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이 된 지금에야 자전거를 배웠다. 한강길을 따라 출퇴근을 하다 보면 자전거를 타지 못한다는 사실이 늘 아쉬웠다. 걷기를 좋아하는 사람이지만, 자전거를 타고 봄바람을 맞으며 달린다는 건 어떤 느낌일까 궁금했다. 언젠가는 배워야지 하고 넘기던 게 서른이 되고 나니 더 이상 미루고 싶지 않아졌고, 마음을 먹었으니 곧장 따릉이 정기권을 결제해버렸다.
어려서부터 바퀴 달린 것들을 가까이하지 않았던 내게는 페달을 조작하는 것도 새로운 일이었다. 페달을 밟는 발이 미끄러질 때마다, 자꾸만 기우뚱하며 핸들을 우왕좌왕 할 때마다 옆에서 가르쳐주던 그는 안 하던 걸 하는 거니 당연한 거라고, 잘 하려는 마음이 앞서면 다칠 테니 찬찬히 마음을 먹으라고 말했다. 아니나 다를까, 얼른 잘 타고 싶어 혼자 밤에 자전거를 달리던 나는 크게 넘어졌다. 새로운 움직임을 몸에 익히는 동안 마음도 몸도 함께 긴장했던 것인지, 크게 다치지도 않았는데 회복하기까지 며칠이 걸렸다.
가만히 있으면 다치지 않았을 테지만, 움직일 수 있는 몸을 관성에 맡겨 둔 채 살던 대로 살기에는 아직 에너지가 넘쳤나보다. 걷기만으로도 충분하다 생각했던 일상에 자전거가 들어오고 나니 더 멀리 가고 싶어지고, 출퇴근 길의 20분 남짓한 시간이 기다려지고, 안 가 본 길을 가보는 데에 설레기도 한다. 일상의 반경을 넓혀줄 움직임을 익히고 나니 다른 즐거움이 생겼다. 이 움직임을 몸에 더 잘 익히고 싶어서 한동안은 따릉이를 애용할 것 같다. 잘 하고 싶어지는 게 늘어난다는 건 나를 더 움직이게 만든다.
서른임을 강조하는 건 ‘꽤 나이 먹었네’의 의미가 아니다. 마음먹은 건 다 해 내고 싶어지는 10단위의 시작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스무 살 무렵의 나를 자꾸만 소환해주는 각종 클라우드 속의 ‘몇 년 전 오늘의 나’를 보면서 무엇이든 해 보고 싶었던 호기심 가득한 시절을 떠올린다. 하고 싶은 것도 많고 가고 싶은 데도 많았던 때. 관성이 생길 틈이 없던 시간들.
딱 10년 터울이라 이제 스물이 된 동생은 지금 하고 있는 모든 새내기의 일상들이 신나고 행복하다고 한다. 그때의 에너지를 나도 기억한다. 뻔한 표현인 ‘신나고 행복해’라는 말이 완전하게 느껴지는 때가 그리 많지 않다는 걸 이제는 안다. 동생이 느끼는 그 싱그러운 에너지에는 새로운 것들로 가득하다. 스물 무렵에 되도록 많은 걸 경험해보라는 말은 몸의 관성이 생기기 전에 더 나은 자리에 나를 둘 수 있는 선택지를 많이 만들어 두라는 뜻이었나 보다. 서른이 된 내게는 10년 치의 선택지가 더 생겼고, 내게 맞는 것을 찾아 제법 정착하고 있었다. 여기서 느끼는 안정감도 좋았다. 하지만 내 나이에서 0이라는 숫자를 다시 본 순간, 새로운 것들을 해 보고 싶은 욕구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나를 제 자리에 그대로 두면 안 될 것 같은 왠지 모를 조급함도.
새로운 무언가를 받아들이는 데에는 꽤 많은 에너지가 필요하지만, 그것이 이끄는 곳이 지금보다 나은 나를 만드는 것이라는 조금의 확신이라도 든다면 행동으로 옮겨보고 싶다. 말한 건 모두 해 내면서 사는 사람이 되겠다고 종종 다짐한다. 내가 지키기로 한 것들, 하기로 한 것들은 실현해내면서. 관성을 지키는 것보다 한 번씩은 무너뜨릴 수 있는 데에도 힘 쏟을 수 있도록 다져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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