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하 (陳賀, ? ~ 기원전 180년)는 중국 전한 의 군인이다. 전한 고제 의 공신 31위로,[ 1] 비(費)[ 2] 에 봉해져 비장군(費將軍)이라고도 하며, 시호는 어(圉)로 비어후(費圉侯)다.
탕군 에서 사인(舍人)으로 처음 고제를 섬겼고, 좌사마(左司馬)로서 한나라에 들어갔다. 이후 한신 에 속해 전공을 세워 장군이 됐다.[ 3] 해하 전투 에서는 우군을 맡아 전군을 맡은 한신이 항우 와 싸워 불리해 물러나자 좌군을 맡은 공취 와 함께 항우를 쳤다. 초군이 불리해지자 한신이 되돌아와 싸워 초군은 대패했다.[ 4] 이후 회계·절강·호양 일대를 평정했다. 이 공적으로 고제 6년(기원전 201년) 열후가 되었다. 여태후 8년(기원전 180년)에 죽어 아들 진상(陳常)이 뒤를 이었다.[ 3]
문제 원년(기원전 179년), 아들 공후(共侯) 진상이 작위를 이었다.
경제 2년(기원전 155년), 진상의 아들 진언(陳偃)이 뒤를 이었으나, 경제 중2년(기원전 148년) 죄를 지어 작위가 박탈되었다.
경제 중6년(기원전 144년) 진하의 아들 진최(陳最)가 소후(巢侯)에 봉해져 가문을 이었으나, 이듬해에 죽어 봉국이 폐지되었다.
원강 4년(기원전 62년), 진하의 증손인 무릉 상조 (茂陵上造) 진교(陳僑)가 조서를 받들어 가문을 일으켰다.
↑ 반고: 《한서》 권16 고혜고후문공신표제6
↑ 초나라 동해군 의 속현으로, 지금의 린이시 페이현 근처에 있다.
↑ 가 나 사마천: 《사기》 권18 고조공신후자연표제6
↑ 사마천: 《사기》 권8 고조본기제8
1 ~ 10위 11 ~ 20위 21 ~ 30위 31 ~ 40위
비어후 진하 (31)
평도후(32) 패가(沛嘉)|공사희(工師喜)
무강장후 장불식(33)
여려[ 2] 애후 주조(34)
대정후 대야(35)
세제후 여박 (36)
해양제신후 요무여(37)
척구의후 당려 (40)
41 ~ 50위
동무정후 곽몽(41)
고원제후 병천 (41)
악성절후 정례(42)
선곡제후 정의(43)
위기장후 주정 (44)
창무정신후 선녕(45)
강양제후 화무해(46)
곡역헌후 진평 (47)
동모경후 유조(48)
균장후 장평(48)
복양강후 진서 (49)
의씨경후 진속
51 ~ 60위 61 ~ 70위 71 ~ 80위
청간후 질중동
강간후 유승(留勝)|강어후 유힐(留肹)
영릉이후 여신
축아효후 고읍(高邑)|고색(高色)
자조단후 적|극주
오제후 양성연
당양애후 손적
영장후 위선(魏選)|위속(魏遬)
장절후 모택
기신광후 진창
81 ~ 90위 91 ~ 100위
순경후 온개
역간후[ 5] 정흑(92)
고릉어후 왕주(92)
무원정후 위거
오방장후 양무
번장후|평엄후 강첨(彊瞻)|장첨사(張瞻師)
분양(장)후 근강(96)
심택제후 조장야(趙將夜)|조장석(趙將夕)(98)
송자혜후 허치
알지절후 풍해감(馮解敢)|풍해산(馮解散)
101 ~ 110위 111 ~ 120위 121 ~ 130위 131 ~ 137위 열외 ※ 번호가 없을 때에는 왼쪽부터 오른쪽으로 순서가 내려간다. 이름이나 시호, 봉작의 표기가 《사기》와 《한서》가 다를 때에는 (《사기》의 표기)|(《한서》의 표기)로 쓴다. 이탤릭체는 고조 사후 봉해졌으나 위계가 기록된 경우다.
↑ 《사기》에서는 21위, 《한서》에서는 22위라 한다.
↑ 상제를 피휘해 융려라고도 한다.
↑ 《사기》에는 순위가 기록되어 있지 않다.
↑ 《사기》에서는 '양하제애후'에 이름은 기록이 없고, 《한서》에서는 '양하제후 기석'으로 기록되어 있다.
↑ 《사기》에서는 봉읍을 마(磨)라 했으나, 《사기색은》에서는 이를 오류라고 했다.
↑ 《사기》에서는 116위, 《한서》에서는 126위라고 한다. 《사기》를 따를 경우, 척새와 순위가 중복된다.
↑ 원래는 항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