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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초엽의 창작과 독서] 얼렁뚱땅 논픽션 쓰기 (3)
<김초엽의 창작과 독서> 8화
김원영 작가와 읽은 자료들을 공유하며 목차와 각 장의 개요를 잡아나갔다. 목차와 전체 구조는 초고를 쓰는 과정에서 여러 번 바뀌었는데, 독자들에게 낯설게 느껴질 주제를 다루는 책을 끝까지 읽게 만드려면 무엇보다 글의 흐름이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2022.06.15)
본격적으로 자료조사에 들어가던 당시 나는 치앙마이에 있었다. 태국 북부의 도시, 1월에도 한여름 기온을 자랑하지만 비는 한 방울도 내리지 않는 곳. 여름을 사랑하지만 여름의 동반자 장마는 끔찍하게 싫어하는 나에게는 정말 천국 같은 곳이었다. 치앙마이에서 겨울을 보내며 글을 쓰겠다고 계획한 건 한참 전이었는데, 사실 <사이보그가 되다> 프로젝트를 여태 못 끝내리라고는 생각도 못하던 때 세운 계획이었다. 미팅과 강연으로부터 해방된 먼 타국에서, 녹음 우거진 창밖을 이따금 내다보며 여유롭게 장편소설을 쓰고 있을 줄 알았는데. 현실은 와장창. 아직 자료조사도 시작 못 한 논픽션 원고를 백지부터 채워야 했다.
그래도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치앙마이는 오래 머물기는 좋지만 구경거리는 많지 않은 곳이어서 일주일쯤 지나니 관광 레퍼토리가 다 떨어졌다. 그 무렵 숙소 가까운 코워킹 스페이스, 그러니까 일종의 공유 작업실을 하나 발견했다. 카페와 비슷하지만 컴퓨터 작업에 적합한 책상과 의자, 콘센트 등을 갖춘 곳이었다. 내가 갔던 곳은 좀 특이한 서비스도 있었는데, 삼십 분마다 재스민 티와 물 주전자를 든 친절한 사장님이 나타나 책상 위 물잔이 절대 비지 않도록 채워주시는 거였다. 의도하신 건 아니겠지만 딴짓을 덜하게 되고 잠이 깨는 효과가 있었다. 왠지 나를 제외한 방문자들은 대부분 IT 개발자였는데, 다들 작업에 몰두하고 있어서 집중하기 좋은 분위기였다.
작업실로 출퇴근하기 시작하면서 여행은 금세 일상의 영역으로 들어왔다. 아침 햇살에 눈을 뜨면 오픈 시간에 맞춰 작업실로 달려가 자리를 잡고, 두 시간쯤 일을 하다가 간단한 점심을 먹고, 또 저녁까지 일을 하고, 저녁을 먹고 다시 돌아와보면…… 어느새 같은 공간을 쓰던 사람들은 모두 퇴근하고 나만 남아 있었다. 그런 날이 몇 번 반복되고 나서야 실은 나도 그동안 부정해왔을 뿐 너무나 K-일중독자 근성이 뼈에 새겨져 있는 것은 아닐까 새삼 생각했다.
아무튼 한국어를 쓰지 않는 환경이 나에게는 환기 효과가 있었던 것 같다. 그다지 잘하지도 못하는 영어로 학술적인 자료들을 읽어야 한다는 것이, 심지어 내가 전공한 분야와는 아무 상관 없는 낯선 영역이라는 것이 처음에는 부담스럽고 버겁게만 느껴졌는데, 한국어 대화가 오가지 않는 날들이 계속 이어지자 어쩐지 ‘까짓것, 그냥 한번 해보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이렇게 멀리까지 왔는데, 뭐라도 쓰고 가야지.
장애와 과학기술의 연결은 그 자체로 이미 인기 있는 논의 주제다. 첨단과학기술이 장애인들을 도울 수 있는가, 보조기술은 어떻게 장애를 보완하는가, 산전 유전자 검사와 유전자 편집은 장애를 없앨 것인가. 여러 논의 사이에서 나는 먼저 ‘어디에 서서 문제를 바라볼 것인가’를 정해야 했다. 장애를 그저 불편하고 가급적 없으면 좋은 상태로만 여긴다면, 장애와 과학기술에 관해서도 통념을 따르는 이야기밖에는 할 수 없다. 기술 발전은 좋은 것이고, 장애와 질병은 줄어들 것이고, 보조기기는 장애인들을 도울 것이고…….
그렇지만 나에게는 다른 관점이 필요했다. 정확히는 장애를 오직 의료적 교정과 치료의 대상으로만 바라보는 통념에 반대하면서, 비장애중심의 사회구조를 바꾸어나가자는 입장에 서서 과학기술을 이야기하는 관점이 필요했다. 요약하면 ‘장애학의 관점으로 장애-과학기술의 관계를 재설정하는 일’이라고 할까. 문제는 해외에서도 이런 관점이 주류가 아니라는 데에 있었다. 자료의 바다를 헤매며 찾아내는 수밖에 없었다.
나는 첨단기술과 결합된 장애인을 ‘사이보그’로 칭하는 여러 광고 영상, 신문 기사와 칼럼으로부터 출발했다. 구원자로서의 과학기술은 한국에서나 해외에서나 인기 있는 주제였다. 기술이 걷지 못하는 이를 일으켜 세우고, 듣지 못하는 이를 듣게 만들 것이라는 약속과 낙관이 기업 홍보 영상이든 대중적 콘텐츠든 흔히 등장해온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에 대한 비판 역시 (주류는 아니지만)오래전부터 꾸준히 제기되어왔음을 알 수 있었다. ‘기술이 장애를 종식할 것이다’, ‘기술만이 장애의 유일한 해결책이다’와 같은 주장들이 어떻게 비현실적 낙관으로 사람들의 시선을 돌리고, 장애인의 현실을 외면하게 만드는지에 대한 비판이었다.
여기까지는 조사가 수월했지만, 그다음이 어려웠다. 나는 비판뿐만 아니라 대안을 제시하고 싶었다. 장애를 단지 ‘과학기술이 해결해야 할 문제’ 정도로만 바라보는 관점이 잘못되었다는 점은 충분히 동의할 수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발전하는 과학기술이 장애 당사자들의 삶에 이전보다 많은 가능성을 열어주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그렇다면 혹시 장애인을 소외시키고 억압하는 기술과, 장애인을 실제로 돕는 기술이 따로 있는 걸까? 그것을 나눌 수 있는 선이 애초에 존재하기는 할까? 만약 기술에 대한 비현실적 낙관도 비관도 아닌, 그 사이의 어떤 길이 있다면 그건 무엇일까?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뻗어나가는 대안은 없을까? 대립 혹은 수용만이 있는 것일까?
처음으로 「크립 테크노사이언스 선언(Crip Technoscience Manifesto)」을 발견했을 때의 반가움이 지금도 생생하다. 이 논문의 저자들은 그동안 장애인을 ‘위해’ 만들어진 기존의 장애-기술을 넘어서서, 장애인이 기술지식의 제작자로서 중심이 되는 새로운 과학기술을 제안한다. 이 자료들을 접한 날, 나는 작업일지에 이렇게 적었다.
‘아, 이제 알겠다! 이제 쓸 수 있을 것 같아.’
그저 막연한 문제의식, 충분히 벼려지지 않아 뭉툭한 질문들, 아직 패턴을 찾지 못한 생각들이 비로소 그것을 설명해줄 언어를 만났을 때의 기쁨이란.
이 논문이 실린 저널 <카탈리스트(Catalyst)>의 해당 호에는 크립 테크로 해석될 수 있는 다양한 실제 사례들이 함께 실려 있어서, 그 사례들을 책에 직접 소개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한국에서 크립 테크의 예시를 어떻게 찾아봐야 할지도 감을 잡을 수 있었다. 저널의 해당 호가 발행된 지 겨우 반년밖에 되지 않았다는 것도 이 주제의 ‘동시대성’을 실감하게 했다. 앞서 ‘장애중심적 과학기술’을 고민하고, 구체적으로 언어화하고, 관련된 다양한 활동을 실시간으로 벌이는 사람들이 바다 건너에 있었던 것이다. 일단 연구자와 활동가 몇몇의 이름을 알게 되자, 그들의 네트워크를 추적하는 일은 쉬웠다. 인용과 참고자료를 따라가고, 아직 정식 논문이나 기사로 나오지 않은 소셜미디어와 블로그의 글도 찾아보았다.
그다음으로 이어진 ‘발견의 기쁨’은 나의 본업인 소설과도 관련이 있었다. 내가 SF 작가인 만큼, 장애와 관련된 SF를 다루는 내용을 넣어야겠다고 생각하고 ‘장애의 미래를 상상하기’라는 챕터를 맨 마지막에 넣는 것으로 구상했지만 사실 뚜렷한 확신은 없었다. SF에서 장애인 캐릭터나 장애-기술이 등장하는 일은 종종 있지만, 다른 소수자 문제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덜 다뤄지는 것처럼 느껴졌던 것이다. 하지만 일단 조사를 시작하고, 내가 아직 원문으로 읽어보지 않은 해외 SF까지 영역을 넓히니, SF를 통해 장애를 진지하게 탐구해온 작가들의 수가 결코 적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가장 먼저 읽은 책은 『Disability in Science Fiction』이라는 SF 비평서였다. 알려진 작품들을 장애중심적 비평 틀로 해석하는 이 비평서를 통해, 기존의 SF 작품들에 등장하는 장애인 인물 혹은 장애-기술을 어떻게 비판적으로 바라봐야 할지 단서를 얻었다. 그리고 장애와 접근성을 주제로 한 사고실험적 SF 작품을 모은 선집 『미래에 접근하기(Accessing the Future)』와 SF 매거진 <언캐니(Uncanny)>의 장애 특집호를 읽으며 동시대의 작가들이 SF 속에서 어떻게 장애와 과학기술의 관계를 다루고 있는지를 살펴보았다. 이 과정은 단지 책을 쓰기 위한 조사에만 그치지 않았고, 나의 이후 소설 작업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 SF를 통해 가상세계에서의 접근성에 대한 다양한 실험을 해볼 수 있다는 것을 다른 작가들의 글을 읽으며 실감한 것이다.
김원영 작가와 읽은 자료들을 공유하며 목차와 각 장의 개요를 잡아나갔다. 목차와 전체 구조는 초고를 쓰는 과정에서 여러 번 바뀌었는데, 독자들에게 낯설게 느껴질 주제를 다루는 책을 끝까지 읽게 만드려면 무엇보다 글의 흐름이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먼저 각자의 경험에서 출발해서, 왜 우리가 지금 이 시대에 장애와 기술의 관계를 함께 고민해야 하는지 화두를 던지고, 구체적인 사례들을 살펴보며 현상을 분석하고, 다양한 대안을 제시하며, 마지막에는 좀 더 미래적인 이야기까지 확장하는 흐름으로 구상했다.
서로 자료를 공유하다보니 같은 사례를 책에서 여러 번 소개하는 경우도 있어서 중복되는 내용을 조율하고, 각자 다른 소주제를 다루면서도 연결될 수 있는 지점을 고민했다. 주간지 연재에서 썼던 글들을 다시 본문에 넣는 것은 거의 불가능할 정도로 글을 아예 무너뜨리고 다시 짓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렇게 초고를 써나가던 중에 코로나19 사태가 터졌다. 한국의 지인들로부터 “여기보다 태국이 안전하니까 좀 더 있다 들어와”라는 말을 들으며 조마조마한 일상을 보내다가 원래 계획했던 대로 2월 말까지 치앙마이에 머물다 한국으로 돌아왔다. 여담이지만 당시 내가 너무나 좋아했던 장소 ‘MANA co-working space’는 코로나19의 여파로 슬프게도 문을 닫고 말았다. 언젠가 다시 문을 열어주지 않을까 바라면서, 일이 잘되지 않는 날마다 그곳의 햇볕 잘 드는 전면 창과 낡은 소파를 차지하며 낮잠을 자던 검은 고양이, 오묘한 맛의 타이 스타일 샌드위치를 떠올리고는 한다.
마침내 3월 말, 초고가 완성되었다. 김원영 작가와의 초고 합본을 편집자님에게 보냈다. 아직 다듬을 곳이 많이 남아 있지만 그래도 제법 구조를 갖춘 글이었다. 흥미로운 사례들을 많이 소개했고, 새로운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는 자신감도 있었다. 얼마 뒤, 편집자님의 피드백이 도착했다. 언제나 단행본 원고의 첫 피드백을 여는 순간이 가장 긴장된다. 편집자님은 원고를 처음 읽는 독자이자 날카로운 안목을 지닌 훈련된 독자였고, 이 원고를 함께 좋은 책으로 만들어갈 협업자이기도 했다. 만약 편집자님을 만족시킨다면 이 초고도 그럭저럭 괜찮은 것이었다.
“보내주신 원고 잘 읽어보았습니다.”
그렇게 시작된 피드백은 아직 ‘만족’과 거리가 멀었다. 편집자님은 이 글이 분명히 많은 장점과 매력을 가지고 있지만, 초기 협업의 목표로 삼았던 두 저자의 ‘차이’를 드러낸다는 아이디어가 지금 단계에서는 잘 구현된 것 같지 않다는 조언을 해주었다. 또한 내 파트가 독자의 입장에서 좀 더 어렵게 느껴진다고 했는데, 장애학과 과학기술학 분야의 다양한 논의를 소개하고는 있지만 감정과 생각을 진솔하게 드러내는 에세이적인 성격이 부족해서 몰입이 잘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너무 건조하고 무덤덤하게 서술되었다는 말이었다.
“독자가 지적인 자극을 넘어 이야기 속으로 좀 더 깊이 들어가려면, 자신을 뒤흔드는 문제의식이나 끝내 해결되지 않는 고민 등 조금 더 자신을 내보이는 이야기가 담겨야 하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여기서 소개하는 여러 논의의 중심에 당사자인 자신의 경험과 문제의식이 놓여 있으면 좋겠어요.”
편집자님의 정확한 지적에, 그동안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돌이켜보면 초고가 그렇게 건조하게 쓰인 이유는 두 가지 정도가 있는 것 같다.
먼저, 지금도 약간은 그렇지만, 나는 글에서 사적인 부분을 드러내는 것을 좀 어색해한다. 나의 소소한 일상이나 주위 사람들과의 일화, 성장 과정에서의 경험을 소재로 쓰는 것에 거부감도 있고, 간지러움도 느낀다. 일상을 대체로 무덤덤하게 보내는 편이고, 특별히 극적인 일도 없어서 글로 쓸 만한 이야기도 없다. 남들처럼 감정이 폭주하던 10대 시절에는 사적인 글들을 블로그에 올리기도 했지만 나중에 읽어보면 ‘이런 얘기를 대체 왜 공개적으로 썼지?’ 싶어서 부끄럽기만 했다.
그래서 나는 소설가로 데뷔하게 되어서, 특히 SF 작가로 데뷔해서 좋았는데, 현실과 워낙 거리가 먼 이야기다보니 작가가 글에 드러나지도 않고, 독자들도 굳이 작가가 누구인지 어떤 사람인지 짐작하지 않을 것 같아서였다(꼭 그렇지만은 않다는 것을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그래도 소설이 아닌 글에서는 주제 때문이든 독자의 몰입을 높이기 위해서든 작가의 이야기가 필요할 때가 있는데, 그런 사실을 알고는 있었지만 내가 쓰는 건 익숙하지 않았던 것이다.
다음은 앞선 이유보다 좀 더 큰 것인데, 나는 이 글에서 당사자성을 얼마나 드러내야 하는지에 대해 고민이 많았다. 나는 후천적으로 난청을 얻게 된 장애 당사자이고, 그 당사자성이 장애와 과학기술이라는 주제로 책을 쓰게 된 중요한 계기이긴 하지만, 전체를 읽을 때는 그것이 이 글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지 않기를 바랐다. 글을 쓰는 사람으로서 당사자성이란 매우 다루기 어려운 공처럼 느껴진다. 어떤 주제를 다루기 위한 적절한 출발 지점이자, 현상에 대한 해석의 틀이고, 독자의 몰입을 이끄는 중요한 통로이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다.
나뿐만 아니라 보통 당사자로서 어떤 주제에 글을 쓰는 저자들이 궁극적으로 말하고 싶은 건 당사자로서 겪은 경험만이 아니라, 그다음의 이야기일 것이다. 개인의 경험이 어떻게 사회와 연결되는지, 이 경험을 구조 속에서 어떻게 바라볼 것인지, 나와 타인의 경험은 얼마나 같고 또 다른지. 그런 이야기까지 도달할 수 있어야만 개인의 경험은 사적인 서술에 그치지 않고 의미를 지니게 된다. 때로 이런 글이 경험 너머의 이야기로 읽히는 대신, 작가의 당사자성 자체에만 조명을 비추고 끝나는 경우도 있다. 나는 이 책도 그렇게 읽힐까봐, 또한 이 책의 독서 경험이 나의 소설을 독해하는 데에도 불필요한 영향을 미칠까봐 상당히 방어적인 태도로 초고를 썼던 것 같다.
그래도 편집자님의 피드백에 매우 동의했던 나는 일단 초고를 뜯어고치며 내 경험 서술을 늘리고 회상 장면들을 ‘감정적으로’ 크게 수정했다. 나보다 훨씬 능숙하게 자기 이야기를 녹여내는 김원영 작가의 파트를 읽으며 분석도 했다. 그런데 내 글을 수정할수록 뭔가 좀…… 아닌 것 같았다! 대체 뭘까, 이 기분은? 한참 고민하다가 이 프로젝트의 시작부터 계속 이야기를 나눠왔던 연구자 K에게 글을 보여주었다.
(다음 편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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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1993년생. 포스텍에서 화학을 전공하고, 생화학으로 석사 학위를 받았다.2017년 「관내분실」과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으로 제2회 한국과학문학상 중단편 대상과 가작을 수상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쓴 책으로 소설집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원통 안의 소녀』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