정부와 백인 소녀 목격담을 조사했지만 아무런 소득이 없었다. 그때 간호장교 출신인 사건 담당 형사의 아내가 가설을 제기했다. 그 가설은 의료인 도움 없이 가정에서 출산하면 자궁 감염으로 패혈증이 생겨 자궁 적출을 했을 수 있다는 가능성이었다.
난항을 겪던 수사는 해당 가설을 기준으로 다시 수사에 들어갔다. 2006년 7월28일 국립과학수사연구원(국과수)은 발견된 영아 사체 2구 DNA 분석 결과 신고자 쿠르조가 친아버지라는 결과를 발표했다. 해당 발표에 전국은 들썩였다. 하지만 그 시점에 이미 쿠르조는 자국인 프랑스로 돌아간 상태였다.
2006년 8월7일 국과수는 2번째 DNA 조사 결과를 밝혔다. 베로니크의 칫솔과 귀이개 등에서 나온 DNA가 영아들의 DNA와 일치한다는 것. 또 사건 신고 3년 전인 2003년 자궁적출 수술을 받은 병원에서 조직세포 표본을 확보해 분석한 결과도 베로니크와 영아들의 DNA와 일치했다.
이로써 쿠르조 집에서 발견된 영아 사체 2구는 쿠르조와 베로니크의 자녀였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그들은 자궁적출 수술 전 아기들을 살해했고 냉동실에 3년 동안이나 보관했던 것이다.
이들 부부의 엽기적인 행각은 국내뿐만 아니라 프랑스인들에게도 큰 충격을 안겼다.
수사 결과는 발표됐으나 또 다른 문제가 발생했다. 바로 쿠르조와 베로니크가 이미 프랑스로 출국한 후였던 것. 두 사람은 2006년 8월22일 프랑스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한국 수사당국의 DNA 분석 결과는 믿을 수 없다. 한국에 가지 않겠다"고 말했다.
속인주의 원칙에 따라 수사 주체가 한국 경찰에서 프랑스 경찰로 넘어갔기 때문에 한국 경찰이 조사한 수사 자료는 프랑스어로 번역돼 프랑스 사법 당국에 전달됐다.
2006년 9월26일 프랑스 오를레앙 전문기관에서 자국 경찰의 DNA 검사를 확인한 결과 국과수의 결과와 일치했다. 이에 프랑스 검찰은 같은해 10월10일 친구 집에 머물던 쿠르조 부부를 긴급체포했다.
그들은 도대체 왜 자신의 아이들을 죽였을까?
프랑스 검찰에 붙잡힌 베로니크는 2006년 10월11일 "남편 몰래 한 단독 범행"이라고 자신의 범행을 인정했다. 임신 상태를 남편인 쿠르조가 몰랐다는 것에 의문이 있었으나 베로니크가 임신 7개월 당시 수영복을 입고 찍은 사진에도 그가 임신했다는 것이 드러나지 않아 단독 범행이 인정됐다. 베로니크가 자신의 아이를 살해한 이유에 대해선 임신 거부증의 영향으로 추정된다.베로니크의 범행 인정 이후 영아 사체는 프랑스로 인도됐다. 쿠르조와 베로니크는 두 아이를 호적에 올리고 뒤늦게 이름을 붙여준 뒤 장례를 치렀다.
베로니크의 범행 인정에 대부분 그가 무기징역을 선고받을 것이라고 예상했다. 하지만 당시 사건을 담당한 프랑스 오를레앙 검찰청의 필리프 바랭 차장검사는 베로니크가 임신 거부증이라는 심각한 정신병으로 벌인 범행임을 감안해 징역 10년을 구형했다.
프랑스 법정에서는 최종적으로 징역 8년을 선고했고 베로니크는 오를레앙 교도소에 수감됐다. 하지만 베로니크는 해당 사건과 관련해 언론 접촉을 하지 않겠다는 조건으로 수감된 지 4년 만에 가석방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