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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근대화 ④] 일미수호통상조약, 존왕양이 운동, 조슈‧사쓰마의 삿초동맹과 사카모토 료마 , 다카스키 신사쿠

2024.07.29. 오후 5:35

삿초동맹을 체결하는 모습을 재현한 일본 드라마. 왼쪽부터 사이고 다카모리, 고마쓰 다테와키, 사카모토 료마, 가쓰라 고고로

■일미수호통상조약과 존왕양이 운동

막부의 다이로(大老) 훗타 마사요시가 미국의 강요로 만들어진 일미수호통상조약안(案)을 조약 체결에 앞서 천황의 칙허를 받기 위해 1858년 2월 그동안 거들떠보지도 않았던 교토의 천황궁을 찾아간 것은 당대로서는 큰 사건이었다. 도쿠가와 막부 출범 후 250년간 막부에서 정책 관련해 천황에게 의견을 구한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그때까지 천황은 막부의 통제와 간섭을 받는 무력한 존재였다. 에도에서 멀리 떨어진 교토의 황궁에서 제사나 지내며 소일하고 정치적 권한도 없었다. 이처럼 에도 막부로부터 완전히 따돌림을 받고 있던 천황가에 의견을 물었으니 훗타 마사요시의 행동은 결과적으로 천황의 권위를 높여주는 결과를 낳았다. 더구나 고메이 천황은 존왕양이파의 말을 듣고 통상조약을 거부하기까지 했다.

막부의 정책에 한 번도 자신의 목소리를 낸 적이 없고 낼 수도 없던 천황이 칙허를 거부한 이유는 통상조약 체결로 개항이 되면 오사카항과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에 있는 교토에도 외국인이 몰려와 왕권 유지에 큰 위협이 될 것으로 우려했기 때문이다. 지척에 오사카 항이 있는데도 바다를 한 번도 구경하지 못한 고메이 천황은 외국인의 내항에 맹목적인 공포를 갖고 있었다. 훗타 마사요시는 천황의 칙허를 받지 못해 결국 실각하고 그 뒤를 이어 1858년 4월 강경 보수파인 이이 나오스케가 다이로에 취임했다. 쇼군 이에사다가 중병에 걸려 목숨이 위태롭던 시기였다.

그 무렵 영국과 프랑스 함대가 청나라를 굴복시키고 굴욕적인 불평등조약을 체결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그러자 이이 나오스케가 위기감을 느끼고 1858년 6월 19일(양력 7월 29일) 14개 조의 일미수호통상조약을 고메이 천황의 칙허 없이 일방적으로 체결했다. 시모다와 하코다테 외에 요코하마, 나가사키, 니가타 등 항구를 추가로 개항하고 자유무역을 원칙으로 하며 개항장에 외국인 거류지를 설치하되 외국인의 국내 여행은 금지한다는 등의 내용이었다. 하지만 힘에 밀려 체결한 조약이다 보니 일본 내 미국인의 치외법권은 인정한 반면 미국으로부터 관세 자주권은 물론 최혜국대우조차 받아내지 못했다.

이 때문에 조약 체결이 부당하다는 반발이 있었으나 이이 나오스케는 아랑곳하지 않고 네덜란드, 러시아, 영국, 프랑스와 연이어 수호통상조약을 체결했다. 천황의 칙허가 아무리 형식적인 의례였다고 하지만 명목상 국가 원수인 천황의 권위를 아예 무시하자 고메이 천황이 존왕양이를 주장하는 일부 번주의 목소리를 믿고 조약 체결에 불만을 표시하는 칙령을 내렸다. 이런 상황에서 쇼군 이에사다가 1858년 8월 34세로 병사하자 이이 나오스케는 12살의 도쿠가와 이에모치를 차기 쇼군으로 옹립했다. 그러자 촉망받고 있던 21살의 히토 요시노부를 차기 쇼군감으로 지지해온 개혁파 다이묘들 사이에 반발이 확산했다.

이이 나오스케 초상화

이이 나오스케는 이에모치가 즉위한 후, 정치적 반대파들을 제거하기 위해 1858년 9월 이른바 ‘안세이 대옥’이라는 피의 숙청을 단행, 존왕양이파를 처형하는 공안통치를 자행했다. 이이는 100여 명의 존왕양이 지사들을 처형하고 개혁파 다이묘의 가신들을 가택연금하거나 유배하는 초강경 조치를 취했다. 조슈 번의 정신적 지주였던 요시다 쇼인도 안세이 대옥 때 처형되었다. 막부의 이 같은 강경 조치는 무사들의 격렬한 반발을 불렀다. 당시 무사들이 좇는 대의명분도 존왕양이였다. 무사들은 이질적인 외국인이 일본의 주요 도시를 활보하는 것을 바라보면서 무기력한 막부와 외국인에 대해 점점 더 강한 분노를 느꼈다.

존왕양이의 중심은 조슈 번

존왕양이의 강력한 옹호 세력은 에도 막부에서 철저히 소외되고 중앙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조슈 번(야마구치현), 도사 번(고치현), 히젠 번(나가사키현) 등의 무사들이었다. 이들은 막부 체제 해체와 천황 중심의 강력한 중앙집권국가 수립을 목표로 삼았다. 이에 공감하는 세력이 결집하면서 일본은 엄청난 변혁의 소용돌이에 빠져들었다. 이는 존왕양이파가 중앙 정국에 태풍의 눈으로 등장했음을 알리는 신호탄이었고, 막부에는 몰락의 출발점이었다.

존왕양이의 주요 번

존왕양이파의 전술은 암살과 테러였다. 이이 나오스케도 1860년 3월 에도성 성곽의 사쿠라다문 밖에서 존왕양이파 낭인 무사들에게 살해되었다. 안세이 대옥 때 심한 탄압을 받은 조슈 번과 미토 번의 존왕양이파 무사 낭인들이 복수한 것이다. 무사들은 1861년 미국 영사관의 통역관과 영국 공사관 직원도 살해했다. 이이의 암살은 일본의 근대화 역사에서 하나의 분기점이었다, 존왕양이파의 반발을 강하게 제압하는 숙청을 단행하면서 과감하게 개항을 추진한 이이 나오스케가 암살된 뒤 막부에서는 더 이상 그처럼 과단성 있게 정국을 주도하는 인물이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반막부파 중 먼저 행동에 나선 세력은 하급 무사들이었다. 도사 번과 사쓰마 번의 일부 하급무사들도 존왕양이와 토막(討幕)에 나섰지만 중심은 조슈 번이었다. 조슈 번으로서는 250년 만에 찾아온 막부에 대한 복수의 기회이자 일본을 개혁할 호기였다. 조슈 번 세력은 천황이 거주하는 교토에서도 존왕양이와 토막을 주장하며 기세등등했다.

사쓰마번은 존왕양이 주장 배격하고 막부 내부 개혁 중시

그 무렵 규슈 지역의 최강자이면서 조슈 번의 경쟁 번이었던 사쓰마 번은 조슈 번과 다른 노선을 걸었다. 당시 사쓰마 번의 번주는 시마즈 타다요시였으나 아직 나이가 어려 그의 아버지 시마즈 히사미쓰가 번주의 후견인 역할을 했다. 히사미쓰는 과격한 존왕양이 주장은 배격하면서 도쿠가와 막부 내부의 개혁을 주장한 공무합체파(公武合體派)였다. 히사미쓰는 1862년 교토로 상경해 코메이 천황에게 존왕양이파의 급진적인 행동을 억제하고 막부와 협조할 것을 진언했다. 그 후 검술의 달인들을 교토로 파견, 교토 외곽 여관에 집결해 있던 자번(自藩)의 급진 존왕양이파들을 베어 죽이고 에도로 내려가 14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모치에게 막정(幕政)의 개혁안을 전달했다.

이른바 ‘나마무기 사건’이 일어난 것은 히사미쓰가 쇼군 이에모치와 나눈 얘기를 코메이 천황에게 보고하기 위해 에도를 떠나 교토로 가던 1862년 8월 21일 이른 아침이었다. 약 400명으로 이뤄진 번주 행렬이 시나가와를 지나 나마무기(요코하마 소재) 가도로 접어들 때 전방에서 말을 탄 영국인 4명이 다가왔다. 이들은 일본의 번주쯤은 얕잡아 보았는지, 말을 되돌려 가라는 번사들의 손짓을 무시하고, 번주의 행렬에 끼어들었다. 그러자 호위 사무라이들이 1명의 영국인을 칼로 난도질해 죽여 버렸다. 부상을 입은 2명은 1명의 여성과 함께 도주했다.

‘나마무기 사건’ 발생 후 영국은 배상금을 요구했다. 막부는 굴복해 배상금을 지급했지만, 사쓰마 번은 거부했다. 이에 영국은 1863년 6월, 요코하마에 집결했던 7척의 군함을 가고시마 만으로 파병, 이른바 사쓰에이(薩英) 전투를 벌였다. 사쓰마군은 영국군의 상륙은 저지했지만, 영국군의 함포사격으로 가고시마 시내가 불바다가 되었다. 결국 3일간의 전투에서 물적 피해는 사쓰마 번이 압도적으로 컸지만 인적 피해만 놓고 보면 영국 측의 사상자가 더 많았다. 양측 모두 데미지를 입은 사쓰에이(薩英) 전투 후 영국과 사쓰마는 서로의 실력을 인정해 11월 화해하기에 이르렀다. 사쓰마는 영국에 배상금을 지급하고, 영국은 군함을 구입하려는 사쓰마에게 편의를 제공하기로 했다.

사쓰마 번은 또한 영국에 유학생 파견을 제안했다. 영국 측은 싸운 상대로부터 배우려는 자세를 높게 평가했다. 사쓰마 번 출신 시찰원 4명과 유학생 15명이 런던에 당도한 것은 1864년 5월이었다. 이들 가운데 1명만 중학교에 입학하고 나머지 14명은 조슈 번 유학생과 마찬가지로 UCL(런던칼리지대학)의 청강생이 되었다. 이들 가운데서 메이지 정부에서 외무대신을 지낸 데라지마 무네노리, 초대 문부대신 모리 아리노리, 초대 일본은행 총재 요시하라 시게토시 등 쟁쟁한 인물들이 배출되었다.

고메이 천황은 조슈 번과 달리 막부 타도에 반대

한편 존왕양이론으로 여전히 기세등등한 조슈 번이 1863년 3월 천황 주변의 존왕양이 공경(전통 귀족) 들과 함께 나이 어린 쇼군 이에모치를 막부의 에도에서 교토로 상경하게 한 뒤 고메이 천황에게 양이(攘夷)의 서약을 하게 했다. 쇼군이 교토로 가서 천황을 수행한 것은 3대 쇼군 이에미쓰 이래 200년 만에 처음 있는 일이었다. 이는 쇼군이 천황의 권위에 굴복한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그 배경에는 이 기회에 천황 조정의 권위를 확립시켜 막부를 궁지에 몰아넣으려는 조슈 번의 속셈이 숨어 있었다. 쇼군 이에모치는 천황 조정의 압박에 견디지 못해 5월 10일 양이를 단행하겠다고 천황에게 약속했다. 이것은 이미 열어놓은 수교와 통상을 중지하고 다시 쇄국 체제로 돌아가겠다는 것을 약속한 것으로 그 자체가 현실성이 전혀 없었다. 조정의 압박을 피하기 위한 임기응변에 불과했다.

조슈 번의 과격한 양이파는 천황 주변의 급진적 공경(公卿)과 짜고 막부를 타도하기 위한 천황의 조칙을 발표하도록 공작도 했다. 문제는 막부 타도가 고메이 천황의 뜻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즉 천황은 양이(攘夷)에 병적으로 집착했기 때문에 조슈 번이 양이 일변도로 나갈 때는 정치적으로 강력하게 지지했지만 막부가 없는 정치 체제에 대해서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 양이의 약속만 지킨다면 천황은 막부 체제의 존속을 원했다. 이것은 코메이 천황이 토막(막부 타도)이라는 변혁까지는 바라지 않았음을 의미했다.

그런데도 조슈 번은 양이의 날인 5월 10일 새벽, 시모노세키 해협에서 홀로 외국 선박에 대해 무차별 포격을 감행했다. 이날 시모노세키 해협을 통과하려다가 포격을 받고 혼이 난 선박은 미국 국적의 상선이었다. 미국 측이 가만있을 리 없었다. 다음날, 미국 군함이 보복 공격을 가해 조슈번의 포대를 쑥대밭으로 만들어 버렸다. 이 전투에서 조슈번의 군함 중 2척이 침몰하고 1척은 대파당했다. 나흘 후에는 프랑스 군함 2척이 시모노세키 해협에 진입, 맹렬한 포격을 가한 후 육군을 상륙시켜 해안 포대들을 점거·파괴하고, 민가도 방화하고 철수했다. 이 때문에 천황의 조정도 함께 위기에 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