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과사전 상세 본문

출처 다음백과

코르테스

다른 표기 언어 Hernán Cortés, marqués del Valle de Oaxaca
요약 테이블
출생 1485년, 카스티야 에스트레마두라 메리다 근처 메데인
사망 1547년 12월 2일, 세비야 근처 카스티예하데라쿠에스타
국적 스페인

요약 아스텍 제국을 멸망시키고 멕시코를 스페인 왕의 영토로 만들었다. 1519년 2월 18일 유카탄 해안을 향해 떠날 때, 코르테스는 11척의 배와 508명의 병사, 약 100명의 선원과 말 16필을 거느렸다. 그는 타고 온 배들을 모조리 불태움으로써 배수진을 치고 원주민 정복에 전력투구했다. 마침내 베라크루스라는 도시를 건설, 아스텍족과 전투를 벌이면서 아스텍족의 수도인 테노치티틀란을 차지했다.
그러나 테노치티틀란의 거리와 운하를 차례로 정복해 카리브 해에서 태평양까지 뻗어 있는 거대한 영토의 절대적 통치자가 되었을 때, 그를 파괴하기 시작한 것은 바로 스페인의 정치와 관료사회였다. 그는 카를로스 1세의 냉대와 관료들의 지속된 비난으로 환멸을 느꼈다. 그리고 멕시코로 돌아가던 중 죽었다.

코르테스 (Hernán Cortés)

스페인의 정복자

ⓒ Escarlati / wikipedia | Public Domain

개요

아스텍 제국을 멸망시키고(1519~21) 멕시코를 스페인 왕의 영토로 만들었다.

마르틴 코르테스 데 몬로이와 도냐 카탈리나 피사로 알타마리노의 아들로, 유서 깊은 명문 집안의 혈통을 이어받았다. 어렸을 때부터 매우 영리하고 뛰어난 재주를 보였으므로, 14세가 되자 그의 부모는 스페인 중서부에 있는 살라망카로 유학을 보냈다. 그러나 젊은시절의 그는 무자비하고 오만하며 짓궂고 싸움을 좋아했다. 코르테스는 '여자들에게 빠져들었고' 시골생활에 실망했으며, 얼마 전 콜럼버스가 발견한 서인도제도의 이야기에 흥분했다.

그는 1501~09년 스페인령 서인도제도의 총독을 지낸 니콜라스 데 오반도와 함께 서인도제도에 갈 예정이었지만, 어떤 유부녀의 집에서 도망치다가 담장이 무너져 다치는 바람에 계획을 포기했다. 그후 이탈리아 전쟁에 참전할 생각에서 스페인 동쪽해안에 있는 항구 발렌시아로 떠났으나, 이탈리아로 가는 대신 거의 1년 동안 빈둥거리며 각지를 떠돌아다녔다.

서인도제도의 보물을 가득 싣고 그곳 정취를 물씬 풍기는 배들이 들어오는 스페인의 남쪽 항구들은 분명 그에게 더욱 매력적으로 느껴졌을 것이다. 마침내 그는 1504년 히스파니올라(지금의 산토도밍고) 섬으로 떠났다. 당시 나이 19세였다.

히스파니올라와 쿠바 시절

히스파니올라에 도착한 그는 농사를 짓는 한편, 시의회의 공증인이 되었으며, 처음 6년 동안은 자신의 지위를 확립하는 것으로 만족했던 것 같다.

매독에 걸리는 바람에 1509년 남아메리카 본토로 떠난 디에고 데 니쿠에사와 알론소 데 오헤다의 원정대에 끼지 못했다. 이 원정대의 탐험은 실패로 끝났다. 1511년 병이 다 낫자 그는 디에고 벨라스케스와 함께 쿠바 정복에 나섰다. 벨라스케스는 쿠바 총독에 임명되었고, 코르테스는 출납관 서기가 되었다. 코르테스는 '레파르티미엔토'(땅과 원주민노예 소유권)와 새로운 수도 산티아고에 맨 처음 지은 집을 하사받았다.

그는 어느 정도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지위에 올랐고, 식민지의 불평분자들은 그에게 지도자가 되어 달라고 요구하기 시작했다. 한편 코르테스는 벨라스케스가 구애하고 있던 여자의 동생인 카탈리나 후아레스와 연애사건을 일으켰다. 이 연애사건은 약속 파기, 투옥, 선상(船上) 감금, 2차례 탈출(하인으로 변장함), 강을 헤엄쳐 건너 성역으로 탈출하는 등 일련의 그 모든 우스꽝스러운 사건들로 이어졌다.

그러나 결국 코르테스는 카탈리나와 결혼하고 벨라스케스와 화해했다.

코르테스는 산티아고 시의 시장으로 2차례 선출되었으며, '그가 하는 모든 일, 풍채와 태도, 대화, 먹고 옷 입는 방식에서 거물의 풍모를 보인' 사람이었다. 그래서 본토에 식민지를 세우려는 그리할바의 노력이 진전을 보였다는 소식이 들어온 뒤, 벨라스케스는 그를 돕기 위해 코르테스를 파견하기로 결정했다.

코르테스를 새로운 원정대의 도독(都督 captain general)으로 임명한다는 협정은 1518년 10월에 맺어졌다. 코르테스는 신세계의 거칠고 혼란스러운 정치를 경험했기 때문에 벨라스케스가 마음을 바꾸기 전에 빨리 움직여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형제와 전우들이여, 참된 믿음으로 성 십자가 표지를 따르자. 이 표지 밑에서 우리는 정복할 것이므로"라고 선언한 깃발을 앞세우고, 무장한 많은 부하들과 함께 돌아다녔다. 그는 극적 감각, 행정관으로 쌓은 오랜 경험, 실패한 수많은 원정에서 얻은 지식, 무엇보다도 뛰어난 연설 능력으로 1개월이 채 지나기 전에 6척의 배와 300명의 병력을 모았다.

벨라스케스의 반응은 충분히 예측할 수 있었다. 질투가 난 벨라스케스는 원정대 지휘자를 다른 사람으로 바꾸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그보다 빨리 코르테스는 쿠바의 다른 항구에서 더 많은 병력과 배를 모으기 위해 바다로 나갔다(식민주의).

멕시코 원정

1519년 2월 18일 마침내 유카탄 해안을 향해 떠날 때, 그는 11척의 배와 508명의 병사, 약 100명의 선원과 말 16필을 거느리고 있었다.

더욱이 그는 벨라스케스에게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원한을 샀다. 그결과 함대 내부에는 불만을 품은 자들이 있었다. 이 문제를 즉시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벨라스케스의 함대 지휘관인 디에고 데 오르다스를 약탈 원정에 내보내는 것이었다. 본토에 상륙한 코르테스는 다른 어떤 원정대 지휘자도 한 적이 없는 일을 했다. 군대를 훈련하고 엄한 규율로 단련하여 응집력 있는 하나의 집단으로 통합한 것이다.

무엇보다도 그는 타고 온 배들을 모조리 불태움으로써 불만에 단호히 대처하겠다는 결의를 극적으로 표현했다. 이 간단한 행동으로 그는 배수진을 친 셈이었다. 그 자신과 부대 전체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원주민을 정복하는 일에 전력투구할 수밖에 없었다.

그 정복의 열쇠는 아스텍 제국 내부의 정치적 위기에 있었다. 지휘자로서 코르테스의 능력이 가장 분명히 드러난 것은 바로 상황을 재빨리 파악했다는 점이다. 이 능력 덕분에 그는 결국 20만 명이 넘는 원주민 동맹자를 얻을 수 있었다. 그가 처음에 공주를 사로잡은 것은 행운이었다.

아스텍족의 언어인 나와틀어를 사용하는 이 공주는 그의 '혀'가 되어주었고 원주민 문제에 대한 조언자가 되었으며, 나중에는 그의 정부(情婦)가 되었다. 아스텍족의 마지막 황제인 몬테수마의 복잡하고 수수께끼 같은 마음을 교묘히 움직여 마침내 자진해서 코르테스의 포로가 되게 한 것도 바로 공주였다. 아스텍족에 대한 코르테스의 2차례 전투를 제대로 평가하려면, 이 비범한 여자를 사로잡고 끝까지 충성하게 만든 그의 능력에 주목해야 한다.

코르테스의 아스텍 정복

아스텍 수도로 침입한 코르테스의 경로를 나타낸 지도

ⓒ Yavidaxiu / wikipedia | 3.0 BY CC

그러나 스페인의 정치적 책략과 질투는 코르테스가 각광을 받는 동안에도 내내 그를 괴롭혔다.

처음에 그의 문제는 벨라스케스에 관한 것이었고, 코르테스는 자신이 직접 멕시코 해안에 세운 도시 베라크루스의 총사령관 겸 재판장으로 선출됨으로써 이 문제를 처리했다. 이것은 간단한 편법이었지만, 법률과 도시 문제에 경험을 쌓은 사람이 아니면 그 진가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때부터 그의 권력은 쿠바 총독의 임명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스페인 왕의 소유인 한 도시의 권리에 의존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법적 안전장치도 코르테스가 거의 혼자 힘으로 아스텍족의 수도인 테노치티틀란을 차지했을 때(1520 중엽) 판필로 나르바에스가 이끄는 쿠바의 스페인군이 코르테스를 위협하는 것을 막아주지는 못했다.

코르테스는 야습으로 나르바에스를 무찔렀지만, 가장 무모한 지휘관인 페드로 데 알바라도에게 테노치티틀란을 맡겨놓고 해안으로 진군한 것은 '노체트리스테'(스페인군이 테노치티틀란에서 궤멸 상태로 퇴각한 재난)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그러나 코르테스는 이런 재난에는 얼마든지 대처할 수 있었다.

이보다 더 심각한 재난은 벨라스케스가 스페인에서 후안 로드리게스 데 폰세카 주교와 서인도제도 자문위원회를 통해 개시한 정치적 공격이었다.

코르테스가 테노치티틀란의 거리와 운하를 차례로 정복하여 마침내 그 도시를 파괴하고, 카리브 해에서 태평양까지 뻗어 있는 그 거대한 영토의 절대적 통치자가 되었을 때(1521), 그를 서서히 약화시켜 파괴하기 시작한 것은 바로 스페인의 정치와 관료사회였다. 아무리 정복자로서 성공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의 작전 지역이 정치권력의 중심으로부터 8,000㎞나 떨어져 있을 경우 그의 입지가 정치적 공격에 얼마나 취약한가를 코르테스는 충분히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자세한 장문의 보고서, 즉 카를로스 1세(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5세)에게 5통의 주목할 만한 편지를 보내 그것에 대처했다. 그는 원주민들의 지지를 받았고 비교적 자비로운 통치자로 인기가 있었기 때문에, 멕시코를 독립왕국으로 만들 수도 있었을 것이다. 사실 서인도제도 자문위원회가 두려워한 것도 바로 이 점이었다.

그러나 그는 왕에게 절대적 충성을 바치는 봉건세계에서 자랐기 때문에 독립왕국 건설에는 저항감을 느꼈다.

말년

1524년 그는 탐험과 정복에 대한 충동을 억누르지 못하고 온두라스의 밀림을 향해 남쪽으로 내려갔다.

이 비참하게 끝난 원정에서의 2년간에 걸친 힘겨운 생활은 그의 건강과 지위를 손상시켰다. 코르테스의 관리들은 그가 원정을 떠날 때 맡겨놓은 재산을 가로챘다. 이 관료들은 잔혹한 행정을 폈고 그로 인한 혼란이 스페인에 보고되어 스페인 당국의 우려를 불러일으켰다. 코르테스가 황제에게 보낸 5번째 편지는 자신의 무모한 행동을 애써 정당화하고 있으며, "폐하의 눈을 흐리게 만든 다양하고 유력한 경쟁자와 적들"을 신랄하게 공격하는 것으로 끝을 맺고 있다.

스페인 관료들은 루이스 폰세 데 레온이 이끄는 조사단을 보냈지만, 레온은 신대륙에 도착하자마자 죽었다. 코르테스는 그를 독살했다는 혐의를 받고 자기 영지로 은퇴할 수밖에 없었다.

1528년에 코르테스는 황제에게 직접 자신의 정당함을 호소하기 위해 스페인으로 떠났다. 그는 배에 보물을 가득 싣고, 방대한 수행원을 거느리고 있었다. 카를로스 1세는 톨레도에 있는 궁정에서 그를 맞이하여 도독(총독이 아닌)으로 승인하고, 바예 후작의 작위를 내렸다.

그는 또한 공작가문의 딸과 재혼했다. 1530년 아메리카 대륙의 스페인령 식민지인 누에바에스파냐로 돌아간 그는 그 지역이 무정부 상태에 빠져 있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너무 많은 비난(심지어는 그가 1530년에 죽은 첫 아내 카탈리나를 살해했다고 비난하는 사람도 있었음)이 그에게 쏟아졌다. 그는 자신의 지위를 거듭 주장하고 약간의 질서를 회복한 뒤, 멕시코 시에서 남쪽으로 약 50㎞ 떨어져 있는 쿠에르나바카의 영지로 은퇴했다. 이곳에서 그는 자신의 저택을 짓고 태평양 탐험에만 몰두했다.

마침내 총독이 임명되자, 1540년 코르테스는 스페인으로 돌아갔다.

이때쯤 그는 아주 환멸을 느끼게 되었고, 그의 생활은 갖가지 소송 때문에 비참해졌다. "나는 늙고, 가난하고, 빚더미에 올라앉아 있다…… 나는 여러 번 폐하에게 간청했다……" 결국 그는 멕시코로 돌아가도 좋다는 허락을 받았지만, 세비야 항에 도착하기도 전에 죽었다.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저자 또는 제공처에 있으며, 이를 무단으로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출처

다음백과
다음백과 | cp명Daum 전체항목 도서 소개

다양한 분야의 전문 필진으로 구성. 시의성 이슈에 대한 쉽고 정확한 지식정보를 전달합니다.

TOP으로 이동
태그 더 보기
세계사

세계사와 같은 주제의 항목을 볼 수 있습니다.



[Daum백과] 코르테스다음백과, Daum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저자 또는 제공처에 있으며, 이를 무단으로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