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룰리우마 1세
수필룰리우마 1세(Šuppiluliuma I)는 히타이트 왕(재위: 기원전 1358년 ~ 기원전 1323년)이었다. 그는 위대한 전사로 그리고 정치 지도자로 명성을 획득하였는데 당시에 강대국 이집트 제국과 지중해와 유프라테스 사이의 땅에서 도전하였다.
수필룰리우마는 투드할리야 3세의 참모와 장군으로 시작하였다. 그 후 사무하에 기지를 두었다. 여기에서 그는 하야사와 카스카스에 있는 히타이트의 적들을 격파하였다. 그때 두 적국은 그를 공격하기 위해 카리스마 있는 지도자들을 중심으로 뭉쳤다. 이들 중에 카리니는 하야사에 왕정의 셈블란스를 창업하였고 피야필리는 카스카에서 그렇게 하는데 실패하였다. 수필룰리우마와 투드할리야는 히타이트 왕정이 있는 하투사에 다시 정착할 수 있을 정도로 차례로 이들 압박을 격파하였다. 어떤 점에서 수필룰리우마는 그의 군주를 폐위하였고 아마도 살해하였다. 약간의 찬양자들은 후에 이것을 수필룰리우마의 아들 계승자와 전기작가 무르실리 2세에게 보고하였다. 그것을 전체 왕조의 가장 탁월한 범죄로 유지하였다.
수필룰리우마는 누이를 하야산 왕 훜카나에게 시집을 보내고 그의 딸 무와티를 아르자와국 뮈라의 마스크휠루와에게 보냈다. 그는 아르자와 영토를 하팔라까지 다시 얻었다. 그의 가장 영원한 승리는 미탄니왕국에서 얻은 것이다. 미탄니 왕국을 그는 그의 사위 샤티와자 아래의 속국으로 축소하였다. 그는 역시 돌 릴리프로 장식된 큰 석재 구조의 제왕 건축가이기도 하였다. 그의 치세중에 왕족 지도자의 고귀한 특성의 개념이 개발되었다.
수필룰리우마는 그 후 파라오 아크나톤의 떠들석한 치세를 이용하였고 시리아에서의 이집트 영토를 장악하였다. 그리고 많은 이집트 속국을 반란하게 자극하였다.
이후 투탕카멘이 이집트 왕으로 되었는데, 안타깝게도 그는 18세의 젊은 나이로 사망하였다. 그러자 그의 미망인인 안케세나멘이 수필룰리우마에게 편지를 보내왔다.[1] 그 내용은 수필룰리우마의 아들이 그녀의 남편이 되어 이집트를 다스릴 것을 요구하는 내용이었다. 투탕카멘은 왕자를 남기지 않았으며, 안케세나멘은 투탕카멘 시절의 권력자 아이와 강제로 결혼할 처지였다. 수필룰리우마는 대사를 이집트로 보내 이 사실을 조사하게 하였다.
그는 편지가 상황이 정확히 기록되었다고 보고하였고 왕은 이 뜻밖의 기회를 이용하기로 결정하였다. 불행히도 왕자 잔난자는 도중에 피살되고 결혼 동맹은 결국 승인되지 않았다. 수필룰리우마는 이번에는 매우 진노하여 가나안과 북시리아의 이집트 속국을 그의 군대로 해방시켰고 많은 영토를 포획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