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한국당
민주한국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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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징색 | 빨강 (#ED2939)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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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념 | 고전적 자유주의 보수자유주의 국민자유주의 반공주의 민족주의 | ||
스펙트럼 | 중도 ~ 중도우파 | ||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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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당 | 1981년 1월 1일 | ||
해산 | 1988년 4월 26일 | ||
분당해 나간 정당 | 신한민주당 | ||
선행조직 | 신민당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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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한국당(民主韓國黨, 영어: Democratic Korea Party, DKP) 또는 약칭 민한당(民韓黨)은 제5공화국 시기에 존재하였던 대한민국의 정당이다.
역사
[편집]창당
[편집]1980년 11월 25일 정치 규제에서 풀려난 14명의 전 신민당 의원들은 11월 27일 뉴서울호텔에서 민주한국당 창당발기준비위원회를 구성했다.[1] 1981년 1월 17일 민주한국당 창당대회를 열고 유치송 전 신민당 최고위원을 당 총재 및 제12대 대선 후보로 추대했다. 민주한국당은 소극적인 정치 참여를 약속하고 등장한 관제야당이었으며, 탄생부터 제대로 된 야당 기능을 하지 못 하였다.
제12대 대선과 제11대 총선
[편집]민한당은 1981년 2월 제12대 대통령선거에 유치송을 후보자로 내세워 참여하였으나, 7.7%를 얻는 데 그쳤다. 그러나 3월 실시된 제11대 국회의원 총선거에서는 전체 유효투표의 21.6%를 획득하여 지역구와 전국구를 합쳐 총 81석의 의석을 확보하였으며, 그에 따라 제5공화국의 제1야당으로 부상하였다. 하지만 민한당은 안기부의 자금을 지원받아 창당된 사실상의 관제 야당이자 위성정당으로, 정권을 견제한다는 야당 본연의 기능을 수행하지 못해 국민들에게 전폭적인 지지를 얻지 못했다.
제12대 총선
[편집]1984년 정치활동 금지에서 해제된 인사들을 중심으로 신한민주당(新韓民主黨)이 창당되자 소속 의원 10여 명이 탈당, 신한민주당으로 옮겨갔으며[2], 1985년 제12대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35명의 당선자를 내는 데 그쳐 신한민주당에게 제1야당의 자리를 내주었고, 그 후 소속 의원들의 탈당이 이어져 국회의원 3명의 군소 정당으로 전락하였다.
몰락
[편집]1987년 6월 민주 항쟁 이후 치러진 1988년 제13대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총재 유치송을 비롯한 후보자 전원이 낙선하여, 정당법(政黨法)에 따라 정당등록이 취소되었다. 이후 당은 통일민주당(統一民主黨)에 흡수되었다.
역대 총재
[편집]대수 | 역대 대표 | 직함 | 임기 | 비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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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 유치송 | 총재 | 1981년 1월 17일 ~ 1983년 2월 9일 | |
2 | 유치송 | 총재 | 1983년 2월 9일 ~ 1985년 3월 29일 | |
3 | 조윤형 | 총재 | 1985년 3월 29일 ~ 1985년 4월 30일 | 무조건 통합 추진으로 제명 |
임시 | 김준섭 | 총재권한대행 | 1985년 3월 29일 ~ 1985년 9월 12일 | 조윤형 제명으로 대행 |
4 | 유치송 | 총재 | 1985년 9월 12일 ~ 1988년 4월 26일 | 득표미달로 당 해산 |
주요 선거 결과
[편집]대통령 선거
[편집]연도 | 선거 | 후보자 | 득표 | 득표율 | 결과 | 당락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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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1년 | 12대 | 유치송 | 404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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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위 | 낙선 |
국회의원 선거
[편집]연도 | 선거 | 지역구 | 비례대표 | 정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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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 | 당선비율 | 당선 | 득표율 | 당선 | 당선비율 | ||||||||
1981년 | 11대 | 57/18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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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9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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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27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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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년 | 12대 | 26/18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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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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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27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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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 | 13대 | 0/22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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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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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9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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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전당대회
[편집]민주한국당 창당대회
[편집]1981년 1월 17일 민주한국당은 정강정책을 채택하고총재에 유치송 창당준비위원장을 추대한 뒤 대한민국 제12대 대통령 선거 후보로 유치송 총재를 추대했다
민주한국당 제2차 정기 전당대회
[편집]1983년 2월 9일 민주한국당 전당대회는 유치송 총재를 총재로 재추대하고 정강정책과 당면정책을 수정하였다.
민주한국당 제3차 정기 전당대회
[편집]1985년 3월 27일 민주한국당 전당대회는 지도체제와 관련된 모든 당헌개정안과 박일 의원의 야권통합추진수권위원회구성안을 부결시키고 '체제정비 후 통합'을 결의했다. 이에 박일 의원은 조윤형 후보를 지지하며 총재 경선에서 사퇴했다.
득표순위 | 이름 | 득표수 | 득표율 | 비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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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 조윤형 | 230 | 39.9% | |
2 | 유한열 | 183 | 31.7% | |
3 | 한영수 | 127 | 22% | |
총투표수 | 577 |
1차 투표 결과 과반득표자는 없었으나 유한열 후보와 한영수 후보가 사퇴하면서 조윤형 후보가 총재로 당선되었다. 전당대회는 대통령 직선제 관철 등을 담은 3개항의 결의문을 채택했으며 야권통합추진수권위 인선을 조윤형 총재에게 위임했다.
1985년 4월 민주한국당 임시 전당대회
[편집]1985년 4월 30일 민주한국당은 임시 전당대회를 열고 3차 전당대회에서의 '체제정비 후 통합' 결의를 무시하고 무조건 통합을 추진한 조윤형 총재를 제명시켰다.
1985년 9월 민주한국당 임시 전당대회
[편집]1985년 9월 12일 민주한국당 임시 전당대회는 제명된 조윤형 총재를 대신해 유치송 전 총재를 새 총재로 추대한 뒤, 대통령 직선제 개헌, 학원안정법 철회투쟁, 당 문호개방, 야권통합 등을 결의했다.
각주
[편집]- ↑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2019년 4월 1일에 확인함.
- ↑ 지면보기, 입력 1984 12 21 00:00 종합 3면 (1984년 12월 21일). “"신당만이 왜 야당입니까" 유치송 민한당 총재”. 2019년 4월 25일에 확인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