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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굴 안에 사람들을 밖으로 꺼내는 것도, 동굴 밖에 사람들을 안으로 밀어 넣는 것도 하고 싶지 않다. 그냥 각자 속해야 하는 곳에서 지내도록 하고 싶은 것뿐이다. 간혹 고유성을 찾는 것이 동굴 안 사람들에 밖을 강요하는 것이 아니냐는 질문을 받는데, 동굴 안에 속하는 사람인가 밖에 속하는 사람인가가 가장 큰 고유성의 경계이지 않을까. 고로 내가 강요한다고 볼 수 있는 단 한 가지는 물고기에게 물이 필요한지 생각해 본다는 것, 호랑이에게 물속에 머리를 넣고 오래 있어도 갑갑하지 않은지 생각해 보라는 것이다. 누군가가 누군가에게 강요할 수 있는 딱 한 가지는, 네 자신에 대해 생각하고 찾으라는 것이라 생각한다. 생각하고 싶지 않다는 것도 생각을 해봐야 아는 것이다. 결국 생각하고 싶지 않은 나 자신도 고유성에 해당하며, 나는 그것이
제1회 컨템플레이티브: 내 고유성의 출현 비는 추적추적. 빗줄기가 굵어졌다 얇아졌다. 여러모로 불편한 날이다. 에어컨을 세게 틀어버린다. 어제 준비는 다 해놨지만, 몇 가지 재조정할 것들이 있어서 다듬었다. 스탭분들이 도착하기 시작한다. 담당하 실 일을 설명해드린다. 1시가 되고 나선, 괜히 왔다 갔다하면 나와 나의 성격을 아시는 부담이 될까 하는 노파심에, 시작 후 약 15분간 전시장을 느껴보다가, 내가 아는 사람들이 나를 못볼 수 있는 곳으로 몸을 숨긴다. 뭐 크게 드릴 것도 없는데 모여준 약 30여명의 스탭들이 너무 힘들지 않았으면 좋겠다. 아니 솔직히 말해서 너무 비현실적인 바람이지만, 스탭들도 관객분들과 함께 즐기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까지도 한다. 눈에 보이는 것을 생각하는 것과 편견은 가능성이 충분한 것을 불가
이해해 보려는 노력에서 나오는 깨달음이 있다. 자기 자신을 기준으로 삼는다면, 아마 누구나 다 점박이들 틈에서 살 수 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에서 오는 스트레스가 부정적이냐, 긍정적이냐, 아니면 자연스레 내 삶에 자리를 잡아 그냥 정보로서만 존재하느냐는 별개의 문제이다. 내 삶에 내가 존재론적으로 해야만 하는 일에, 타인의 점이 문젯거리를 주지 않는다면 딱히 반응하지 않는다. 그러나 어떤 이슈를 만든다면 나는 그 사람을 향한 나의 감상이나 관계성에 따라 철저하게 반응할 수 밖에 없게 된다. 감상으로 관계성이 설정되며, 관계성에서 또 다른 감상이 통제되는, 결국 무엇이 앞인지 뒤인지 따져볼 수 없는 기이한 순서를 경험하는데, 협업해야 한다는 마음에서 협업하게 되면 개인에 대한 사적인 감상 정도는 무시할 수 있게 된다.
나는 산책을 좋아한다. 사실 정확하게 이야기하면 내가 좋아하는 분위기의 장소에서 걷는 걸 좋아한다. 그곳은 인간이 존재하지만, 사람은 없는 곳, 문명의 흐름을 알 수 있지만 시간이 멈춘 곳, 정돈되지 않은 것과 정돈된 곳이 동시에 존재하는 곳, 소음 가운데 고요한 곳. 그런 아이러니한 장소에서 산책하는 것을 좋아한다. 존재론적 고찰을 한다. 거창한 것은 아니다. 나 자신과 대화하고, 나를 존재케 함에 질문을 던진다. 때론 비슷한 다른 존재가 대화에 참여하기도 한다. 생각보다 내게 큰 행복감을 주는 이 활동을 새로운 곳에서도 지속하고자 하는데, 방법을 아무리 모색해 봐도 같은 분위기를 낼 수가 없다는 걸 알았을 때, 나는 내가 만들어 보고자 마음먹었다. 나는 항상 이런 결론을 짓는다. 존재하지 않고, 내가 찾아갈 수 없다면, 내가 시작을
최근에 깨달은 게 있다. 나도 좀 놀아야 하고, 즐기면서 살아야 한다. 나도 일만 하다간 번아웃이 올 수도 있는 사람이란걸 깨달았단 소리이다. 이 무슨 당연한 걸 이렇게 늦게 깨달았나 싶지만, 나는 이전에 살던 도시에서는 일에서 힘든 것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나는 어차피 세상을 즐기려고 사는 사람이 아니라, 일만 해도 아무런 문제를 느끼지 못했다. 나를 가까이서 보는 사람들은 ‘너무 일만 하지 말고 좀 놀면서 해’를 반복적으로 이야기했는데, 나는 내가 왜 그래야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렇지만 보통 일만 하면 번아웃이 오고, 내 가까운 사람들은 내가 번아웃이 올까 봐 걱정한다고 생각해서 고맙긴 했지만, 나는 진정으로 괜찮았다. 체력적인 고갈이 아니다. 잠을 못 자거나 먹지 않으면 글씨 쓸 힘이 없어지는 게 사람이고, 나
<월간 컨템플레이티브 1:호불호>에는 빵을 싫어하는 줄 알았던 사람이 싫어하는 것이 아닌 '선'호하지 않는 것임을 깨달은 것에 대한 글이 담겨져있다. 요약하자면, 빵을 싫어한다는 말을 달고 살던 사람이 무심코 친구가 건낸 빵을 받아먹은 것에, 친구가 호기심에 질문을 하고, 자기 자신의 취향에 대해 재고찰하여 확립하게 된 것이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가 가진 느낌, 생각, 감정, 감상 등을 인지하며, 원인에 대해 궁금해하거나 원인을 알아야 할 필요성을 느낄 때, 스스로 왜라는 질문 던져보고, 가장 가능성이 높은 가설을 세워, 다른 요인들을 더하고 빼고, 실험하여 (보통은 경험이나 상상) 결론을 내린다. 내가 왜 이런 생각을 했지? 내가 왜 이런 감정을 느꼈지? 나는 왜 이런 것을 가치 있게 생각하게 되었을까? 진짜 궁금한 것을 정해 놓고, 가장
브런치 글을 현재에 맞게 재구성하였습니다. 일상이란 순간의 연속이다. 한 순간은 수많은 조각들로 구성된다. 나 자신을 잠시 떠나 그 순간을 재구성해 본다면, 우리 자신도 순간을 이루는 조각 중 하나가 된다. '나'라는 조각과 다른 조각들이 어우러져있다. 나 자신이란 조각은 다른 조각들을 체험한다. 그러니까 각자에게 일상은 '나'라는 조각이 그 순간을 구성하는 다른 조각들을 체험하는 일의 연속이다. 살아 있는 인간이라면 원치 않아도 이 순간의 연속에 참예할 수밖에 없다. 우리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그 순간 또한 순간이며, 그 순간을 이루는 '나' 이외의 조각들이 있고 우리는 그 조각을 체험한다. 그렇게 '나'의 조각은 한순간 한 순간의 본질이 된다. 이것은 거부할 수 없다.
지난 토요일에는 성수에 다녀왔다. 나에게 여의도 기준 동쪽은 먼나라, 특히나 성수 쪽은 방문할 때마다 사람이 북적였고, 딱히 그를 감수하고서라도 가야 하는 만족스러운 경험이 없었으므로, 특별한 일이 있지 않는 이상 굳이 에너지를 들여 가질 않는 지역이다. 눈여겨 보고있던 찻집이 있었음에도 갈 생각조차 하지 않은 동네였다. 그러나 이번엔 여러모로 의미있게 생각하는 것들 때문에 방문하게 되었는데, 그렇게 언 일 년간 눈으로만 보고 있었고, 마음으로만 먹고 있었던 찻집에 방문할 수 있게 되었다. 메인일정을 다 마치고 예약 시간이 되어 찻집으로 향했다. 찻집을 무슨 예약까지하면서 가냐 하겠지만, 찻집을 내가 눈여겨본 이유는 특색있는 주제로 구성되는 티 세레모니 때문이다. 티 세레모니, 직관적으로 무엇인지는 알겠는데, 경험을 해
많은 영화엔 악역이 존재한다. 이들이 악한 이유는 느낌으로 알 수 있지만, 굳이 명확하게 설명하자면 자신의 것을 추구하며 타인의 삶에 크고 작은 원치 않은 것들을 선사한다. 타노스의 '자원고갈 때문에 모두가 죽게 생겼으니, 생명의 반을 무작위로 없애 나머지 반이 풍요롭게 살자' 같이 때론 그 강요 자체가 목표가 되기도 하고, 권력을 얻기 위해 사람들에게 고통과 죽음을 주는 뻔한 악역처럼 때론 특정한 것을 추구하는 과정 속 일부가 되기도 한다. 그리고 그런 것들의 대부분은 통념상 부정적이라 분류되는 것들이며, 결국 악당은 애초부터 통상적인 기피 대상을 타인의 삶에 강요하기 때문에 우리는 묻고 따질 필요 없이 악한 축이라 생각하게 된다. 그들은 보통 자신이 이루고자 하는 것을 위해 계획을 세우고, 능력을 키우고, 주변에 모든 것
본 글은 브런치에서 연재되었던 글을 현시점에 맞게 각색하였습니다. 내가 사이코패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처음 한 것은 미국에서 대학을 다니던 유학생 시절이었다. 그 당시 나는 범죄학 관련 전공들이 많이 갖춰진, 뉴욕에 위치한 한 대학에서 법정/범죄 심리학(Forensic psychology)을 공부하고 있었다. (원래 나는 국제변호사가 되고 싶은 마음에 국제 형사정책학을 전공하고 있었지만, 일학년 이학기 때 사회학 101 수업이 너무 재미가 없게 느껴져서 그 학기가 끝난 후 바로 전공을 바꾸어 버렸다. 다행히 나는 바꾼 전공에는 흥미를 잃지 않고 무사히 졸업 후 관련 전공으로 대학원을 진학하였다.)
퇴근길, 동료와 배스킨라빈스에 들러 아이스크림콘을 하나씩 손에 든다. 그러다 문득 점심때 있었던 일이 생각이 났다. 나는 정적이 불편하지 않은 사람임에도 나의 머리 위에 크게 떠오른 몽그런 회상의 구름을 공유하고 싶었던 것 같다. '글이 잘 써지지 않을 땐, 카톡 창을 열고, 글의 주제나 흐름에 대해서 설명을 해. 그럼 그 주제에 대한 나의 견해가 확고해지고, 어떤 점이 당연한지, 어떤 점이 당연하지 않아서 설명이 더 필요한지, 알 수 있어서 좋아.' 라고 말한 뒤 오고 가는 몇 문장 후, 동료는 버스를 타러 간다. 나는 홀로 되어 생각을 이어 봤다. 나는 글을 쓸 때 뿐만 아니라 생각을 나누는 것을 좋아한다. 나와 같은 입장을 가지면 서로의 논리의 전개가 비슷한가 비교해보는 것도 재밌고, 이유가 다를 경우엔 또 다른 관점을 알 수 있으니 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