넘버 투의 비극일까. 피렌체가 아닌 다른 도시에 있었다면 여행자들이 필수 방문 코스가 되었겠지만, 많은 이들에게 외면당하는 공간이 팔라티나 미술관(Galleria Palatina)이다. 같은 도시에 어마어마한 우피치 미술관이 존재한다는 이유로 ‘거의’ 아무도 찾아가지 않는 공간이 되고 말았다. 하긴 우피치나 팔라티나 미술관 외에도 피렌체는 르네상스 걸작으로 넘쳐난다.
하지만 관람객이 많지 않다고 해서 팔라티나 미술관을 찾아갈 이유가 없느냐 하면, 그건 아니다. 팔라티나 미술관에 들어가면 꼭 ‘옛날 미술관’에 간 것 같다. 미술관의 역사를 보면 지금처럼 보기 좋게 그림을 한 점씩 차례차례 걸어놓기 시작한 것은 과히 오래된 일이 아니다. 옛날 미술관들은 그림을 주렁주렁 매달아 놓았다고 할까, 한꺼번에 여러 점을 걸어놓아서 벽을 가득 채우곤 한다. 팔라티나에 가면 과일이 풍성하게 열려서 가지가 늘어진 나무를 바라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게다가 관람객마저 거의 없으니 특별 대접을 받는 것 같은 우쭐함까지 만끽하면서 둘러보는 즐거움이 쏠쏠하다.
팔라티나 미술관이 들어서 있는 피티 궁전은 피렌체에서 가장 거대한 건물이다. 의상 박물관, 은 세공 박물관, 현대 미술관 등이 한 건물 안에 모여있다. 그리고 건물 뒤로는 푸르른 녹음이 펼쳐진 보볼리 정원이 자리 잡고 있다. 지그문트 프로이트가 정원을 보고 ‘메디치 가문의 쇤부른’이라고 극찬할 정도로 아름다운 공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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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티 궁전 입구 | |
원래 피티 궁전은 1470년대에 루카 피티에 의해 착공되었다. 자금이 모자라서 미완성으로 남은 건물을 사들인 것은 피렌체를 장악한 메디치 가문의 후예 코시모 1세였다. 아름다운 부인 엘레오노라를 위해서였다. (브론치노의 초상화로 그녀를 만날 수 있다. 움베르토 에코의
『미의 역사』 표지를 장식하는 바로 그 그림!) 나폴리 총독 돈 페드로 디톨레도의 외동딸이었던 그녀는 병약해서 밝은 햇살과 공기가 필요했다. 정적들에게는 잔인했으나 아내에게는 사랑스러운 지아비였던 코시모 1세의 사랑이 오늘날의 피티 궁전으로 남게 된 것이다.
그때부터 200년 동안 피티 궁전은 메디치 가문의 보금자리였다. 코시모 1세는 우피치 미술관에서부터 피티 궁전으로 이어지는 비밀통로를 만들었다. 베키오 궁전에서 정사를 논하다가 어느 누구의 눈에도 띠지 않고 비밀통로를 통해 아늑한 처소로 돌아올 수 있었다. 복잡한 피렌체 시내와는 전혀 다른 낙원이었다. 메디치 가문의 마지막 후예인 안나 마리아 루도비카가 이 궁전에서 숨을 거두면서, 피티 궁전은 이후 피렌체를 지배한 가문과 통일 이탈리아 정부의 집무실로도 쓰였다.
르네상스를 상징하는 메디치 가문이 모아들인 모든 예술품이 이곳으로 집결되었고, 대가 끊긴 이후에는 피렌체에 전부 기증되었다. 노블리스 오블리주. 그 덕에 피렌체는 전 세계의 문화 중심지 중 하나가 되어 관광객들을 끌어들이고 있다. 조상 잘 만난 덕에 호사를 누리는 가장 전형적인 예를 볼 수 있는 곳이 바로 피렌체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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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라티나 미술관 내부 모습. 그림들이 주렁주렁 걸려 있다. | |
팔라티나에 가는 가장 큰 이유는 예쁜 그림들을 보고 싶어서다. 우피치에 걸려있는 걸작들에 비하면 팔라티나에 있는 그림들은 작아 보인다. 하지만 은밀하고 비밀스럽다. 창덕궁의 숨겨진 후원으로 들어가는 것 같다. 살짝 문을 열고 아무도 없는 큰 거실에 들어선 기분. 텅 빈 공간에서 그림들이 밤하늘의 별들처럼 쏟아져 내리는 환희. 르네상스 시대에 가장 멋진 초상화를 그린 두 명의 화가. 라파엘로와 티치아노. 두 거장이 그린 그림 속 인물들은 멋있고 예쁘다. 아름답고 우아하다.
팔라티나는 그런 멋진 인물들을 마음껏 만나보고 싶을 때마다 찾아가서 한가하게 거닐곤 한다. 이곳에는 우피치와 같은 떠들썩한 소음이 없다. 고요함 속에서 중세로 거슬러 올라가 메디치 가문의 일원이 된 것 같은 착각이 인다. 그림 앞에 서서 초상화 속 인물들과 눈을 맞추면서 그들이 살았던 시절을 상상한다. 그러면 옛날 미술관이 주는 정취에 빠지게 된다. 어디든 앉아서 바쁘지 않게 멍하니 바라보아도 되는 관광지에서의 휴식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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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라티나 미술관에서 내려다본 피렌체 풍경. | |
언제나 베키오 다리를 건너서 피티 궁전으로 향한다. 팔라티나가 있는 곳은 아르노 강 너머라는 의미를 지닌 올트라르노(Oltrarno). 미술관에서 나와 광장 앞 자그마한 카페에서 에스프레소 한 잔을 마시고 올트라르노를 둘러볼 준비를 한다. 가까이 피렌체를 가장 사랑했던 영국 시인 로버트 브라우닝이 살았던 카사 귀디(Casa Guidi)가 있고, 미켈란젤로가 그림을 모사하면서 연구했다는 브란카치 예배당도 멀지 않은 곳에 있다. 피렌체 도심과는 전혀 다른 올트라르노의 한가한 정취를 만끽하면서 르네상스를 가슴에 안을 수 있는 곳이다.
1.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의 「유디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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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 「유디트」(Judith), 1618-19, 114*93.5 | |
옛날 여류 화가에 대한 이야기는 그 자체로 매력적인 부분이 많다. 라혜석이 그렇고,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Artemisia Gentileschi, 1593~1656) 또한 그렇다. 아르테미시아는 최초의 여류 화가로 불릴 만큼, 남자밖에 없던 화단에 나타나 경탄을 불러 일으켰다. 종교화는 여성의 능력 밖의 일이라고 여겨지던 시절이라 그녀의 등장은 더욱 화제가 되었다. 그녀가 주문자에게 보낸 편지 중에는 이런 내용이 있다.
“나는 여자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보여줄 것입니다. 당신은 카이사르의 용기를 가진 한 여자의 영혼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아르테미시아의 편지 내용을 되새길 때마다 멋진 존재라는 생각을 갖게 된다.
그녀는 최초의 페미니즘 화가라고 불리기도 한다. 남성이 그린 유디트와 여성이 그린 유디트의 의미는 무척이나 다를 것이다.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담은 바구니, 높은 곳을 바라보는 유디트의 매서운 시선. 볼 때마다 무척 강렬함이 와 닿는다. 그것은 카라바조와는, 보티첼리와는 또 다른 아르테미시아의 세계관이자 예술관이다.
2. 라파엘로의 「아뇰로 도니의 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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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파엘로, 「아뇰로 도니의 초상」 (The Portraits of Agnolo Doni), 1506년경, 65*45 | |
우피치에 걸려있는 미켈란젤로의 「성가족」은 「도니 톤도」라는 제목으로 불리기도 한다. 이 원형 그림(tondo)을 도니라는 사람이 주문했기 때문이다. 바로 그 주인공, 아뇰로 도니의 초상화는 라파엘로(Raffaello Sanzio, 1483~1520)가 그렸다. 당대에 메디치 가문도 아니고, 이렇게 미켈란젤로와 라파엘로, 두 거장에게 그림을 주문할 정도의 인물은 극히 드물었다. 그것은 금력뿐만 아니라 심미안까지 필요한 일이었을 테니까.
「아뇰로 도니의 초상」을 보고 있으면 왜 교황을 비롯한 수많은 인간들이 라파엘로에게 자신의 초상화를 맡기고 싶었는지 느껴진다. 이 작품 역시 깔끔하고 단순하지만, 인물을 매력적으로 살려내고 있다. 아뇰로 도니는 피렌체의 거물 중 하나인 스트로치 가문의 마달레나와 결혼했다. 그는 라파엘로에게 부부의 초상화를 전부 주문했다. 팔라티나 미술관에서는 라파엘로의 다른 그림들과 함께 나란히 걸려있는 부부의 초상화를 볼 수 있다. 서로 마주앉은 자세로, 이어지는 것 같은 두 점의 그림을 보? 참으로 금슬이 좋은 부부였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3. 라파엘로의 「대공의 성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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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파엘로, 「대공의 성모」(Madonna del Granduca), 1505년경, 84.4*55.9 | |
종교를 떠나서, 라파엘로의 성모 그림은 보는 이 모두를 편안하게 해준다. 「대공의 성모」뿐만 아니라 그가 그린 성모 마리아와 아기 예수 그림들은 어디에 걸어놓아도 안정감을 만들어낸다. 우르비노 출신의 라파엘로는 일찍 어머니를 여의었고, 십대 시절 북부 이탈리아를 방황하면서 지냈다.
막 스무 살을 넘어선 1504년경 라파엘로는 처음으로 피렌체 땅을 밟은 것으로 추정된다. 천재였던 라파엘로의 눈에 비친 피렌체 거장들의 모습은 어땠을까. 그는 닥치는 대로 그림을 보면서 거장들의 위대함을 받아들였다. 「대공의 성모」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영향이 많이 느껴지는 작품이다. 아직은 젊은이의 소박한 감성이 담겨있는 것 같다. 이처럼 라파엘로의 초창기 모습을 여러 작품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게 팔라티나 미술관의 매력이기도 하다. 이 그림이 「대공의 성모」라는 제목이 붙게 된 것은 토스카나 대공 페르디난도 3세의 소장품이었기 때문이다.
4. 티치아노의 「피에트로 아레티노의 초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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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치아노, 「피에트로 아레티노의 초상화」 (Portrait of Pietro Aretino), 1545, 97*78 | |
피에트로 아레티노는 악독한 인간형이었다. 협잡꾼이었다. 그는 고관대작들의 약점을 잡아서 폭로하겠다면서 돈을 뜯어내곤 했다. 요즘으로 치면 스캔들을 들추는 황색저널 필자였던 셈이다. 펜은 칼보다 강하다라는 격언을 가장 악용한 당대 최고의 글쟁이였다. 심지어 미켈란젤로에게도 협박편지를 보냈던 아레티노가 드물게 절친했던 친구이자 막역한 동료가 바로 티치아노(Vecellio Tiziano, 1488?~1576)였다.
한 마디로 쿵짝이 잘 맞았다고나 할까. 티치아노는 아레티노의 초상화를 여러 점 그렸다. 어떻게 아레티노의 초상화가 팔라티나까지 오게 되었을까. 붉은 빛이 감도는 기품 넘치는 옷을 입었지만, 그의 눈을 보면 언제든 돌변해서
“이 그림은 나를 그린 티치아노의 걸작이니 얼른 사시오!” 하면서 돈을 긁어냈을 것만 같다. 그렇지만 역시 티치아노의 붓질이 오가면 그의 눈이 강렬하고 의지가 넘치는 것 같으니, 티치아노는 정말 초상화의 대가다.
5. 티치아노의 「젊은 영국인의 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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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치아노, 「젊은 영국인의 초상」(The Young Englishman), 1540/45년경, 111*93 | |
이 작품은 「청록색 눈을 가진 남자」라는 제목으로도 불린다. 눈을 보고 있으면 그런 제목을 붙인 이유를 누구나 느낄 수 있을 것이다. 티치아노에게 그림을 주문할 정도로 능력 있는 이 남자는 과연 누구일까.
이 남자가 누구인지는 아직까지 밝혀지지 않았다. 하지만 그가 누구인들 어쩌랴. 이제 한 폭의 그림으로 남아 영원히 살아있는 것을. 젊은이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무언가 중요한 일에 대해서 고민하고 있는 것일까. 깊은 번뇌가 아니어도 이처럼 진지한 눈빛을 바라보고 있으면, 그의 마음이, 내면이 어떤 식으로든 다가오는 것 같다. 티치아노의 자화상으로 추정되기도 하는 내셔널 갤러리에 있는 「남자의 초상」과 더불어,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두 점의 티치아노 초상화이다.
6. 카라바조의 「잠자는 큐피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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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라바조, 「잠자는 큐피드」(Sleeping Cupid), 1608, 72*105 | |
이 작품은 카라바조([Michelangelo da Caravaggio, 1573~1610)의 그림 중에서는 드물게 주문자와 제작연대가 정확하게 알려져 있다. 1608년 카라바조가 몰타에 있을 때 기사단장의 비서인 피렌체 출신의 수사 프란체스코 델란텔라의 주문을 받고 그린 작품이다.
처음 팔라티나에서 이 그림을 볼 때 카라바조의 작품이라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고 있었다. ‘큐피드를 저렇게 그린 건 도대체 어떤 화가일까’ 하는 호기심에 다가갔다가 카라바조의 그림임을 알게 된 작품이기도 하다. 단순한 배경을 뒤로 하고, 큐피드는 잠들어 있다. 그렇지만 편안하거나 태평해 보이지만은 않는다. 활과 화살도 파손되어 있다. 카라바조다운 역설, 역발상, 그러면서도 무언가를 생각하게 만드는 이끌림이 있다. 그러나 영영 큐피드의 생각은 알 수 없을 것 같다. 카라바조의 속내만큼이나.
7. 카라바조의 「안토니오 마르텔리의 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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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라바조의 「안토니오 마르텔리의 초상」 (Portrait of Fra Antonio Martelli), 1607/08, 118.5*95.5 | |
살인사건을 저지른 카라바조는 이후 도망자 신세를 면치 못했다. 결국 그가 다다른 곳은 기사단이 섬을 지키고 있는 말타였다. 그는 이슬람과 전설적인 전투를 치렀던 말타 기사단에 받아들여졌지만 여전히 사고뭉치였다. 그래도 당시에 남긴 몇몇 인물화는 기품이 넘친다. 루브르에 가면 기사단장 알로프 드 위냐쿠르의 대형 초상화가 있는데, 그 그림을 그리기 전에 습작처럼 그린 것으로 여겨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토니오 마르텔리의 초상」은 기사다운 근엄함, 중후함을 빛과 어둠 사이에서 잘 묘사하고 있다.
8. 필리피노 리피의 「바르톨리니 톤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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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피노 리피, 「바르톨리니 톤도」(Bartolini Tondo), 1452, 지름 135cm | |
톤도라는 원형 그림은 르네상스 시대의 형태 중 하나이다. 그런 점에서 필리피노 리피(Filippino Lippi, 1457~1504)의 「바르톨리니 톤도」는 원형 그림의 원조 격인 작품이다. 보티첼리, 미켈란젤로, 라파엘로 등이 같은 형식으로 걸작들을 남겼다. 리피는 보티첼리의 스승이기도 했다. 이 작품을 보면 리피의 인물들이 보티첼리에게 어떤 식으로 영향을 끼쳤는지 정확하게 느낄 수가 있다.
두 사람은 섬세하고 우아한 여인들을 화폭에 담았다. 「바르톨리니 톤도」라는 제목이 붙게 된 것은 로베르토 바르톨리니라는 비단 상인이 주문했기 때문이다. 성모의 자애로운 눈빛, 아기 예수의 호기심 어린 눈이 교차하고, 뒤에는 일을 하는 모습들이 묘사되어 있다. 종교와 비즈니스, 르네상스 시대의 피렌체에서는 언제나 편하게 결합되던 삶의 가장 중요한 부분들이었으니까.
9. 보티첼리의 「여인의 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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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티첼리, 「여인의 초상」(Portrait of a Woman), 1475년경, 61*40 | |
이 여인의 초상화는 「아름다운 시모네타」(The Beautiful Simonetta)라는 제목으로도 불린다. 시모네타가 누구인가. 제노바에서 태어나 베스푸치 집안의 며느리로 들어온 당대 최고의 미인이었다.
또한 그녀의 연인은 파치 가문의 음모에 의해 두오모에서 암살당한 ‘위대한 로렌초’의 동생 줄리아노였다. 수많은 예술가들이 그녀를, 그녀의 사랑을 시로 노래했고, 회화로 담아냈다. 보티첼리(Sandro Botticelli, 1445~1510)의 「비너스의 탄생」과 「프리마베라」 역시 그녀를 모델로 했다고 전해진다. 보티첼리의 다른 그림에 비하면 「여인의 초상」은 보다 정숙하고, 오똑 선 콧날이 드러나는 옆모습은 일견 차가워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단순한 배경 앞에 선 그녀의 옆모습은 여전히 아름다운 르네상스 시대의 미인상을 느끼게 만든다.
10. 루벤스의 「네 명의 철학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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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벤스의 「네 명의 철학자들」(The four Philosophers), 1611-12, 167*143 | |
이 그림에는 화가인 루벤스(Peter Paul Rubens, 1577~1640)자신이 있음에도 「네 명의 철학자들」이라는 제목이 붙었다. 전부 실존인물들인데 가장 왼쪽에 있는 게 루벤스 본인이고, 그 앞에 있는 인물이 동생인 필립이다.
필립은 펜을 들고 있는데, 루벤스의 또 다른 자아처럼 느껴진다. 펜으로 무언가를 표현하려는 것 같다. 그 옆에 있는 인물은 필립의 스승이었던 철학자 주스투스 립시우스이다. 뒤에는 세네카의 흉상이 있고, 네 송이의 백합이 투명한 화병에 꽂혀있다. 두 송이는 꽃이 피었고, 두 송이는 봉오리가 피기 전이다. 그것은 삶과 죽음의 문제이기도 하다. 동생 필립이 죽었고, 립시우스 또한 이 그림이 그려질 때에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삶과 죽음, 창작의 문제를 화가 자신을 포함한 철학자들을 통해 다시 한 번 생각하게끔 만드는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