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것도 없는 풍경의 아름다움

2024.08.29 20:15 입력 2024.08.29 20:26 수정

도쿄의 가구회사에서 영업을 하는 미치코는 주말마다 기차를 타고 인적 드문 역을 찾아 사진을 찍고 글을 쓰는 철도 오타쿠다.

도쿄의 가구회사에서 영업을 하는 미치코는 주말마다 기차를 타고 인적 드문 역을 찾아 사진을 찍고 글을 쓰는 철도 오타쿠다.

처음으로 일본에 간 해는 1998년이었다. 베니스영화제에서 그랑프리를 받은 영화 <하나비>의 기타노 다케시 감독을 인터뷰하러 도쿄에 갔다. 당시 절정의 인기를 누리던 가수 아무로 나미에의 스타일을 따라 하는 젊은 여성들이 활보하는 시부야, 만화 <시티 헌터>의 배경인 신주쿠, 첨단 전자제품과 애니메이션의 성지 아키하바라 등 도쿄의 중심가를 경탄하며 걸었다. 당시의 일본은 한국보다 앞서가는 선진국이었다. 화려한 거리와 느긋한 공원의 비일상적인 풍경, 한국에서 볼 수 없는 상품들이 즐비한 세련된 상점도 모두 신기했다. 그 시절, 일본을 다녀올 때면 캐리어에 책과 DVD, CD가 가득 채워졌다. 새로운 문화와 트렌드를 알고 싶으면, 미국이나 일본을 가야 했던 시절이었다.

이후 일본 여행을 자주 갔다. 일 년에 대여섯 번 넘게 가기도 했다. 도쿄와 오사카를 주로 갔고, 가끔 후쿠오카 정도. 선진국의 대도시에서, 당시 한국에서는 경험할 수 없는 새로운 것을 만나고 싶은 마음이 컸다. 그러나 10년 이상의 시간이 흐르면서, 일본에서 새로운 무언가를 찾아내기는 힘들어졌다. 한국에서도 대부분 만나고, 경험할 수 있었다. 한국이 발전한 것도 있지만, 인터넷이 생활의 중심이 되면서 세계의 수많은 정보를 실시간으로 접하게 된 환경의 변화가 컸다. 이제는 새로운 것보다, 어떤 분야의 마니악하거나 이면의 흐름을 알고 싶을 때 일본의 경험이 유용하다고 생각한다.

일본 여행도, 대도시보다 중소도시와 시골을 많이 찾게 되었다. 마쓰에, 오노미치, 다카마쓰, 가고시마, 하코다테 같은 곳을 찾아가면 도쿄, 오사카 등 대도시와는 다른 감흥을 받는다. 기억 속에만 남아 있는 과거의 친숙하고 정겨운 느낌을 직접 만나는 경험이랄까. 한국에서는 급격한 난개발로 흔적조차 찾을 수 없게 사라져 버린 옛 거리나 마을의 유사 체험 같기도 하다. 10년, 20년이 지나면 한국의 지방 도시에서 이런 풍경을 만날 수도 있지 않을까.

우연히 제목에 끌려 보게 된 일본 드라마 <철도 오타쿠 미치코, 2만킬로>에서도, 과거의 흔적들이 남아 있는, 익숙하면서도 낯선 공간들을 만났다. 가구회사 영업담당인 미치코는 휴일이면 기차를 타고 일본 전역의 외딴 기차역을 찾아다니며 사진을 찍고 글을 써서, 철도여행 관련 잡지에 YUI라는 필명으로 가끔 기고한다. 미치코가 여행을 가는 곳은, 역에 내려 풍경을 보면서 ‘여기가 어디지?’라는 말이 절로 나올 정도로 낯설고 한적한 지역이다. 하루에 내리는 승객이 평균 세 명이라거나 근처에 ‘아무것도 없는 곳’. 잡지 편집장이 전화로 “거기 뭐가 있나요?”라고 묻자, 그녀는 대답한다. “아무것도 없어요. 최고입니다.” 그러나 미치코는 단지 그것만을 최고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어느 날, 무인역에서 내린 미치코의 눈앞에 태양광 패널이 가득한 숲이 있다. 누구는 풍경을 망쳤다고 투덜거리겠지만, 지역 사람들에게는 숲의 일부를 베어 전력을 만드는 곳으로 사용하는 게 더 좋을 수도 있다. 여행 도중에 만난 ‘오토테츠’(열차 소리를 녹음하는 오타쿠)는 기차가 운행하는 소리를 녹음한다. 그런데 아주머니 세 명의 수다가 열차 전체에 울려 퍼진다. 소음 때문에 곤란했겠다는 미치코의 말에, 그는 아니라고 답한다. 예전에는 기차 소리에 끼어드는 사람들 말소리를 지우려 했는데, 자동으로 소음을 지우니 오히려 기차 소리가 지워졌다고 한다. 자신에게는 소음이지만, 누군가에게는 기차 소리가 소음이 된다. 이제는 모든 것이 기차, 철도의 일부라 생각하며 사람들의 소리도 함께 남겨둔다고 한다.

“태양광 패널, 무인역, 댐 카드, 열차 소리, 아주머니들의 수다, 은퇴한 레일, 아직 어린 차량. 무엇이 가치가 있는지는 사람이 멋대로 정해놓은 것.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 것은 사람마다 제각기. 누군가에게 방해되는 것이라도 다른 누군가의 마음을 움직이고 있을지 모른다.”

<철도 오타쿠 미치코, 2만킬로>가 보여주는, 아무것도 없는 한적한 풍경에 설렌다. 사람들로 가득한 명승지도 좋지만, 기차를 타고 아무도 없는 역에 내리는 여행에 끌린다. 그리고 대도시로 돌아와 일을 하며 살아가는 일상의 즐거움에도 만족한다. 있고 없는 모든 것에는 나름의 가치가 있다. 자신이 발견한 가치를 믿고 키워나가면 무엇이건 충분하고, 매혹적이다.

김봉석 문화평론가

김봉석 문화평론가
바로가기 링크 설명

화제의 추천 정보

    오늘의 인기 정보

      추천 이슈

      내 뉴스플리에 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