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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시] 13. “자네, 혹시 삼계탕 좋아하나” 14. “걔들도 힘들었대, 하고 적혀 있었다”

2024.07.09. 오후 6:10

13. “자네, 혹시 삼계탕 좋아하나”

학위논문 자료를 수배하다

석사 3기, 2009년 어느 늦은 봄날에, 나는 이틀간의 휴가를 내고 경기도의 작은 박물관을 찾았다. 석사학위논문에 쓸 자료 B를 찾기 위함이었다. 아직 발굴된 자료가 아니었고, 그에 따라 학계에서도 그저 이런 책이 있다더라, 하는 언급만 있었다. 하지만 내가 쓰고자 하는 주제와 직접적으로 관련된 자료였고, 만약 책을 발굴해낸다면 무척 의미 있는 논문을 쓸 수 있을 것이었다.

보통 석사 논문에는 누구도 큰 기대를 하지 않는다. 학술적 기여도를 따지는 것은 박사 논문부터고, 그가 연구자의 깜냥을 갖추고 있는지, 요즘 젊은 연구자들의 경향이 어떤지를 참조하는 지표로 이용되는 정도다. 하지만 그와는 별개로 누구나 잘 쓰고 싶은 욕심이, 학계에서 한 번쯤 문제적인 논문이 되길 바라는 욕망이, 있다. 나 역시 그랬기에, 세상에 없는 책을 찾아보겠다고 나선 것이었다. 괜한 시간낭비일 확률이 높았다. 하지만 그래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내 청춘을 바쳐 쓰는 한 편의 승부인데, 작은 후회를 남기고 싶지 않았다.

박물관의 전경은 생각보다 아담했다. A와 관련된 자료만을 소장한 개인 박물관이었기에 큰 규모가 아닐 것이라고는 생각했지만, 예상보다도 더 작았다. 심호흡을 한 번 하고, 초인종을 눌렀다. 소녀의 기도 멜로디가 반쯤 올렸을 때, 중년의 여자가 누구세요, 했다. 누구, 라고 대답해야 할지, 이렇게 초인종으로 대면할 것이라고 생각지 못했기에 무척 당황스러웠다. 잠시 정신을 놓았다가 네, 저는 모 대학에서 A에 대해 연구하고 있는 대학원생입니다, 논문을 위해 자료를 찾고 있는데 도움을 얻을 수 있을까 해서 왔습니다. 했다. 딱히 대답이 없다가, 몇 초의 시간이 흐른 뒤 문이 열렸다. 외부의 누군가에게 나는 언제나 타인의 입을 빌려 ‘잡일하는 아이’로 소개되었고, 이처럼 연구자로서 자기 고백을 해보기는 처음이었다. 돌계단을 오르는 발걸음이 무척 무거웠다.

중년의 여성이 자리에서 일어나 내게 적당한 경계심이 섞인 인사를 보냈다. 내가 인사하자 그녀는 어떻게 왔는가를 정식으로 물었다. 그래서 나는 석사학위논문을 준비 중인 모 대학의 대학원생인데 어떤 책을 소장하고 계시면 도움을 좀 받고 싶다고 대답했다. 그녀는 잠시 인상을 찌푸리더니 잠깐 계세요, 하고 ‘관장실’에 들어갔다. 아마 근무자는 그렇게 두 사람인 듯 싶었다. 나는 기다리며 박물관 내부를 천천히 살폈다. 대부분의 공간이 서가로 되어 있고, 내가 평소에 보고 싶어 했던 여러 책들이 가득 꽂혀 있었다. 돈을 주고 살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복사된 것만도 수십만 원을 호가하는 그런 책들이었다. 원본보다는 복사본이 많았지만, 복사본조차도 흔하지 않은 자료들이어서 나는 그저 그 자체로 무척 행복했다. 그러다가 그녀, J 선생이 나에게 들어오세요, 했다. 나는 비로소 박물관장과 대면할 수 있었다.

대단히 나이가 많은, 팔순도 넘었을 거야, 싶은 노인이 힘겹게 의자에 앉아 있었다. 꽤나 큰 체구였고, 백발과 뿔테 안경이, 그리고 정갈하게 갖추어 입은 양복이 인상적이었다. 그 뒤로는 3단짜리 책장이 하나 있었는데, 언뜻 봐도 밖의 자료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가치 있는 것들이었다. 특히, 오래된 책에서 나는 그 매캐한 냄새, 그것이 자욱하게 방을 채우고 있었다. 그래, 어떤 책이 보고 싶어서 왔다고 했나, 하는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들렸다. 나지막하고 느리지만, 힘이 실려 있었다. 나는 정말이지 90도로 인사를 했다. 그리고 나는 A를 연구하는 대학원생인데, 그 관련 자료인 B를 찾고자 한다. 여기까지는 J 선생에게 말한 바와 같았다. 하지만 한마디를 덧붙였는데, A는 아직 제가 공부하는 분야에서 다루어진 바가 없지만 저는 그것이 대단히 중요한 주제라고 생각한다, 만약 자료를 찾는 데에 도움을 주시면 꼭 A 연구에 보탬이 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 는 내용이었다. 그렇게 이야기하고 대답을 기다리는데, 그가 웃었다. 소리내어 웃은 것은 아닌데 분명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고 나는 기억하고 있다.

C 관장은 내게 소파에 앉을 것을 권하며 먼저 마주 앉았다. 그리고 긴 이야기를 시작했다. 내가 이북에서 내려올 때 이야기네, 그때는 나도 젊었고, 자네도 알 만한 K 선생과 동행했지, 함께 내려와서 자리를 잡았어. 그의 이야기를 듣다가 나도 모르게 몰래 휴대폰의 녹음 버튼을 눌렀다. 그도 그럴 것이 도저히 혼자 듣고 있을 수 없을 만큼, 사료적 가치가 있는 구술이었다. 내가 어릴 때, 아침에 눈을 뜨면 마당에 〈매일신보〉가 있었고, 나는 4면의 소설을 읽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했지, 그때는 눈도 참 좋았어. 아쉽게도, 급히 누른 녹음 버튼은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고, 그가 30여 분에 걸쳐 한 구술사는 그저 내 추억으로 남고 말았다. 그리고 끝내 그는,

“그 자료는 아마 이 뒤 책장에 있을 것이네, 누가 찾아왔다고 보여 주고 하지는 않는데 자네가 마음에 들어.”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