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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화 - 꾸준함도 훔칠 수 있다면

『바퀴벌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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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리 소설은 갈팡질팡하지만, 결국엔 범인을 잡는다. 그 갈팡질팡한 방황 역시, 심판을 하고, 정의를 되찾는 과정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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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8.

 

『바퀴벌레』를 계속 읽고 있다. 요 네스뵈는 조금 독특한 이력이 있다.
 친구들과 결성한 밴드(디 데레:Di Derre)활동을 하다가, 갑자기 호주로 떠나 반년을 보낸 후 작가로 돌아왔다. 오늘날 그를 국제적인 스타 작가로 만들어준 ‘해리 홀레’ 형사 시리즈를 호주를 배경으로 쓴 것이다. 이런 점에서 그는 소설 『실내 인간』을 쓴 밴드 ‘언니네 이발관’ 출신 이석원 작가와 유사하다.

 
사실, 밴드를 한 작가는 꽤 있다. 이석원 작가는 물론, 『냉정과 열정 사이』의 츠지 히토나리, ‘3호선 버터플라이’의 성기완 작가도 있다, 이런 예는 좀 그렇지만 나도 있다. 하지만, 앞서 언급한 작가 중 누구도 최다 앨범 판매 기록 같은 걸 보유하고 있지 않다. 그렇다. 요 네스뵈의 밴드는 노르웨이에서 앨범 최다 판매 기록을 세웠다. 음악을 계속했어도 됐을 텐데. 정상에 선 만큼 그는 음악이 아닌, 다른 걸 추구하고 싶었을까.

 

그는 경제학자이자, 저널리스트이기도 했다.
끊임없이 새로움을 추구하는 유형 같다.
작품 외에도 작가에게 관심이 가기는 오랜만이다.

 

11. 9.


늦깎이로 데뷔를 해서일까. 요 네스뵈는 이를 만회하듯, 거의 매년 형사 ‘해리 홀레’ 시리즈를 선보인다.


항상 느끼는 것이지만, 재능을 이기는 것은 꾸준함이다.
아울러, 재능을 꽃피우게 하는 것 역시 꾸준함이다.
꾸준함이 승리를 이끄는 가장 예리한 무기이며,
꾸준함이 결실을 보게 하는 가장 절실한 비료다.

이번에 훔칠 것은 다름 아닌, 바로 ‘꾸준함’이다.

 

 

11. 10.

 

『바퀴벌레』는 여타 추리?서스펜스 소설과 비슷한 방식을 취하고 있다. 서사가 진행될수록 용의자가 한 명씩 용의선상에서 비껴가는 방식이다.

 

그런데, 독특한 게 있다. 정보가 밝혀질수록, 용의자들은 범인이 아닌 것으로 밝혀진다. 그렇기에 수사는 뭔가를 얻었지만(적어도 저 사람은 범인이 아니라는 것), 그러나 동시에 뭔가를 잃은 채 재개된다(시간, 단서, 노력의 결실 등). 때문에 해리의 동료 수사관은 이럴 때마다 마치 독자들이 들으라는 듯, 말한다.


“다시 원점으로 돌아왔군.”

이건, 마치 소설의 서사가 원점으로 돌아왔다는 것과 같다. 간혹, 영화배우가 카메라를 똑 바로 응시하면서 관객에게 직접 대사를 하는 영화가 있는데, 이 소설도 가끔씩 이런 느낌을 준다.
이런 게, 노르웨이식 농담인지, 요 네스뵈의 농담인지는 모르겠지만, 장난기가 느껴진다.

 

11. 10.

 

그나저나 수사는 자꾸 원점으로 돌아가는데, 소설은 어떻게 앞으로 나아가나? 이게 참 묘하다. 동료 수사관이 “다시 원점으로 돌아왔어”라고 할 때마다, 이미 소설은 수 백 페이지가 넘어간 후다. 그러니까, 정리하자면 새로운 정보가 밝혀질수록 서사는 비틀어진 채로, 갈팡질팡하며 나아간 것이다. 이렇게 생각을 하면 될 것 같다.


주가 곡선은 단기적으로는 상승과 하락을 거듭하지만, 장기적으로는 성장곡선을 그린다. 이 소설의 이야기 역시 반전에 반전을 더하며 자꾸만 방향을 틀지만, 결국은 범인을 찾기 위해 한발 짝씩 나아간다.


마치, 우리네 인생과 정치, 역사와 모든 서사가 퇴보와 진보를 거듭하다가, 결국엔 약간씩 진보하듯이. 너무 비장했나? 이게 다 시국 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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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12.

 

지난 회 ‘절도일기’에 오늘 시위엔 참가하겠다고 공언했으므로, 광화문으로 나섰다. 


100만 명이 나선 시위라니. 어둔 밤을 밝히고 있는 수많은 촛불들이 눈앞에서 움직였다. 그 웅장한 광경이 눈앞에 한꺼번에 펼쳐졌다. 촛불에 눈이 익을 즈음, 광화문까지 걷다보니 곳곳에서 젊은이들이 햄버거나 김밥을 우걱우걱 씹으며 허기를 달래고 있었다. 낮부터 나온 모양이었다. 구체적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시대적 부채감이 나를 조금 찔렀다.


사람들이 원을 그린 채 웅성거려 다가가보니, 원 안에 한 젊은 여성이 길바닥에 철퍼덕 앉아 있었다. 그녀 옆에는 집에서 메고 온 것처럼 보이는 커다란 군용 배낭이 있었다. 그녀는 사람들에게 무언가를 끊임없이 나눠줬는데, 그것은 바로 집에서 들고 온 수백 개의 양초와 종이컵이었다. 종이컵에는 초를 꽂을 수 있는 칼질까지 나 있었다. 그 배낭의 무게는 얼마였을까.


고개를 돌려보니, 다른 한 청년이 한 손에는 집게를, 다른 한 손에는 100리터짜리 대용량 봉투를 쥐고, 묵묵히 바닥에 떨어진 쓰레기를 주어 담고 있었다. 친구도 없이, 말도 없이, 오로지 혼자서 거리의 끝과 끝을 오가며 거리를 청소하고 있었다.


무엇이 집에서 무거운 배낭을 챙겨오게 했고, 무엇이 혼자서 거리를 청소하게 만들었을까.


나는, 그것이 ‘닮고 싶지 않음’이라 생각했다. 저들이 비록, 추하고 악하고 비상식적일지라도, 나는 ‘당신과 같이 되지 않겠다!’는 그들만의 저항방식으로 다가왔다.


소설뿐만 아니라, 우리가 사는 세상도 때론 추락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긴 안목으로 보면 우리는 조금씩 전진하고 있다.

 

11. 14.

 

독서를 한다는 것은 외로운 일이다. 누구와 대화를 하면서 읽을 수 없고, 일부러 혼자만의 시간을 내어야 한다. 고도의 세계를 향해 자발적으로 발을 내디뎌야 한다. 동시에, 고된 일이다. 몰입을 하기 위해선 바른 자세를 유지해야 하고, 그 자세로 오랫동안 읽어야 한다. 읽다보면 목과 허리가 아프고, 뇌를 많이 쓰다 보니 배도 고파진다. 과연 이 고독하고, 고된 노동을 계속 해나갈 사람이 얼마나 될지, 얼마나 줄지 궁금해졌다. 내 소설을 읽는 이는 얼마나 줄 것인가.

 

 

11. 15.

 

기쁜 소식을 접했다. 아직은 내 소설을 꼼꼼히 읽고 있는 독자가 있다는 사실이다. 신문기사로 이 소식을 접했다. 정부가 블랙리스트를 만들고, 소설 작품의 ‘사상 검증’을 했다는 기사였다. 그 블랙리스트에 내 소설집 『시티투어버스를 탈취하라』가 있었다. 시장도 외면한 책을 공들여 읽어준, 관계자들에게 감사를 표한다.

 

11. 17.


『바퀴벌레』를 완독했다. 소설은 1,2,3 장(章)까지 스토리 위주로 전개됐다. 그러다, 4장과 결론부에선 서사와는 별 상관없는 주인공의 심리묘사가 덧붙었다. 이 장면이 쓸쓸했다. 이 소설이 담고 있는 몇 안 되는 순문학적 장치인데, 희소해서 소중했다. 해리 홀레라는 형사의 성격을 매력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다. 특히 마지막 페이지는 마치 범죄 영화의 엔딩처럼 주인공이 사건을 해결하고, 또 다른 사건을 향해 나아가는 듯한 느낌을 주는데, 이런 분위기가 좋다. 소설에서 중요한 것은 결국 분위기 아닌가. 기대하는 분위기가 충족 되는 느낌, 소설을 읽을 때 좋은 게 바로 이런 것이다.

 

 

11. 19.


오늘도 시위에 다녀왔다. 경북궁 역 앞으로 가니,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 있었다. 주최 측의 사회자는 없었고, 그저 몇 몇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하고픈 구호를 외치고 있었다. 그러다, 누군가가 선창했다. “박근혜는!” 그러자, 시민들이 화답했다. “하야하라!” 구호는 ‘박근혜는 물러나라’로 바뀌었고, 어느 샌가 사람들은 모두 하나를 외치고 있었다.


 “박근혜를 구속하라.”


이 구호를 누군가 내 바로 옆에서 굉장히 큰 목소리로 외치고 있었다. 너무나 커서 귀가 떨어질 것 같아, 돌아보니 아내였다. 아내의 코와 눈이 빨갰다. 나도 함께 외쳤다. 우리는 대화 없이, 구호를 오랫동안 함께 외쳤다.

 

추리 소설은 갈팡질팡하지만, 결국엔 범인을 잡는다. 그 갈팡질팡한 방황 역시, 심판을 하고, 정의를 되찾는 과정이 된다.


우리는 지금 전진하고 있는 것일까. 우리도 결국에는 우여곡절 끝에 정의가 도래한 땅에서 각자의 일에 온전히 전념하며 지낼 수 있을까. 어서 마음 편하게 소설을 읽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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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ㆍ사진 | 최민석(소설가)

단편소설 ‘시티투어버스를 탈취하라’로 제10회 창비신인소설상(2010년)을 받으며 등단했다. 장편소설 <능력자> 제36회 오늘의 작가상(2012년)을 수상했고, 에세이집 <청춘, 방황, 좌절, 그리고 눈물의 대서사시>를 썼다. 60ㆍ70년대 지방캠퍼스 록밴드 ‘시와 바람’에서 보컬로도 활동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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