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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무르 왕조

다른 표기 언어 Timurid dynasty

요약 정복자 티무르의 자손들이 세운 투르크 왕조(15~16세기).

이란과 중앙 아시아에서 예술과 학문을 찬란하게 부활시킨 것으로 유명하다.

1405년 티무르가 죽은 후 그의 정복지들은 두 아들에게 분배되었다. 1407년에 죽은 미란샤는 이라크·아제르바이잔·모간·시르반·조지아를 차지했고 샤 로흐는 호라산을 물려받았다. 1406~17년에 샤 로흐는 마잔데란·세이스탄·트란속사니아·파르스·케르만뿐만 아니라 미란샤의 영토까지 손에 넣으면서 영토를 확장해 시리아와 후지스탄을 제외한 티무르 제국을 다시 통일했다. 그는 또한 중국과 인도에 대한 명목상의 종주권을 지니게 되었다.

샤 로흐의 재위기간(1405~47) 동안 경제 번영이 회복되었고, 티무르의 출정으로 입은 많은 피해들이 복구되었다. 무역과 예술 공동체들이 수도인 헤라트에 생겨났고 도서관이 세워졌으며, 이 수도는 새롭고 예술적인 찬란한 페르시아 문화의 중심지가 되었다. 건축 분야에서 티무르 왕조는 많은 셀주크 전통을 이어받아 발전시켰다. 터키옥색과 푸른색 타일을 사용하여 건물의 정면을 복잡한 선형과 기하학적 문양으로 장식했다. 때로는 건축의 내부도 비슷하게 장식하기 위해 그림과 스투코로 장식했다. 사마르칸트에 있는 티무르의 능인 구르에아미르는 가장 대표적인 표본이다. 다각형 방 위쪽에 솟은 타일을 붙인 반구형 둥근 천장은 세로 홈이 새겨졌고 약간 볼록한 모양이다.

아크 사라이 중에서 티무르의 궁전은 1390~1405년 케시에 세워졌는데, 단지 기념비적인 성문만이 다시 채색된 타일 장식과 함께 남아 있다. 시라즈·타브리즈·헤라트에서는 세밀화파들이 티무르 왕조하에서 번영을 누렸다. 헤라트에 모였던 예술가들 중에는 베자드(1525경 죽음)가 있는데, 그의 극적이고 강렬한 화풍을 페르시아의 필사화에서는 필적할 만한 것이 없었다. 바이순쿠르 작업장은 가죽 가공, 제본, 장식서체, 나무와 비취조각 등의 작업이 행해지던 곳이다. 그러나 금속세공에서는 티무르 왕조의 예술품이 결코 이전의 이라크 유파를 따라가지 못한다.

샤 로흐가 죽은 후 곧 뒤따른 내부 분열이 티무르 왕조의 결속을 서서히 파괴했다. 1449~69년에는 티무르의 아부 사이드와 카라 코윤류(흑양조)의 우즈베크 동맹세력과 아크 코윤류 사이의 끊임없는 싸움으로 점철되었다. 아부 사이드가 1469년 살해되고, 아크 코윤류가 서부에서 방해를 받지 않고 다스리는 동안 티무르 왕조는 호라산으로 물러났다. 그럼에도 학문, 특히 문학·역사서술·세밀화 분야는 계속 번영했다. 마지막으로 가장 위대한 티무르인이었던 후사인 바이카라(1478~1506)의 궁전에서는 시인 자미, 화가 베자드와 샤 무자파르, 그리고 역사가인 미르흐완드와 흐완다미르 등 기라성 같은 인물들을 후원했다.

재상인 미르 알리 시르 자신은 차가타이 투르크 문학을 일으키고, 페르시아어의 부활을 조장했다. 비록 헤라트의 마지막 티무르인이었던 바디 앗 자만이 1506년 우즈베크 무하마드 샤이바니의 군대에 살해되었지만, 페르가나의 티무르 왕조 통치자 자히르 웃 딘 바부르는 왕조 패망 후에도 계속 살아남아 1526년 인도에서 무굴 제국 황제들의 계보를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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