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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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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명
개인 정보
로마자 표기 Lee Soon-Myung
출생일 1940년 월 일(오류: 시간이 잘못되었습니다.)
출생지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사망일 1998년 7월 9일(1998-07-09)
사망지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포지션 감독 (과거 공격수)
청소년 구단 기록

1959
동북고등학교
국학대학
구단 기록*
연도 구단 출전 (득점)
1960-1962
1963-1965
1966
1967-1968
1970-1971
육군 방첩부대 축구단
금성방직 축구단
제일모직 축구단
치안국 축구단
상업은행 축구단
국가대표팀 기록
1959
1959-1967
대한민국 U-20
대한민국

007 00(2)
지도자 기록


1997-1998
상업은행 축구단 (코치)
상업은행 축구단
대한축구협회 (심판위원장)
* 구단의 출전횟수와 득점기록은 정규 리그의 공식 리그 경기 기록만 집계함. 또한 출전횟수와 득점기록은 2003년 1월 1일 기준임.
‡ 국가대표팀의 출전횟수와 득점기록은 2003년 1월 1일 기준임.

이순명(李順命, 1939년 6월 23일 ~ 1998년 7월 9일)은 대한민국의 전 축구 선수이다.

상업은행 축구단의 감독을 맡았으며, 1997년부터 대한축구협회의 경기위원장을 지냈다.

선수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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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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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북고등학교를 거쳤으며, 1959년 국학대학에 입학하였다.[1] 이후 같은 해 육군 특무부대 축구단에 입대했으며, 직후 열린 전국축구선수권대회 당시 육군 헌병감실 축구단과의 경기에서 결승골을 성공시키는 등 팀의 우승에 기여하였다.[2] 그 뒤 방첩부대에서 제대해 금성방직 축구단으로 이적한 뒤 핵심 선수로 활약했으며,[3] 1965년 아시아 청소년 축구 선수권 대회에 참가하는 대한민국 U-20 국가대표팀과의 경기에서 선제골을 득점하며 팀의 2-1 승리를 이끌었다.[4] 또한 그 해 전국실업축구연맹전 추계 대회에서 대한중석 축구단철도청 축구단과의 경기에서 몇 차례 골을 기록하는 등의 활약을 보였으나 팀은 결승 진출에 실패했으며,[5][6] 뒤이어 열린 동북고등학교와 한양공업고등학교의 OB 올스타전에 출전하였다.[7]

이후 1966년 제일모직 축구단에 입단했으며,[8] 그 해 전국실업축구연맹전 춘계 대회에서 육군 병참단 축구단을 상대로 결승골을 성공시키는 등 뛰어난 활약을 펼쳤으나 팀은 좋은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9] 또한 대통령배 전국축구대회 당시 철도청 축구단과의 경기 등에서 활약했으나 팀은 결승 진출에 실패했으며,[10] 얼마 뒤 열린 야와타제철 축구단과의 '한일 축구대회'에서 박병주의 추가골을 어시스트하는 등 인상적인 활약을 보였다.[11] 그리고 1967년 치안국 축구단으로 팀을 옮겼으며, 같은 해 전국실업축구연맹전 춘계 대회 당시 해병대 축구단쌍용양회 축구단과의 경기에서 잇달아 공격 포인트를 기록하는 등 좋은 활약을 펼치며 팀의 대회 우승에 공헌하였다.[12][13]

그 뒤 1970년 상업은행 축구단 소속으로 활동했으며, 그 해 대통령배 전국축구대회 결승전에서 해병대 축구단을 상대로 결승골을 득점해 팀의 우승에 크게 기여하였다.[14] 하지만 1971년 산업은행 축구단과의 국무총리배 금융단 축구대회에서 김영호를 고의적으로 가격한 뒤 퇴장 처분을 받자 동료들과 함께 이우현 주심에게 지나치게 항의하는 모습을 보인 것으로 인해 빈축을 사기도 했으며,[15][16] 같은 해 대통령배 금융단 축구대회에서 한일은행 축구단을 상대로 득점포를 쏘아올리는 등의 활약을 보였으나 팀은 결승 진출에 실패하였다.[17] 그리고 전국실업축구연맹전 추계 대회에서 육군 축구단을 상대로 추가골을 기록하는 등 좋은 모습을 보였으나 팀은 좋은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18]

국가대표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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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9년 아시아 청소년 축구 선수권 대회대한민국 U-20 국가대표팀의 일원으로 참가했으며,[19] 태국과의 경기에서 선제골을 성공시켜 팀의 2-0 승리를 이끌었다.[20] 또한 일본과의 경기에서 추가골을 득점하는 등 뛰어난 활약을 펼치며 팀의 3-2 승리를 견인했으며,[21] 팀의 대회 우승에 크게 기여하였다. 그리고 같은 해 개최된 메르데카 국제축구대회에 참가하였고,[22] 9월 2일 싱가포르와의 경기에 출전하여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에 정식으로 데뷔하였다.

이후 1960년 하계 올림픽 예선 선수 후보 명단에 포함되었으나 최종적으로 선발되지 못했으며,[23] 같은 해 메르데카 국제축구대회 선수 선발 대회에 출전했으나 최종적으로 선발되지 못했다.[24] 그 뒤 1960년 AFC 아시안컵에 참가해 활약했으며,[25] 중화 타이베이와의 경기에서 인상적인 활약을 선보이며 대표팀의 AFC 아시안컵 2연패에 기여하였다.[26] 그리고 일본과의 1962년 FIFA 월드컵 예선 경기 명단에 포함되었으나 본 경기에는 나서지 못했으며,[27] 뒤이어 치러진 양팀 간 평가전에 출전하였다.[28] 이후 1961년 펼쳐진 마두레이라 EC와의 평가전에 출전해 만회골을 성공시키는 등 좋은 활약을 펼쳤으나 팀의 패배를 막지 못했고,[29][30] 그 해 개최된 세계 군인 축구 선수권 대회에 참가해 대표팀의 준우승에 일조하였다.[31]

그 뒤 1962년 스포르팅 크리스탈과의 1차 평가전에 출전했으며,[32][33] 국가대표팀의 인도네시아 원정 선수 선발 대회에 출전했으나 최종적으로 선발되지 못했다.[34] 이후 1963년 중화 타이베이와의 1964년 하계 올림픽 1차 예선 선수 후보 명단에 포함되었으나 최종적으로 선발되지 못했으며,[35] 1964년 AFC 아시안컵에 참가해 이스라엘과의 경기에서 만회골을 넣는 등의 활약을 보였으나 대표팀은 3위를 기록하며 좋은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36] 그 뒤 1964년 국가대표 B팀으로 구성된 메르데카 국제축구대회 선수 선발 대회에 출전했으나 최종적으로 선발되지 못했으며,[37] 1965년에는 1966년 FIFA 월드컵 예선을 앞두고 벌어진 제1차 선발전에서 소속팀의 우승에 기여하였다.[38] 그리고 제2차 선발전 후보 명단에 포함된 뒤 최종적으로 선발되었으나,[39][40] 대한축구협회 측에서 예선 불참을 결정함에 따라 경기에 나서지 못했다.[41]

이후 1966년 아시안 게임 선수 후보 명단에 포함되었으나 최종적으로 선발되지 못했으며,[42] 1967년에는 국가대표팀 상비군 명단에 포함되었다.[43] 그리고 같은 해 열린 미들섹스 원더러스 AFC와의 2차 평가전에 출전했으며,[44] 팀의 선제골에 관여하는 등 인상적인 활약을 보이며 팀의 2-0 승리에 공헌하였다.[45] 또한 1968년 하계 올림픽을 대비해 소집된 명단에 들어갔으며,[46] 1968년 AFC 아시안컵 예선에 참가하는 대표팀에 추가로 발탁되었으나 대표팀은 본선 진출에 실패하였다.[47][48]

각주

[편집]
  1. “「라만盃(배)」는 부른다 亞洲靑少年蹴球大會展望(아주청소년축구대회전망)”. 동아일보. 1959년 4월 13일. 
  2. “來七日(내칠일)에最終選拔(최종선발) 올림픽 派遣蹴球(파견축구) 特務隊(특무대)『팀』이優勝(우승)”. 동아일보. 1959년 11월 4일. 
  3. “서울·金星紡織(금성방직)팀 3連勝(연승)”. 경향신문. 1963년 10월 26일. 
  4. “代表(대표)팀敗北(패배)”. 동아일보. 1965년 4월 14일. 
  5. “實業蹴球(실업축구) 重石(중석),首位(수위)지켜”. 경향신문. 1965년 10월 27일. 
  6. “[센터·링]받은 이영근, [논스톱]으로 [슈팅]”. 중앙일보. 1965년 11월 6일. 
  7. “東北漢陽(동북한양) 蹴球(축구) 定期戦(정기전)”. 경향신문. 1965년 11월 10일. 
  8. “球界(구계)의 새版圖(판도) (9) 實業蹴球(실업축구) <下(하)>”. 동아일보. 1966년 2월 25일. 
  9. “運營(운영)의妙(묘)로『리드』”. 동아일보. 1966년 4월 20일. 
  10. “重石慶熙大(중석경희대)에辛勝(신승) 大統領盃(대통령배) 쟁탈蹴球(축구)”. 경향신문. 1966년 5월 13일. 
  11. “팔번 팀, 연달아 고배”. 중앙일보. 1966년 3월 28일. 
  12. “實業(실업)축구 A組(조)예선 治安局(치안국)·陸軍決勝(육군결승)에”. 동아일보. 1967년 4월 26일. 
  13. “일모·육군 비겨”. 중앙일보. 1967년 5월 6일. 
  14. “大統領杯蹴球(대통령배축구) 商銀(상은),海兵(해병)꺾어 첫優勝(우승)”. 동아일보. 1970년 6월 10일. 
  15. “금융단蹴球(축구) 國民銀(국민은),企銀(기은)격파 二勝(이승) 産銀(산은)은 商銀(상은)물리쳐”. 동아일보. 1971년 3월 19일. 
  16. “금융축구不祥事(불상사) 賞罰委(상벌위)서 故意反則(고의반칙)에 강경책”. 경향신문. 1971년 3월 19일. 
  17. “金融團(금융단)축구 韓一(한일)·朝興銀(조흥은)선두에”. 동아일보. 1971년 7월 24일. 
  18. “상은, 육군대파”. 중앙일보. 1971년 11월 15일. 
  19. “派遣選手決定(파견선수결정)『라만·컾』爭奪靑少年蹴球(쟁탈청소년축구)”. 동아일보. 1959년 2월 27일. 
  20. “二對(이대)○으로『泰(태)』擊破(격파)”. 동아일보. 1959년 4월 20일. 
  21. “三對二(삼대이)로日(일)『팀』擊破(격파) 亞洲少年蹴球(아주소년축구) 韓國(한국)『팀』最終決戰(최종결전)에”. 동아일보. 1959년 4월 22일. 
  22. “新人六名(신인육명)도參加(참가) 馬來建國記念(마래건국기념) 蹴球派遣選手團(축구파견선수단)”. 동아일보. 1959년 7월 28일. 
  23. “候補選手(후보선수)30名選出(명선출)”. 동아일보. 1959년 11월 6일. 
  24. “韓國代表選手(한국대표선수) 選拔(선발) 三十日(삼십일) 蹴協(축협)서再開(재개)”. 경향신문. 1960년 6월 29일. 
  25. “우리代表決定(대표결정) 二回亞洲蹴球戰(이회아주축구전)”. 동아일보. 1960년 9월 30일. 
  26. “前半戰(전반전)선 相互牽制作戰(상호견제작전)”. 경향신문. 1960년 10월 22일. 
  27. “兩(양)팀의『멤바』決定(결정)”. 동아일보. 1960년 10월 30일. 
  28. “後半戰(후반전)선無得點(무득점) 韓日親善蹴球(한일친선축구),시종白熱戰(백열전)”. 동아일보. 1960년 11월 8일. 
  29. “우리팀과二回對戰(이회대전)”. 경향신문. 1961년 3월 21일. 
  30. “서울팀4對(대)2로敗北(패배)”. 경향신문. 1961년 4월 2일. 
  31. “國軍代表(국군대표) 選拔國際軍人(선발국제군인) 蹴球選手權(축구선수권) 派遣(파견)”. 경향신문. 1961년 7월 26일. 
  32. “選手(선수)37名(명) 選拔(선발) 페루蹴球(축구)팀과對戰(대전)”. 경향신문. 1962년 3월 2일. 
  33. “1對(대)0 페루『팀』辛勝(신승)”. 동아일보. 1962년 3월 11일. 
  34. “印尼派遣蹴球選拔(인니파견축구선발)”. 동아일보. 1962년 4월 24일. 
  35. “蹴球(축구)·籠球(농구)올림픽代表選手(대표선수) 이달안에 最終(최종)선발”. 경향신문. 1963년 10월 12일. 
  36. “亞洲蹴球選手權(아주축구선수권) 出戰選手(출전선수)를選定(선정)”. 동아일보. 1964년 5월 9일. 
  37. “42名(명)을選定(선정) 메르데카蹴球選手(축구선수)”. 경향신문. 1964년 7월 23일. 
  38. “金星(금성) 優勝(우승) 차지 韓電(한전)팀에 4對(대)0勝(승) 世界蹴球(세계축구)대표 選拔戰(선발전)폐막”. 경향신문. 1965년 3월 17일. 
  39. “候補(후보)에53名(명)”. 동아일보. 1965년 3월 18일. 
  40. “世界蹴球(세계축구) 代表(대표)22名(명) 確定(확정)”. 동아일보. 1965년 3월 29일. 
  41. “世界蹴球豫選(세계축구예선)에 韓國(한국)「팀」不參(불참)”. 경향신문. 1965년 8월 7일. 
  42. “亞洲(아주)경기蹴球(축구)파견 1次(차)후보41名(명)선발”. 경향신문. 1966년 4월 8일. 
  43. “韓國(한국) 蹴球代表(축구대표) 常備軍(상비군) 28명確定(확정)”. 경향신문. 1967년 5월 27일. 
  44. “蹴球中興(축구중흥)건 大戰(대전)”. 경향신문. 1967년 6월 2일. 
  45. “A팀2對(대)1敗(패) B팀2對(대)0勝(승) 韓(한)·英(영)축구”. 동아일보. 1967년 6월 5일. 
  46. “멕시코五輪對備(오윤대비)”. 경향신문. 1967년 7월 11일. 
  47. “蹴球協(축구협)결정 臺北亞洲(대북아주)축구豫選(예선) 다시參加(참가)키로”. 동아일보. 1967년 7월 14일. 
  48. “亞洲(아주)·메杯(배) 촉구 出戰(출전) 代表團(대표단)결단”. 동아일보. 1967년 7월 2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