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차 평양성 전투
제1차 평양성 전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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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의 일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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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전국 | |||||||
지휘관 | |||||||
조선 광해군 좌의정 윤두수 도원수 김명원 이조판서 이원익 고언백 김침 허숙 김억추 |
일본 고니시 유키나가 구로다 나가마사 소 요시토시 마쓰라 시게노부 아리마 하루노부 오무라 요시아키 고토 스미하루 히다카 고노무 | ||||||
병력 | |||||||
4,000명 | 30,000명(고니시 유키나가의 18,000명,구로다 나가마사의 12,000명 총합) | ||||||
피해 규모 | |||||||
3,000명 전사 | 350명 전사 |
제1차 평양성 전투(第一次平壤城戰鬪) 또는 대동강 전투(大同江戰鬪)는 임진왜란 중의 한 전투이다. 전투의 결과로써 일본군은 공격대상인 평양성을 점령하게 되었다.
전개
[편집]한양을 함락시키고 맹렬한 속도로 진격하던 고니시 유키나가의 부대는 7월 9일(음력 6월 1일) 개성을 함락시키고 평양으로 출발했다. 이에 7월 19일(음력 6월 11일) 조선 왕 선조는 다시 평양에서 의주로 피란하고 평양은 좌의정 윤두수, 도원수 김명원, 이조판서 이원익 등이 지키게 되었다. 성 안에서는 군민 3,000 ~ 4,000명이 을밀대 부근 숲에 옷을 걸치게 하여 군사처럼 보이도록 하였다.
7월 21일(음력 6월 13일) 대동강에 도달한 고니시의 부대는 진을치고 양각도를 건너 대동관을 조총으로 사격했다. 이에 윤두수와 이원익, 김침 등이 동대원의 일본군 진영을 기습 공격해 수백 명을 죽이고 말 수십 필을 빼앗았다. 그러나 다른 일본군들이 석회탄에 진을 쳐 여기를 지키던 조선군이 크게 패해 도망쳤다.
보고를 들은 윤두수는 허숙과 김억추를 시켜 대동강을 지키게 하고 7월 22일(음력 6월 14일) 새벽에 고언백을 시켜 400명의 병정을 주어 부벽루 밑 능라도로 강을 건너 기습 공격을 하게 했다.[1] 그러나 군령을 지키지 못해 오히려 패배한후 대동강에서 가장 얕은 여울인 왕성탄을 건너 평양성으로 퇴각했다. 대동강의 여울중에 가장 수심이 얕은 왕성탄을 알게된 일본군이 그곳으로 강을 건너 평양성을 공격해 왔다.[2] 결국 윤두수와 김명원은 군사들을 내보낸 뒤 무기를 모두 풍월루의 연못에 버리고 빠져나왔다. 이로인해 일본군은 평양성에 무혈입성하였고, 이는 전쟁 개전 60일 만에 일본군이 거둔 큰 성과중 하나에 해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