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ork Text:
체콥이 열 일곱살이 되는 날, 술루는 한숨처럼 웃으며 그림 한 장을 건네주었다. 처음 보는 여자가 눈을 감고 앉아있다. 창 틀에 팔을 얹고, 무심한 얼굴. 창 너머로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창문이라는 것은 그저 하나의 관념적인 것으로 그들에게 벽을 넘어서는 것은 이제 존재하지 않았다. 체콥은 자신이 아는 세계와 같지만 같지 않은 풍경을 잠시 바라보다가 시선을 술루에게 옮겼다. 설명을 요구하는 얼굴에 술루가 난처한 듯 뺨을 긁적였다. 체콥은 무표정하게 그림을 내려놓았다.
“네 어머니...”
“난 엄마가 없어.”
“체콥.”
“나는 기차에서 태어났고, 기차에서 자랐고, 기차에서 죽을거야, 술루.”
“그래서?”
“나에게 중요한 것은 내 곁에 있는 사람이야.”
“네가 있게 해 주신 분이야.”
“하지만 지금까지 내가 존재하는 것은 술루, 당신이 있어서야.”
체콥의 시선에 술루가 어깨를 움츠렸다. 그것은 거의 반사적인 것으로 술루는 제 팔이 남의 시선 가운데 들어가는 것을 그다지 달가워하지 않아했다. 이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러려니 하는 것. 너무도 당연시 여기는 것이 술루에게만은 예외가 되고는 했다. 체콥은 다시 한 번 그림을 살폈다.
술루는 그림을 곧잘 그리고는 했다. 대부분은 객실 안의 사람들. 잠을 자거나, 무언가를 우물거리거나, 떠드는 모습. 이따금씩은 체콥이 알지 못하는 것을 보여주었다. 아직 얼어붙기 전의, 벽 너머에 존재하는 것들. 흔들리지 않는 바닥과 소음이 없는 세계. 노래하듯 중얼거리는 목소리 끝에서 웃음이 피었고 망설임없이 움직이는 손 끝에서 존재하지 않는 현실이 모습을 드러낸다. 체콥은 술루의 그림이 좋았다.
"술루."
"응?"
"당신이 내 아빠야?"
짙은 푸른 눈이 술루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체콥의 질문은 언제나 직설적이었고, 언제나 예상을 넘어서곤 했다. 잠시 그 눈동자를 응시하던 술루가 푸스스 고개를 저으며 웃었다.
"네가 태어났을 때 난 고작 네 살이었어. 아이를 만들기에는 너무 어리다고 생각하지 않아?"
"정말?"
"내 나이가 궁금하면 커크에게 물어보던가."
"난 항상 당신이 내 아버지가 아닐까 생각했어."
"어째서?"
"날 돌보는 것은 당신인데, 당신은 여자가 아니잖아."
술루가 재밌다는 듯 웃었다. 체콥이 느릿느릿 술루의 품에 파고들었다. 제 몫의 자리가 있음에도 체콥은 언제나 술루의 자리에 파고들었다. 그것은 둘의 키가 거의 엇비슷할 정도로 자란 지금에도 마찬가지여서, 자리는 비좁았지만 술루는 체콥을 밀어내지 않았고 그것을 핑계로 체콥은 저 좋을대로 술루에게 어리광을 부리곤 했다. 평소처럼, 아플 정도로 조여드는 팔을 밀어낼 생각도 못하고 술루가 체콥의 머리를 쓸었다.
"어째서 날 돌보는 거야?"
"글쎄......."
그 품에 고개를 묻은 채 체콥은 술루의 몸을 더듬었다. 곧은 목덜미와 어깨를 타고 내려온 손이 팔을 쓰다듬는데에는 그리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처음으로, 술루가 경련하듯 몸을 떨었다. 하지만 뿌리치지 않는다. 체콥은 그것에 만족하며 손을 더 미끄러트렸다.
"아파?"
뭉툭하게. 이제는 둥그렇게 살이 올라 아문 자리를 타고 손가락이 춤을 춘다. 체콥은 술루가 헛숨을 들이키는 소리를 들었다.
"술루."
존재하지 않는 팔도 아플 수 있을까. 체콥은 언제나 그것이 궁금했다. 조심성 없는 손길이 절단면을 스치면 술루는 마치 나비처럼 가쁘게 숨을 들이쉬었다. 한 손 가득 잡히는 팔을 매만지다 조금 더 힘을 주었다.
"체콥."
술루가 한숨처럼 속삭였다. 체콥은 술루를 놓아주지 않았다. 매끈한 피부를 쓸고 다시 한 번 힘을 주어 팔을 잡았다.
“어떤 느낌이야?”
"무슨 짓이야?"
동시에, 억센 팔이 목덜미를 잡고 끌어내었다. 숨이 막힌다. 어찔한 머리를 흔들었다. 이어 익숙한 손이 체콥의 어깨를 잡았다.
"커크."
그제야 몸이 자유로워졌다. 체콥은 제가 술루의 자리에서 완전이 벗어났음을 알았다. 어두침침한 촛불 아래서 술루의 표정은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 다만 목소리가 엉망으로 갈라졌다. 아팠을까. 조금 더 했으면, 그는 울었을까. 궁금했지만 커크는 더 이상 체콥이 술루에게 다가서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넌 저 녀석에게 너무 물러."
"그래?"
술루가 느리게 고개를 저었다. 흘러내린 외투를 끌어올려 드러난 왼쪽 팔을 가린다. 그 움직임이 끝나고나서야 커크가 손 끝으로 그림을 들어올렸다. 체콥은 재빠르게 그것을 뺏어들었다.
“내거야.”
“그래, 꼬맹이.”
커크가 입술 끝으로 웃었다. 그의 시선은 내도록 술루에게 박혀있었다. 체콥은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기차가 작게 흔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