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4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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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 1839년 1840년 1841년 - 1842년 - 1843년 1844년 1845년 |
연대 1820년대 1830년대 - 1840년대 - 1850년대 1860년대 |
세기 17세기 18세기 - 19세기 - 20세기 21세기 |
1842년은 토요일로 시작하는 평년이다.
연호
[편집]기년
[편집]사건
[편집]- 2월 - 마카오에 기착 중이던 에리콘 호의 함장 장바티스트 세실이 마카오 주재 파리 외방전교회 경리부장 나폴레옹 리브와(Napoléon Libois) 신부에게 조선 학생 한명을 자기에게 통역관으로 달라고 하였다. 리브와 신부는 이번 기회에 여러 해 동안 중단되어 있는 조선교회와의 연락을 다시 시작하기를 희망하며 기꺼이 이 제안을 받아들였다.[1]
- 3월 9일 - 주세페 베르디의 오페라 나부코 초연.
- 3월 - 마카오에서 김대건·최양업 신부가 유학을 마치고 졸업을 하였다.[2]
- 5월 8일 - 파리시와 베르사이유 간 열차 충돌 사고 발생. 59명 사망.
- 6월 12일 - 장 바티스트 세실의 프리게이트 에리곤 호(l'Érigone)에 승선한 선교사 클로드 고틀랑(Claude Gotteland) 신부, 프랑수아 에스테브 신부, 그리고 벤자멩 브뤼에르(Benjamin Brueyre) 신부 일행이 상하이에 도달하였다.[3]
- 8월 9일 - 미국과 영국 간에 웹스터-애슈버턴 조약이 체결되었다. 이로서 미국과 당시 영국의 식민지였던 캐나다 사이의 국경에 해당하는 메인주와 뉴브런즈윅주 경계의 위치를 둘러싼 분쟁을 해결했다.
- 8월 14일 - 세미놀족 인디언이 세미놀족 전쟁에서 플로리다주부터 오클라호마주까지 적에게 강요당했다가 두 번째 세미놀족 전쟁을 종료시키다.
- 8월 29일(음력 7월 24일) - 청나라가 파견한 기영(耆英), 이리포(伊里布)와 영국이 파견한 헨리 포팅거(Henry Pottinger) 간에 남경 하관 강 위의 군함 위에서 난징 조약이 체결됨으로써 제1차 아편 전쟁이 종결되었다. 또한, 대영 제국이 홍콩을 할양받았다.(1997년까지)
- 뉴질랜드 정부 소재지, 러셀에서 오클랜드로 이전.
- 마카오에서 유학을 마친 김대건이 청나라를 거쳐 귀국하려 하였으나, 의주 검문소의 검문이 심해서 실패하였다.
탄생
[편집]- 1월 11일 - 미국의 철학자, 심리학자 윌리엄 제임스. (~1910년)
- 1월 25일 - 조선의 성리학자 겸 의병장 유인석. (~1904년)
- 2월 4일 - 조선 후기의 문신, 외교관 박정양. (~1905년)
- 3월 28일 - 미국의 군인 윌리엄 H. 카니. (~1908년)
- 5월 12일 - 프랑스의 오페라 작곡가 쥘 마스네. (~1912년)
- 12월 2일 - 영국의 축구 행정가 찰스 윌리엄 앨콕. (~1907년)
- 12월 16일 - 독일의 의사이자 미생물학자 프리드리히 율리우스 로젠바흐. (~1923년)
미상
[편집]사망
[편집]달력
[편집]음양력 대조 일람
[편집]음력월 | 월건 | 대소 | 음력 1일의 양력 월일 |
음력 1일 간지 |
---|---|---|---|---|
1월 | 임인 | 대 | 2월 10일 | 경술 |
2월 | 계묘 | 대 | 3월 12일 | 경진 |
3월 | 갑진 | 소 | 4월 11일 | 경술 |
4월 | 을사 | 대 | 5월 10일 | 기묘 |
5월 | 병오 | 소 | 6월 9일 | 기유 |
6월 | 정미 | 소 | 7월 8일 | 무인 |
7월 | 무신 | 대 | 8월 6일 | 정미 |
8월 | 기유 | 소 | 9월 5일 | 정축 |
9월 | 경술 | 대 | 10월 4일 | 병오 |
10월 | 신해 | 소 | 11월 3일 | 병자 |
11월 | 임자 | 대 | 12월 2일 | 을사 |
12월 | 계축 | 소 | 1843년 1월 1일 | 을해 |
각주
[편집]- ↑ 달레 (1874b) 257쪽. "Dans ce but, en février 1842, il demanda à M. Libois, procureur de la congrégation des Missions-Étrangères à Macao, de lui confier pour quelque temps un des jeunes Coréens élevés chez lui, afin qu'il pût lui servir d'interprète dans le cas où il irait en Corée. M. Libois accepta avec joie cette proposition, espérant par là renouer les communications, interrompues depuis plusieurs années, avec l'Église de Corée."(이러한 목적을 가지고, 1842년 2월, 그는 마카오에 있는 외방전교 수도회의 재무 담당관 리브와 씨에게, 당분간 그와 함께할 한국인 청년 학생을 그에게 맡겨줄 것을 요청하였다. 그것은 그가 한국에 갈 경우에 통역자로서 역할을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리브와 씨는, 그로써 수년 전부터 중단된 한국 교회와의 연락이 다시 이어지기를 희망하며, 그 제안을 기쁘게 수락하였다.)
- ↑ 박해진 (1994). “역사탐방 : 민족혼의 제단에 바친 밀알 - 김대건과 민영환 -”. 《도시문제》 (대한지방행정공제회) 29 (302): 129. 2016년 2월 16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16년 2월 13일에 확인함.
김대건, 최양업은 신부수업을 정진하여 1842년 3월에 졸업을 하니,...
- ↑ 앙리 코르디에 (1921) 112쪽. "Enfin, le 12 juin 1842, le P. Claude GOTTELAND, de Savoie, et le P. François ESTÈVE, de Paris, arrivèrent à Chang Haï, suivis le 23 octobre du P. Benjamin BRUEYRE resté aux Chou San, alors occupées par les Anglais ; ces trois missionnaires avaient quitté Brest le 27 avril 1841, sur la frégate l'Érigone, commandant CÉCILLE; "
참고 문헌
[편집]- 클로드샤를 달레 (1874). 《Histoire de l'Église de Corée Volume 2(조선교회사 2권)》 (프랑스어).
- 앙리 코르디에(Henri Cordier) (1921). 《중국 및 외국과의 관계에 관한 일반 역사 제4권(Histoire Générale de la Chine et de ses relations avec les pays étrangers : vol.4)》. Librairie Paul Geuthn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