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 연재종료 > 전건우의 예능과 인생
<1박 2일>, 여행은 끝나지 않는다
<1박 2일>은 내게 예능 이상의 존재
<1박 2일>은 우리에게 말한다. 아직 늦지 않았다고, 조금 더 기다리겠다고, 그러니 너무 서두르지 않아도 된다고, 여전히 같은 모습으로 있겠다고, 여행은 끝나지 않았다고, 원할 때면 언제든 함께 떠날 수 있다고…….
참 곰 같은 예능
그런 친구들이 한 명씩은 있기 마련이다. 딱히 잘 생긴 얼굴도 아니고 기똥찬 말솜씨로 주위를 사로잡는 것도 아니고 돈이 많아서 이것저것 베풀고 다니는 것도 아닌데 왠지 정이 가는 친구. 몇 달, 혹은 몇 년씩 안 보고 살아도 그만일 것 같은데 또 어느 순간 문득문득 생각나고 그리워지는 친구. 수더분한 인상에 착한 마음, 그리고 우직하게 한 우물을 파는 성실함까지 갖춘 친구. 각박한 세상 속에서 한 사발 약숫물이 되어주는 친구. 내게도 그런 친구가 있다. 때로는 답답하고 때로는 애틋한 녀석. 부산 사투리로 “빙신아!”라고 일갈을 하다가도 또 딱한 마음에 다시 한 번 되돌아 보게 되는 그런 친구.
KBS의 대표 일요 예능인 <1박 2일>은 딱 그런 친구 같은 프로그램이다.
그러니까 언제더라, 2007년 여름으로 기억하는데 나는 아주 우연히 텔레비전을 틀다가 <1박 2일>의 첫 방송을 보게 되었다. 그때는 <무한도전> 말고는 딱히 예능에 관심이 없던 터라 그 유명한 강호동이 새롭게 진행하는 <1박 2일>에 대해 아는 바가 전혀 없었다. 어쨌든 나는 강호동의 꽥꽥 대는 목소리에 홀려서 채널을 고정하고 있었고, 이윽고 다른 멤버들과 여행길에 오르는 장면까지 쭉 보게 되었다. 여행지가 어디였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하여튼 ‘리얼 야생 로드 버라이어티’를 모토로 내세운 것 치고는 참 심심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여행지에 도착해서 감탄 좀 하다가 밥 먹고 잠을 자는 게 전부였으니 내 느낌이 그리 틀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나는 다음 주에도 <1박 2일>을 챙겨봤다. 거참 다시 봐도 심심하네, 하면서. 그 다음 주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그 다음 주도, 또 그 다음 주도. 그때마다 내 감상은 언제나 같았다.
거참 심심하네.
복불복으로 벌칙을 받기도 하고 잠자리를 정하기도 하고 기상 미션과 그 외 다양한 미션들을 수행하기도 했지만 <1박 2일>의 기본은 여행지에서의 하룻밤이었다. 그러니 패턴이 똑같을 수밖에. 회가 거듭될수록 여행지 풍경에 대한 출연진들의 감탄사와 산지 음식을 먹은 후 내뱉는 이른 바 ‘맛 표현’까지도 비슷비슷해졌다. 요일은 다르지만 라이벌이라 일컬어지는 <무한도전>이 매 회 다른 포맷과 영리한 컨셉으로 시청자들의 무릎을 치게 만드는 데 반해 <1박 2일>은 주구장천 한 우물만 팠다. 여행가서 놀고, 밥 먹고, 잠자기. 참으로 우직하고 어찌보면 답답하게.
<1박 2일>은 여우 같은 예능이 판치던 시기에 나타난 곰 같은 예능이었다. 시청자들과 머리 싸움을 하려 들지도 않았고 자극적인 장면으로 이목을 집중시키지도 않았다. 해외 촬영 등의 물량 공세를 퍼부은 적도 없었다. 첫 방송 모습 그대로 전국 각지를 돌아다니며 사람들을 만나서 함께 웃고 함께 울었으며 또 함께 먹고 함께 잤다.
어딘가로 떠나서 먹고 잠을 잔 뒤 다시 돌아오는 일. 어쩌면 인생과도 비슷한 이 일을 <1박 2일>은 예능이라는 포장을 덧씌워 매 주 시청자들에게 보여 주었다. 한 때 이 순둥이 예능 프로그램이 모든 예능 중 가장 높은 시청률을 기록했던 건 한결같은 우직함과 우리네 삶과 닮은 특유의 컨셉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물론, 기가 막힌 ‘합’을 자랑했던 출연진들 간의 호흡도 한 몫했겠지. 다들 무탈하게 지냈던 그때 그 시절 말이다.
화려했던 날들은 지나고
남편, 아빠, 백수, 소설가, 전업작가로 살아간다. 운동만 시작하면 뱃살이 빠지리라는 헛된 믿음을 품고 있다. 요즘 들어 세상은 살 만하다고 느끼고 있다. 소설을 써서 벼락부자가 되리라는 황당한 꿈을 꾼다. 『한국 추리 스릴러 단편선 3』, 『한국 추리 스릴러 단편선 4』에 단편을 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