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 연재종료 > 최민석의 절도일기(竊圖日記)
18화 – 어쩌면 고전이라는 것은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
어쩌면 고전이라는 것은 세계지도 속 나라 같은 거야. 그 안에는 미처 가보지 못한, 하지만 누군가에게서, TV에서, 라디오에서 늘 듣고 봤던 나라들이 있어. 그래서 언젠가는 꼭 한 번 저 나라들에 내 발자국을 한 번 남겨야지 결심했던 세계지도 속 나라들 말이야.
9. 21.
『뜨거운 피』의 여운에 잠겨 있다. 600페이지에 달하는 두꺼운 책에 빠져 있었다니…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한동안은 책을 읽지 않아야겠다고 생각 했는데, 집으로 택배가 왔다. 아내가 상자를 건네받다가 ‘끙’ 신음소리를 내며 물었다.
“여보, 아령 주문했어?”
(아내는 소설을 많이 읽어서 원래 약간 과장하는 어투를 구사하는데, 소설가와 결혼을 하더니 아예 허풍형 작가처럼 말을 한다.)
출연하기로 한 TV 책 프로그램에서 택배를 보낸 것이다. 뜯어보니, 다루기로 한 책 『돈키호테』 완역판이다. 양장본 두 권인데, 합치니 무려 1,720페이지다. 맙소사, 1,720 페이지라니! 돈키호테 두 권을 쌓아보니, 내 책 『미시시피 모기떼의 역습』 5권을 쌓은 것보다 높다.
돈키호테에게 영문도 모르고 공격을 당한 풍차가 된 심정이다.
9. 23.
『돈키호테』가 고전으로 자리 잡은 데는 명백한 이유가 있다. 빠른 전개, 예상할 수 없는 스토리, 주인공인 돈키호테의 이해할 수 밖에 없는 행동, 이를 뒷받침하는 완벽한 개연성, 간결한 대사와 문장, 과감한 생략, 아아, 이 소설이 이렇게 쉽고, 빠르게 읽히다니. 그간 나는 왜 살아오며 이 소설을 읽지 않았던가. 이제 내 인생은 두 시기로 나뉜다. 『돈키호테』를 집어들기 전의 풋내기 나와 『돈키호테』에 빠져든 성숙한 나. 『돈키호테』, 내가 너의 이름을 부르기 전에 너는 한낱 종이뭉치에 불과했으나, 너는 내게 다가와 꽃이 되었다. 아아, 『돈키호테』, (원고 써야할) 나를 파괴하러 온 나의 구원자.
라고, 썼으면 좋겠다. 다 거짓말이다. 이제 겨우 50페이지 읽었다.
9. 25.
세르반테스는 얼마나 외로웠기에, 이토록 많은 말들을 책 속에 쏟아 부었을까. 혹시 터키 해적선의 습격을 받아 포로가 되고, 알제에서 5년간 노예 생활을 하는 동안 못 했던 말을 소설 『돈키호테』에 다 쏟아 부은 게 아닐까.
게다가, 400년 전에 펜을 손에 쥐고 꾹꾹 눌러쓰고 탈고까지 마쳤을 때, 그 어깨는 무사했을까(이건 다소 외경한 의문이지만, 아니 탈고를 하기는 한 걸까. 했다면, 줄이려다가, 오히려 더 늘려버린 게 아닐까.)
1권을 780페이지에 달해 쓰고 난 후, 너무 많이 썼다는 생각에 10년 동안 자책하며 말을 아끼다가, 2권을 쓸 때는 못 한 말이 오히려 너무 많이 쌓여 900페이지나 써버린 게 아닐까. 그 때문에 2권까지 탈고를 마친 그의 어깨를 포함한 몸은 완전히 축나버렸고, 그래서 이듬해 병석에 누운지 20일 만에 저 세상에 떠나버린 게 아닐까.
하지만, 저승에서도 못한 말이 너무 많아, ‘아아, 이대로 지낼 수는 없어’ 하며 환생하여, 이번엔 번역가가 되었고, 하여 자기 소설을 직접 번역하며 그 많은 각주를 달아놓은 게 아닐까. 그게 아니라면 1권 323쪽의 소설 본문(7줄)보다 긴 각주의 분량(26줄)을 어떻게 받아들여야할까. 아아, 여러모로 상상하게 된다. 역시, 고전은 생각할 거리를 풍부하게 선사하는 것이다.
소설의 장광설 만큼이나 장대한 각주. 믿기 어렵겠지만 하단의 작은 글씨가 모두 각주다.
9. 29.
나는 지금 프랑스 마르세유로 가는 비행기 안에 앉아 있다. 한 자동차 회사가 출시한 신규 차량을 타고 다니며 프로방스 요리를 먹고 글도 쓰고, 사진도 찍고 하는 행사에 내가 선정된 것이다. 하여, 프로방스로 떠나는 비행기에 앉아 있지만, 내손에는 여전히 800쪽 짜리 『돈키호테』 1권이 들려있다.
말이 점차 길어지는 게 어째, 세르반테스의 영향을 받은 것 같다.
기내식을 먹은 후, 다시 『돈키호테』를 읽고 있는 내게, 승무원이 물었다.
“뭐 마시겠습니까?”
그 순간, 미처 책에서 빠져 나오지 못한 내 영혼은 마치 돈키호테처럼
‘아름다운 승무원 아가씨. 당신의 눈처럼 맑고 깨끗한 화이트 와인이 있다면 마시겠소만, 이 세상 어디에도 그런 와인이 없다는 것쯤은 내 비록 중쇄도 찍지 못하는 변방의 소설가 나부랭이지만 잘 알고 있소. 하여, 여쭙는 것인데, 혹시 아까 먹은 기내식 한 그릇 더 할 수 없소? 내 몹시 허기져서 그렇소. 떠돌이 기사들처럼, 떠돌이 글쟁이도 언제나 배가 고픈 법이라오’라고 말하려다가, 그냥 적당히 불쌍한 표정으로 “미니 고추장 남으면 하나만 더…”하고만 말았다. 승무원은 ‘뭐, 이런 자식이’하는 표정으로 내게 고추장 튜브 다섯 개를 줬다.
고전을 읽으면 과연 생활에 도움이 된다.
그나저나, 세르반테스의 영혼이 번역가에게서 빠져나와 내게로 온 게 아닐까 걱정된다.
10. 3.
출연하기로 한 프로그램의 작가에게서 이메일이 왔다. 클릭하니 화면을 가득 채울 만큼 장문의 편지였는데, 요약하자면 ‘잘 읽고 있느냐, 꼭 읽으셔야 한다, 부디 읽어내시길 바란다’는 내용이었는데, 이는 마치 전장에 떠난 부대원에게 부대장이 보내는 ‘반드시 살아서 돌아와야 한다’는 풍의 굳이 보낼 필요는 없지만, 받으면 왠지 가슴 뭉클해지고, 의욕이 생기고, 괜히 침도 한 번 꿀떡 삼켜지고, 그래서 눈에 힘도 들어가고, 어쩐지 주먹도 한 번 불끈 쥐게 되어, ‘그래. 까짓거 한 번 해보는 거야’라는 결심도 나도 몰래 엉겁결에 외치게 되는 그런 편지였다. 하여, 다시 『돈키호테』를 펼쳐 보며 생각했다.
‘그래. 어쩌면 고전이라는 것은 세계지도 속 나라 같은 거야.
어릴 적에 벽에 늘 붙어 있던 세계지도 말이야. 할 일이 없으면, 늘 바라보며 시간을 보내곤 했던 세계지도. 그 안에는 미처 가보지 못한, 하지만 누군가에게서, TV에서, 라디오에서 늘 듣고 봤던 나라들이 있어. 그래서 언젠가는 꼭 한 번 저 나라들에 내 발자국을 한 번 남겨야지 결심했던 세계지도 속 나라들 말이야.’
『돈키호테』라는 익숙하지만, 미처 가보지 못했던 나라에 내 몸은 언제쯤 완전히 도착할 수 있을까. 하여, 오늘도 다시 책장을 넘겼다. 이제 겨우 1권의 절반을 읽었다.
단편소설 ‘시티투어버스를 탈취하라’로 제10회 창비신인소설상(2010년)을 받으며 등단했다. 장편소설 <능력자> 제36회 오늘의 작가상(2012년)을 수상했고, 에세이집 <청춘, 방황, 좌절, 그리고 눈물의 대서사시>를 썼다. 60ㆍ70년대 지방캠퍼스 록밴드 ‘시와 바람’에서 보컬로도 활동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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