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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나의 혹독한 비판자

C는 이불을 동굴처럼 말아 안으로 들어간 다음, 한참을 울었고 나는 소파에 앉아 씩씩댔다. 1시간이 지나도 화가 가시지 않았다. 이런 상황까지 되어버려 화가 났고, C에게 지나치게 화를 낸 나에게도 화가 났다. 그러나 이런 와중에도 C가 잘못한 걸로 C를 겁줘서 내 뜻대로 하고 싶다는 마음이 깊숙이에서 스멀스멀 올라왔다. 작동하지 않는 브라우저와 모바일앱을 멍하니 클릭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들어가지지 않던 카톡이나 구글맵이 열렸다. 무슨 이유 때문인지 몰라도 차단 프로그램이 오작동을 일으켜 정상적으로(?) 애플리케이션들이 열리게 된 거다. 노트북은 불통이었지만 스마트폰은 멀쩡했다. 뭔가 프로그램과 동기화가 안 된 것 같다. 프로그램을 활성화하라는 알림 메시지가 폰으로 왔다. 나는 조심스럽게 알람을 끄고 C를 살펴보았다. C는 여

9. 마지막 편 : 기억에 남는 거라면

여행을 하고 나면 보통 뭐가 가장 기억에 남을까? 우리는 여행을 흔히 그곳에 있는 명소, 유적, 자연경관을 보러 가는 일이라고 생각하지만, 겪어보면 안다. 막상 여행을 다녀오고 나면 눈으로 본 건 금세 기억에서 희미해진다. 눈으로 본다는 건, 보는 ‘대상’이 있다는 말이고 ‘나’라는 주체의 시선을 전제로 한다. 그런데 내 몸으로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고서 ‘시각’을 이용해 그저 가만히, 어떤 대상을 바라보는 일은 사실은 인류사에서 매우 낯선 행위이기도 하다. 모두 18세기 중반 유럽에서 자본주의의 발전과 함께, 그리고 도시와 제국주의의 확장으로 인해 생겨난 일이다. 미술관, 박물관, 영화관, 거리의 아케이드에서 진열된 예술품이나 물건을 보러 굳이 그 장소까지 가는 것. 이건 인간에겐 당연한 태도가 아니다. 어떤 시대에 특수하게

7. 내 발등 내가 찍고

숨은 로컬 맛집이라는 작은 가게에 들어가 볶음밥과 덮밥을 주문하고 기다리고 있었다. 뒤쪽에서 한국어 말소리가 들려서 뒤돌아보니, 엄마와 아이가 음식점으로 들어왔다. 아이는 자리에 앉자마자 물었다. "와이파이 있어?" "여긴 없을걸?" 나의 맞은편에 앉아 있던 C는 모녀가 들어올 때부터 둘을 유심히 지켜보고 있었는데, 그 아이의 대답을 듣자 입꼬리를 쓱 올리며 씁쓸하게 웃었다. 자리에 앉아 엄마는 아이에게 뭘 먹을지 물어봤다. '볶음밥 먹을래?" "싫어" "팟타이 먹을래?" "싫어" "그러면 망고주스 시킬까?" "싫어." 아이 엄마는 맥주가 있냐고 물어봤다. 식당 주인은 없다고 했다. ** C는 일행을 쳐다보며 아이의 대답에 계속 오묘한 미소를 지었고. 나는 C의 표정을 짓궂게 쳐다봤다. 나는 C에게 말했다. "어디선가 많이 본 거 같지 않아?" "응.

6. 남는 건 사진 뿐

느슨하고 여백 있는 여행을 해보겠다던 망상을 버렸다. 여행자이자 관광객으로서의 액티비티에 충실했다. 그랬더니 비로소 여행의 패턴이 잡혔다. 활동하고 먹고 휴식하기로 하루가 돌아갔다. 안 되는 건 빨리 포기하고 할 수 있는 걸 해야 한다. ** C와 가게 된 두 번째 투어는 쿠킹 클래스였다. 치앙마이에서 쿠킹 클래스는 많은 사람들이 강추하던 거라 망설임 없이 신청했다. 숙소 앞으로 픽업을 왔고 상당히 쾌활한 가이드가 차량에 탑승했다. 첫 코스로 식재료를 파는 시장을 보여주면서 팟타이나 커리에 들어가는 향신료, 소스, 야채를 설명해 줬다. 차를 타고 시외로 조금 나가자 쿠킹클래스를 운영하는 큰 농장과 조리장 같은 곳이 나왔는데 깜짝 놀랐다. 이제까지 접해온 치앙마이 관광지의 허술함과는 차원이 다르게 럭셔리하고 깔끔했다. 투

5. 투어만이 살 길

드디어 고대하던 한국어 가이드 투어 날이다. 대학에서 한국어를 전공했다는 현지인 가이드의 한국어 발음이 알아듣기 쉬운 편은 아니었지만 영어보단 당연히 나았다. 그러나 한국인들과 함께하는 투어는 편한 만큼 따라오는 불편함도 있었다. 작은 승합차 안에서 듣고 싶지 않은 남들의 가족사까지 다 듣게 된다는 것. 유달리 조용한 앞자리 승객들 덕분에 나는 뒷자리에 앉아 있던 사람들의 수다와 말다툼까지도 듣고 말았다. 아이들과 3-40대로 보이는 부부와 그들의 형제자매와 부모님까지 동반한 여행이었다. 내 뒷자리에 앉은 분들은 태국의 정치와 종교와 물가와 골프코스 추천을 한 시간 내내 이야기했고 아이들은 지루하다고 몸을 꼬면서 징징거리고 있었다. 이 가족 역시 여행의 일정과 분위기와 가족의 기강(?)을 바로잡으려고 노력하는 건 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