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불호가 심하게 갈린다더니 영화를 보자마자 대번에 이해가 되었다. 솔직히, '호'의 영역은 아주 작고 '불호'의 비중이 더 큰 것 같다. <조커 : 폴리 아 되>(2024, 이하 '조커 2')를 보면서 딱 하나 마음에 들었던 장면은 할리 퀸젤이 아서 플렉의 면회를 가서 립스틱으로 조커의 미소를 되찾아주는 부분, 그 기술적 측면 하나였다. 카메라의 초점을 이용해 재치 있게 조커를 표현한 것도 재밌었지만 무엇보다 그 장면을 제대로 찍기 위해 호아킨 피닉스가 고개를 얼마나 맞춰야 했을지 상상이 돼서 더 흥미롭게 다가왔던 것 같다. 물론, 흥미는 거기서 끝나 버리긴 했지만. 영화의 전반적인 스토리 구성은 나쁘지 않다. 문제는 군더더기다. 시작부터 '오이디푸스 공연을 몇 번이나 보러 갔다'는 극중극 인물의 대사처럼 '조커와 할리퀸이 어떻게 붙어먹게 됐는지
한 달 전쯤, 배우를 꿈꾸고 있는 친구가 독립 영화에 출연했다는 소식을 듣고 지역 소극장에서 영화제를 관람하고 왔다. 보통의 저예산 영화들이 모두 겪듯 열악한 환경에서 최소한의 완결성을 마무리지으려는 노력이 돋보이긴 했다만, 대중에게 선보이기에는 다소 부족함이 있는 작품이었다. 그래도 처음 시작하는 사람들에게 나는 비판보다는 응원의 마음으로 단점을 최대한 배제하고 가능성에 포커스를 둔 채로 GV시간에 질문을 던졌다. 배우들끼리 합심해서 만든 작품이니만큼 처음부터 배우들의 연기에 관심을 갖고 작품을 지켜보기도 했고 말이다. 영화에 관해서 몇 차례 질문이 오간 뒤에 생애 처음으로 배우 이름을 걸고 무대로 올라온 친구에게 내가 던진 질문은 그것이었다. 앞으로 어떤 연기를 하는 배우가 되고 싶냐고. 당장은 극의 주제나 분
<아메리칸 셰프>(2015)를 보면서 가장 좋았던 점은, 아들에게 자신의 한계나 부족함을 숨기지 않는 주인공의 모습이었다. 물론 아빠와 아들이 소원한 사이를 극복하고 둘도 없는 진짜 가족이 되는 그 서사에도 감동은 있지만 자기 모습을 감추지 않고 날것으로 다가가는 칼의 솔직함이 더 매력적으로 다가왔던 것 같다. 못난 모습 보이지 않으려고 괜히 더 체면을 차리고, 자식에게 부족함 느끼지 않게 하려고 먹을 것, 입을 것 참아가며 인내하던 부모님들의 모습을 기억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칼의 솔직함은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올 수도 있다. 아들에게 비평가에게 안 좋은 소릴 들은 이야기부터 이혼한 아내와의 불편한 관계 때문에 함께할 수 없다는 말까지 별 이야기를 다 꺼내놓는다. 그래도 그의 솔직함이 유쾌하게 느껴지는 것은, 그게 적어도 가식은
*본문에 <흑백요리사> 1화~4화까지의 내용이 일부 있습니다. 흙수저론이 대두될 때부터 느껴왔던 것이지만 우리나라 사람들은 계급 나누는 걸 참 좋아한다. 학창 시절부터 입시 성적으로 이마에 등급을 받는 그런 시스템 속에 살아왔으니 어쩔 수 없는 노릇이라고 쳐도, 선민의식을 가지고 동네 이웃들끼리도 시답잖은 일로 차별하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가끔 헛구역질이 나올 때가 있다. 짐작했겠지만 나는 밑도 끝도 없는 계급론을 싫어하는 편이며, 이런 걸 대놓고 주창하는 프로그램들에게는 당연히 일단 선입견을 갖고 시작한다. 첫인상을 망쳐버린 사람이 끝내 인상을 바꾸는 게 무척 힘들듯이 이들 프로그램이 호평을 받으려면 그 과단성만큼이나 대단한 각오는 해야 한다고 여긴다. 그래서 단상 위로 솟은 스타 셰프들 발바닥에 깔린 '흑수저'
*본문에 <베테랑 2>와 <무도실무관>의 결말에 대한 언급이 있습니다. <베테랑 2>(2024)를 보면서 기시감을 느낀 관객이라면, 그것은 전작인 <베테랑>의 영향이 아니라 2000년대 초반 센세이션을 일으켰던 만화 <데스노트>(2004)를 기억하고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일 것이다. 영화의 구성, 메시지, 캐릭터까지 이 작품은 여러모로 <데스노트>를 그대로 답습한다. 극중에 짧은 인서트로 마이클 샌댈의 『정의란 무엇인가』를 비추며 작품의 근원이 '트롤리 딜레마'에 있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기는 하지만, 아무래도 내게 이 영화는 <데스노트>의 현대판 각색처럼 보인다. 이름만으로 사람을 죽일 수 있는 노트를 중범죄자 처형에 쓰기로 한 주인공, 목적달성을 위해 '키라'라는 본래의 신분을 숨기며 경찰에 근무하는 아버지의 정보를 마음대로 탈취하는 것, 일본 전국 1
나는 글쓰기를 할 때 생각을 꽤 오랫동안 전개한 뒤에 펜을 쥐는 스타일이다. 올해 당선된 신춘문예 평론도 생각은 거의 1년 가까이해오다가 마감일 2주 전에 부랴부랴 시작해 완성한 것이었다. 마감을 하루 앞두고도 글을 마무리 짓지 못해서 '아, 아무래도 힘들겠다'며 울먹이기까지 했지만 1년 동안 생각한 것을 2년으로 늘리고 싶지 않은 마음에 어떻게든 마감을 향해 달렸던 것 같다. 요즘은 글 한 편을 가지고 1년씩이나 생각할 겨를도 없기는 하지만, 원래는 그런 사람이었다. 작가들은 모두 글쓰기 스타일이 다르다. 나처럼 생각만 오래 하다가 글 쓸 때가 되면 부랴부랴 일필휘지로 휘갈기는 사람도 있는가 하면 약속이라도 한 듯 정시에 꾸준히 글을 내놓는 사람, 공장의 컨베이어 벨트에서 찍어내듯 무한한 상상력으로 글을 쏟아내는 사람, 한 땀 한
폐위될 위기에 처한 왕비가 그동안 자신을 감싸주던 왕이 대역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 어떻게 반응할까. 영화 <광해 : 왕이 된 남자>(2012)를 보면 말미에 정체가 탄로 난 광대 하선에 대해 묻던 중전이 그의 사후처리를 도승지에게 묻는 장면이 나온다. '용상에 앉은 저 천한 것을 그냥 살려둘 수는 없지 않겠소?'라는 살벌한 임금의 전언을 이미 전해 들었지만 차마 고해 올리지는 못하고 도승지 허균은 묵묵부답으로 결과를 들려준다. 왕과 사대부들 간의 피 말리는 정쟁에서 일어난 작은 해프닝으로 치부하거나, 살벌한 왕가 권력 쟁탈전 속 으레 일어날 법이라며 무시하고 지나갈 법도 하지만, 중전은 비천한 광대의 안위를 걱정한다. 어찌 보면 자신을 속이기도 했고, 귀천이 있는 신분 사회에서 천 것이 고귀한 자신과 말을 섞었다는 것만으로도 불경하
영화나 드라마를 볼 때 재미있는 팁 하나를 알려주자면(사실 팁이라고 하긴 뭣하지만), 극중 인물들이 타는 차량을 유심히 보고 대충 누가 다치고 누가 죽을지를 예측할 수 있다. 하다 못해 차량의 주인에게 '무슨 일이 나겠구나' 하는 정도는 알 수 있다. 요즘은 영화든 드라마든 차량을 동원한 액션 신이 많고 카체이싱 장면도 많이 찍기 때문에 제작 단계에서부터 '부술 차량'을 미리 물색해 두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 됐다. 아슬아슬한 추격전 끝에 차량끼리 부딪혀서 반파가 되는 흔한 장면을 떠올려보자. 꼭 보면 심하게 부서지는 차량들은 연식이 꽤 오래됐거나 구형 모델인 경우가 많지 않았나. 아무래도 한 장면 찍자고 소모품처럼 쓰이는 차량이다 보니 중고차 시장에서 '극의 몰입은 방해하지 않되 최대한 싼' 것을 선택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왠
*드라마의 전반적인 내용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시청 후 감상을 권합니다. 어릴 적 비 오는 길을 걷다가 물웅덩이를 밟고 지나간 차 때문에 하얀 바지가 다 젖은 적이 있다. '앗 차거!' 하는 사이에 웅덩이를 밟은 차는 따질 새도 없이 멀찍이 떠난다. 아니, 그보다 번호판을 봤어도 어린 내가 운전자에게 가서 뭘 따지겠는가. 집에 돌아와 어머니에게 어디서 이렇게 바지를 엉망으로 만들었냐며 꾸중을 들으면 내가 한 일도 아닌데 괜스레 억울한 마음만 든다. 핑계가 된 것 같기도 하고, 사정을 자세히 말해보아야 달라질 것은 없다는 생각도 든다. 그저 '그 길을 지나가지 말았어야 했다'는 생각만이 머릿속을 휘저을 뿐. 넷플릭스의 신작 미니 드라마 <아무도 없는 숲 속에서>(2024)의 주된 이야기는 빗길에 바지가 젖은 내 어린 날의 일화와 비슷한 느낌을 준
최근 최민식 배우의 '영화표 가격 너무 비싸다' 발언이 화제가 된 연유는 모두가 속으로만 품고 있던 생각을 영화계 대배우가 직접 총대를 메고 표현한 상황 그 자체에 있을 것이다. 영화가 그럭저럭 재밌으면 모르겠지만 기대와는 달리 실망이 큰 경우 영수증만 보고 있어도 짜증이 날 수밖에 없다. 귀중한 휴식 시간을 꼼짝없이 날린 것도 화가 날 판에 가격까지 제대로 치렀다면 유명 관광지에서 알맹이 하나 없는 맹탕에 호갱을 당한 것처럼 허무하기까지 할 터. 욜로족이 가고 요노족이 온다는데, 지갑이 얇아진 주 수요층 젊은 사람들에게 영화 푯값은 더 큰 장벽으로 다가온다. CGV 기준 일반 영화 상영관 관람은 만오천 원. 통신사 혜택을 받으면 4천 원 정도의 할인 혜택을 받을 수 있지만 VVIP가 아닌 경우에는 횟수에 제한이 있으며 각종 카드사 할인
스티브 잡스가 생전에 'A급 직원'에 관한 질문을 받은 영상을 흥미롭게 봤다. A급 직원은 어떤 사람이고 B급, C급, 그보다 못한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일을 기막히게 잘하는 사람? 아니면 일을 정말 못하는 사람? 그의 생각에 소위 톱클래스라고 하는 사람들의 특징은 일을 성실하게 한다거나 열심히 한다거나 하는 것과는 크게 관련이 없다. 그들의 주된 특징은 '주도적 만능'이라는 것이다. 과업이 주어지면 목표를 달성할 뿐, 딱히 매니징 할 필요도 없고 그들 스스로가 언제나 최상의 결과를 추구한다(그렇기에 성실하다). 그리고 그런 A급 직원들은, 자신들과 같은 능력치를 가진 A급 직원들과 함께 일하기를 원한다. 서로가 서로를 알아볼 수 있는 실력자들이 모여 시너지를 내니 잡스는 관리자로서 사람을 다루는 일에만 집중할 수 있었다고 말한다. 사실
'베리타지움(Veritasium)'의 유튜브 영상 중 '1조 달러 방정식'을 보다 보면 '갈튼 보드'에 대한 이야기가 잠깐 나온다. 갈튼 보드는 수학의 통계 부분에서 '정규분포'라고 하는 오목한 동산 모양의 그래프를 눈으로 직접 확인할 수 있는 도구로 수천 개의 쇠구슬이 마치 플링코 게임처럼 장애물에 부딪혀 두 갈래 길로 떨어지게 된다. 구슬은 장애물에 부딪힐 때마다 50% 확률로 한 가지 길을 선택하고, 각 라인은 한 층계를 내려올 때마다 장애물이 하나씩 추가되어 라인이 추가된 숫자만큼 장애물도 늘어난다. 신기한 건 각자의 구슬이 어느 위치에 최종적으로 떨어질지 알 수 없는데도 항상 결과는 약속이라도 한 듯 정규분포의 모양새라는 것이다. 가운데에 가장 많은 구슬이 몰리고 양 끝단으로 갈수록 구슬의 개수는 현저히 적어진다. 무슨 쇠구슬이 어떤 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