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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기의 시절 리뷰] 줬다는 마음도 없이 줄 수 있을까

이슬기 칼럼 마지막 화 – 『줬으면 그만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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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롱과 조리돌림이 일상에, 자칫 잘못하면 여지없이 ‘나락’ 가는 시대에, ‘가지 않은 길’에 대한 기회비용이 너무나도 큰 세상에서 ‘살아 움직이는 사회보장제도’의 존재가 마음 한 켠을 여지없이 데운다. (2024.07.25)


세상의 행간을 읽는
이슬기 기자의 콘텐츠 리뷰.

갓 직장인이 됐을 때였다. 대학 내내 부모님 용돈을 받던 나는 당시 대학에 다니던 동생에게 용돈 조로 한 달에 10만 원씩 보냈다. 어느 날 엄마가 전화가 왔다. 용돈을 매달 며칠에 부치냐는 거였다. “몰라… 생각날 때마다?” 침묵이 흘렀다. “돈 받는 사람은 그날만 기다린다. 정해진 날짜에 딱딱 줘야 그날에 맞춰 자금 운용을 하지.” 전화를 끊고 한동안 나의 입은 ‘댓 발’ 나와 있었다. ‘아무튼 내가 주는 게 어디야’ 하는, ‘주는 이’ 특유의 오만함이었다. 하나밖에 없는 동생에게도, 그렇게 됐다.

지난해 11월 개봉해 3만 관객을 끌어모은 다큐멘터리 <어른 김장하>의 주연, 김주완(60) 작가의 책 제목은 『줬으면 그만이지』다. ‘아름다운 부자 김장하 취재기’라는 부제가 달린, <어른 김장하>의 책 버전이다. 놀랍도록 빨리 ‘멘토’라 불리는 선생의 자리에 오르지만, 하루아침에 ‘나락’ 가는 것이 요즘 세태다. 멘토라는 권위에 의존해 그의 말을 잠언처럼 믿고 따르지만, 폭로가 터져 나오면 언제 그랬냐 싶게 “뭔가 쎄했다(싸했다)”며 비난의 손가락질도 쉽게 꽂힌다. 이렇게 마음을 믿고 맡겨 사랑할 존재란 점점 더 희귀해져 간다. 그런 세상에 사람 이름 앞에 대놓고 ‘어른’을 붙인 다큐와 “줬으면 그만”이라는 제목의 책이라니. 다른 의미로 동생에게 “줬으면 그만”이었던 나는 ‘어른 김장하’를 두 번 보고 두 번 다 울었다.

『줬으면 그만이지』는 <어른 김장하>에 나오지 않는 ‘왜?’에 보다 주목하는 저작이다. 경남 사천과 진주에서 한약방을 운영해 번 돈으로 학생 1000여 명에게 장학금을 준 사람, 진주 명신고등학교를 설립해 국가에 환원한 사람, 은퇴하며 남은 전 재산 30억 원 마저 경상국립대에 기부한 사람, 그러나 인터뷰는 한사코 사양하는 사람이 김장하(80) 선생이다. 초등학교 때부터 알고 지낸 죽마고우(최관경 부산교대 명예교수) 조차 ‘무주상보시’(無住相布施·줬다는 마음도 없이 베푸는 보시)라고 말하는 이의 삶은 어떻게 축조됐을까. ‘줬으면 그만이지’는 그의 글과 행적, 주변인들 증언을 통해 이를 하나하나 되짚어 나간다.

선생은 중졸 학력으로 1962년 미성년의 나이에 한약업사 시험에 합격했다. 그를 한약방으로 데려간 이는 한학자였던 할아버지였다. ‘사람은 마땅히 올바른 것에 마음을 두어야지 재물에 얽매여서는 안 된다’고 가르쳤던 할아버지를, 손자는 평생 삶의 지표로 삼았다. 그는 한약방에서 아픈 사람들에게 번 돈으로는 내가 아닌 남을 위해 써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렇게 자신이 진학하지 못했던 고등학교를 직접 설립했다. 한약방을 메운 장서들을 탐독했던 독서가이면서, 1990년대 50대의 나이에 컴퓨터 학원에 다니며 웹페이지를 개설한 ‘얼리 어답터’이기도 했다.

그의 무주상보시, 『줬으면 그만이지』는 장학금을 받았던 학생들이 증언한다. 고교 3년과 대학 졸업 때까지 ‘김장하 장학금’을 받았던 권재열 충남대 의대 교수는 말한다. “제가 도움을 받는 입장이었지만 그게 전혀 저를 위축시키지 않았어요. 혹시라도 그럴까 봐 선생님이 배려를 해주신 덕분인 것 같아요.”(153쪽) 세 달에 한 번 한약방을 찾아가 인사를 드리고 필요한 학비를 말하면, 그는 묵묵히 돈을 건네는 것 외에 그 흔한 훈수 한 번 두지 않았다고 한다. ‘김장하 키즈’들이 입을 모아 하는 얘기다.

장학금 수혜자 가운데는 민주화운동으로 옥고를 치른 이도 있었다. 선생은 “그 또한 사회에 기여하는 길”(152쪽)이라며 오히려 격려했다. 이를 두고 김주완이 물었다. “선생님 연배의 사람들은 보통 반공 또는 보수적이잖아요?” “어릴 때부터 좀 반항 의식이 강했다고 할까? (중략) 그때(4.19) 내가 학교에 다녔다면 데모를 했겠지.”(305~307쪽) 약방에 앉아 신문을 꼼꼼히 읽어 내려간 그는, 신문에 적히지 않은 행간도 스스로 헤아려가며 읽었다. 세상 돌아가는 사정을 좁은 약방에서 꿰뚫어 보던 그는, 자신이 못한 일을 민주화 운동하는 학생들이 대신 해주는 것이라 여겼으리라.

<어른 김장하>가 선생을 취재하는 김주완을 따라가는 김현지(43) 경남 MBC PD의 시선이라고 한다면, 『줬으면 그만이지』는 경남도민일보 기자 출신의 작가 김주완이 쓰는 ‘김장하 유니버스’ 다. 인터뷰를 마다하는 선생이기에, 책은 당사자 인터뷰 없이 그의 자장에 있는 인물들 얘기로 뻗어간다. 지나치게 꼼꼼한 탓에, 때로는 샛길이 과하다 싶을 때도 있다. 선생이 설립한 명신고의 기증물품 대장과 시민사회단체들이 선생을 위해 몰래 연 생일 잔치의 시간별 행사 계획서도 모조리 옮기는 식이다. 그러나 이 충실한 기록자가 선생이 운영하던 천리안 웹페이지를 미리 백업해 둔 덕분에(결국 그 웹페이지는 폐쇄되어 사라졌다) 우리는 선생이 쓴 북한 여행기와 ‘진주 정신에 관한 소고’ 등의 논문도 볼 수 있다. 선생의 궤적을 좇는 김주완의 성실성에 더해, 너나 할 것 없이 나서 선생을 증언하고 싶어 했던 김장하 자장 안에 있는 사람들 선의가 모여 ‘줬으면 그만이지’가 탄생했다.

지역 신문과 극단, 서점 살리기에도 열심이었던 선생이었기에 진주 역사의 여러 장면에서 그의 사진을 흔히 볼 수 있다. 그 중 가장 인상 깊은 것은 가정폭력 추방 캠페인 한복판, 여성들 가운데 홀로 서 있는 ‘남성’ 김장하다. 호주제 폐지 찬성 운동과 함께 가정폭력 피해 여성들을 위한 쉼터 건립에도 선생은 크게 기여했다. “그런 인식(남존여비)이 경상도 남자는 더했는데, 김장하 이사장님은 ‘여성도 인간이다’ 거기서부터 출발을 하시더라고요.”(정행길 전 진주가정폭력상담소장, 266쪽) 선생이 제일 좋아했다던 진주 형평운동의 메시지, ‘공평은 사회의 근본이요, 애정은 인류의 본량이라’가 그의 삶 전반에 편견 없이 흐르고 있음을 알 수 있는 모습이다.

<어른 김장하>로 백상예술대상 TV 부문 교양 작품상을 받은 김현지 PD는 선생을 일컬어 “살아 움직이는 사회보장제도”라 했다. 48년간 운영했던 남성당한약방이 2022년 5월 폐업하던 즈음 찾아온 ‘김장하 키즈’ 김종명 씨는 “선생님 장학금을 받고도 특별한 사람이 못 되어 죄송합니다”라고 했다. 선생은 말했다. “그런 걸 바란 게 아니야. 우리 사회는 평범한 사람들이 지탱하고 있는 거야.” 그 어느 때보다 빛나는 부를 거머쥔 반면으로 회복 탄력성이 떨어지는 시대에 나를 평가하지 않는 뒷배, 대입 재수를 하는 학생에게도 민주화운동을 하는 이에게도 똑같이 든든했던 ‘뒷배’의 너른 품이다.

이런 뒷배를 둔 이의 품 또한 너르게 될 수밖에 없다. 실패를 무릅쓰고서라도 무언가에 ‘엄두’를 낼 수 있는 도량을 지니게 되기 때문이다. 조롱과 조리돌림이 일상에, 자칫 잘못하면 여지없이 ‘나락’ 가는 시대에, ‘가지 않은 길’에 대한 기회비용이 너무나도 큰 세상에서 ‘살아 움직이는 사회보장제도’의 존재가 마음 한 켠을 여지없이 데운다. 줬다는 마음도 없이 주고, 받았다는 마음만 안고 다시 줄 수 있기를. 그런 세상의 가능성을 희구하며 책장을 다시 펼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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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이슬기 기자

글 쓰고 말하며 사는 기자, 칼럼니스트. 1988년 대구 출생, 창원 출신. 한양대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했다. 《서울신문》에서 9년간 사회부, 문화부, 젠더연구소 기자로 일했다. 현재는 프리랜서 기자로 《오마이뉴스》에 〈이슬기의 뉴스 비틀기〉를 연재 중이다. 여성의 눈으로 세상의 행간을 읽는 일에 관심이 많다.

줬으면 그만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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