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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르툴리아누스

다른 표기 언어 Tertullianus 동의어 퀸투스 셉티미우스 플로렌스 테르툴리아누스, Quintus Septimius Florens Tertullianus, 터툴리안, Tertulian
요약 테이블
출생 155경/160, 카르타고
사망 220 이후, 카르타고

요약 최초의 라틴 교부로서 그 뒤 1,000년 동안 서방 그리스도교의 어휘 및 사상 형성의 기초를 이룩했다.
그의 생애에 관해서는 한 세기 뒤의 사람들이 쓴 문서들과 본인의 저서에 나오는 모호한 언급들에 의존한다. 당시 서방 세계의 문화 및 교육 중심지인 카르타고에서 태어났다. 로마에 있을 때 그리스도교 운동에 관심을 갖기는 했으나,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것은 2세기말경 카르타고로 돌아간 뒤의 일이다. 초기 저서들인 <순교자에 대해서>, <민족에 대해서> 등에서 일부 그리스도교도들의 태도와 신앙, 순교자들의 용기와 결단, 엄격한 도덕성, 유일신에 대한 타협 없는 신앙 등에 감명을 받았다고 적어 놓았다. 그는 아직 세례를 받지 않은 초신자들과 기성 신자들을 가르치는 교사로서, 저술을 통해 그리스도교 신앙과 관행을 변호하는 변증가로서 재능을 발휘하여 아프리카 교회의 지도자로 떠올랐다.

테르툴리아누스(Tertullianus)

ⓒ Serge Lachinov/wikipedia | Public Domain

개요

최초의 라틴 교부(敎父)로서 그뒤 1,000년 동안 서방 그리스도교의 어휘 및 사상 형성의 기초를 이룩했다(→ 라틴어).

생애

그의 생애에 관한 지식은 거의 전적으로 한 세기 뒤의 사람들이 쓴 문서들과 본인의 저서에 나오는 모호한 언급들에 의존한다.

그의 생애의 큰 윤곽은 이러한 지식을 토대로 잡아왔지만, 세부 내용들에 대해서는 오늘날까지도 학자들의 논쟁 대상이 되고 있다. 당시(대략 155~160경) 로마에 버금 가는 서방 세계의 문화 및 교육 중심지인 카르타고에서 태어나, 훌륭한 스승 밑에서 문법·수사학·문학·철학·법률을 배웠다. 초기생애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진 바 없다. 부모는 이교도들이었고, 아버지는 아프리카 총독에게 할당된 아프리카에 주둔한 군단의 백인대장(百人隊長 : 임관되지 않은 장교)이었던 듯하다.

카르타고에서 공부를 마친 뒤 10대 후반이나 20대 초반에 로마에서 유학했고, 더 공부한 뒤 변호사 개업을 한 듯하다. 6세기 비잔틴(동로마) 제국 황제 유스티니아누스의 법학자들이 편집한 로마 법 학설집 〈법률요람 Digest〉에는 법률가 테르툴리아누스가 언급되는데, 비록 논쟁거리이긴 하지만 그일 가능성은 거의 없다.

로마에 있을 때 그리스도교 운동에 관심을 갖기는 했으나,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것은 2세기말경 카르타고로 돌아간 뒤의 일이다.

개종에 얽힌 이야기는 남기지 않았지만 초기 저서들인 〈순교자에 대해서 Ad martyras〉·〈민족에 대해서 Ad nationes〉·〈변증 Apologeticum〉에서 어떤 그리스도교도들의 태도와 신앙, 순교자들의 용기와 결단, 엄격한 도덕성, 유일신에 대한 타협 없는 신앙 등에 감명을 받았다고 적어 놓았다. 2세기말에 카르타고 교회는 이미 그 규모가 커지고, 확고히 뿌리내리고, 잘 조직되어 북아프리카에서 빠른 속도로 강한 세력이 되어가고 있었다.

225년에는 로마령 아프리카의 두 속주 누미디아와 프로콘술라리스에 주교들이 70명가량 있었다. 테르툴리아누스는 아직 세례를 받지 않은 초신자들과 기성 신자들을 가르치는 교사로서, 저술을 통해 그리스도교 신앙과 관행을 변호하는 변증가로서 재능을 발휘하여 아프리카 교회의 지도자로 떠올랐다. 4세기 성서학자 히에로니무스(제롬)에 따르면 테르툴리아누스는 사제 임명을 받았다고 하지만, 오늘날 일부 학자들은 이의를 제기했다.

저술활동

그뒤 20~25년 동안, 즉 40대 초반에서 60대 중반까지는 저술활동에만 전념했다.

열정적이고 맹렬한 성격을 지닌 그는 고전 라틴 문체를 발전시킴으로써 비록 고대 그리스도교 세계에서 가장 심오한 저자는 아닐지라도 생생하고 신랄한 호교론자가 되었다. 그의 저서들에는 흥미롭고 기억할 만한 구절들, 독창적인 격언들, 과감하고 반어적인 언어유희, 재담, 풍자, 그가 만들어낸 수많은 단어들, 논적(論敵)에 대해 끊임없이 퍼붓는 비판 등으로 가득하다. 그러나 아내에게 보낸 소책자 〈아내에게 Ad uxorem〉에서 볼 수 있듯이 다정다감한 면도 갖고 있었고, 인내에 대해서 쓴 소책자 〈인내에 대하여 De patientia〉에서처럼 자기를 비판하고 반성하는 면도 갖고 있었는데, 이것은 스스로도 인정했듯이 분명히 그의 삶에서 찾아보기 힘든 면이었다.

역사적인 인물인 그는 행위보다는 글 때문에 더욱 많이 알려져 있다.

그가 글을 통해서 보여준 관심의 폭과 열정은 다른 그리스도교도들에게 과거에는 살펴보지 않던 삶과 사상 분야들을 연구하도록 동기를 불어넣어 주었다. 당대의 다른 그리스도교 저자들과 마찬가지로 〈변증〉을 비롯한 신앙을 변호하는 책들을 썼고, 특정 논적들을 비판한 신학 논문들을 썼는데, 〈마르키온을 비판함 Adversus Marcionem〉(마르키온은 유대인들의 악한 신이 세계를 창조했다고 믿은 아나톨리우스파 이단자임)·〈헤르모게네스를 비판함 Adversus Hermogenem〉(헤르모게네스는 하느님이 이미 존재하던 물질을 가지고 세계를 창조했다고 주장한 카르타고 출신 화가임)·〈발렌티누스를 비판함 Adversus Valen- tinianos〉(발렌티누스는 알렉산드리아 출신 영지주의자, 즉 종교적 이원론자임)·〈육체의 부활에 관하여 De resurrectione carnis〉 등이 그것이다.

또한 그리스도교 최초의 세례에 관한 책 〈세례에 관하여 De baptismo〉, 그리스도교의 인간론을 다룬 책 〈영혼에 관하여 De anima〉, 기도와 예배에 관한 수필집 〈기도에 관하여 De oratione〉, 모든 이단설을 다룬 논문 〈이단 처방에 관하여 De praescriptione haereticorum〉를 썼다. 변증 및 논쟁서들 외에 당시 그리스도교도들이 직면하던 도덕과 실천 문제에 관한 쟁점들도 다루었는데, 〈여성들의 복장에 관하여 De pultu feminarum〉에서는 적절한 복장과 화장 문제, 〈군대의 훈장에 관하여 De corona〉에서는 군복무 문제, 〈박해 때 도망하는 문제에 관하여 De fuga in persecutione〉에서는 박해를 당할 때 도망해야 하는지의 문제, 〈정절 권고에 관하여 De exhortatione castitatis〉·〈일부일처제도 De monogamia〉에서는 혼인과 재혼 문제, 〈구경거리들에 관하여 De spectaculis〉에서는 예술·극장·공공 축제들의 문제, 〈우상숭배에 관하여 De idollatria〉에서는 다른 신들을 숭배하는 문제, 〈참회에 관하여 De poenitentia〉에서는 세례받은 뒤의 참회 문제를 각각 다루었으며, 그외 다른 책들도 썼다.

몬타누스주의자로서의 테르툴리아누스

210년 이전 테르툴리아누스는 정통교회를 떠나 당시 소아시아에서 아프리카까지 퍼져 있던 몬타누스주의(2세기경 프리지아 예언자 몬타누스가 창시함)로 알려진 새로운 예언분파운동에 가담했다.

당시 그리스도교도들의 게으른 생활에 불만을 품고 있던 그는 세상의 종말이 가까워졌다고 외치면서 엄격한 도덕생활을 강조한 몬타누스주의의 교리가 마음에 들었다. 그는 세상의 생활 방식에 조금이라도 타협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은 몬타누스주의라는 이 새로운 운동의 대변자가 되어 이 운동을 옹호하는 데 헌신했다.

그러나 몬타누스주의자들조차도 그가 만족할 만큼 엄격하지 않았던 까닭에 결국 그들과 결별하고 새로운 분파를 세웠는데, 이 분파는 5세기까지 아프리카에 존속했다. 전승에 따르면 그는 노인이 될 때까지 살았다고 한다. 그의 마지막 저서들은 220년경에 쓴 것으로 추정되지만, 그가 죽은 연대는 알려져 있지 않다.

테르툴리아누스에 대한 평가

대부분의 고대 그리스도교도들은 그가 몬타누스주의로 배교(이전의 신앙을 배척함)한 일을 용서하지 않았고, 후대의 그리스도교 저자들도 가끔씩 그를 언급했으나 매우 냉정했다. 그러나 조금은 내키지 않는 태도로 그의 문학적 재능과 예리한 지성을 인정했다.

오늘날 학자들은 이같은 과거의 견해에 동조하지 않는다. 19, 20세기에는 그의 저서들이 폭넓게 읽히고 연구되어왔으며, 서방에서 그리스도교도의 삶과 사상이 발전하는 데 토대를 놓은 인물들 가운데 하나로 평가받는다. 테르툴리아누스는 일반적으로 그리스도교가 주변 문화에 타협하지 않은 채 존립해야 한다는 견해의 대표적인 옹호자로 꼽힌다. 하지만 최근 학자들은 이러한 해석을 수정하는 경향이 있다.

기질상 철학자라기보다는 도덕주의자였기 때문에 그는 "아테네 사람들이 예루살렘 사람들과 무슨 관련이 있는가?"라는 유명한 질문을 던졌으며, 그의 실천적·법률적인 성향은 후대 사람들이 라틴 그리스도교의 독특한 특징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는 당대 그리스도교 지식인들과 마찬가지로 그리스 로마 문화에 대해서 자신이 받아들일 수 있는 면과 배척해야 하는 면을 구분하여 그 가치들을 인정하고 높이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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