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과사전 상세 본문

출처 다음백과

칼리프조

다른 표기 언어 Caliphate

요약 예언자 마호메트가 죽은(632) 뒤 수세기 동안 이슬람 공동체를 비롯하여 그 통치권 아래 있는 영토와 민족들로 구성된 정교일치의 국가.

칼리프조(Caliphate)

ⓒ Mohammad adil/wikipedia | CC BY-SA 3.0

세속적인 권위와 때로는 정신적인 권위도 어느 정도 가진 칼리프가 통치하는 제국은 칼리프제가 시작되어 처음 2세기 동안 서남아시아 대부분, 북아프리카, 스페인으로 통치영역을 확대했다.

후기에는 그 계승분쟁으로 인해 쇠퇴기에 접어들다가 1258년 몽골이 바그다드를 파괴함으로써 붕괴되었다.

마호메트의 후계자를 뽑아 이슬람 사회의 정치적 지도자로 내세워야 할 필요성이 급박해지자 메카에 있던 일단의 원로 이슬람교도들이 마호메트의 장인인 아부 바크르를 칼리프로 지명했다. 그가 칼리프가 됨으로써 칼리프 선출에 대한 몇 가지 선례가 만들어졌다.

예를 들면 칼리프는 쿠라이시 부족 출신이어야 한다는 점 등이다. 초기 4대의 칼리프인 아부 바크르, 우마르 1세, 우스만, 알리의 시대는 후세에 순수 이슬람의 기념비적인 황금기였다. 이 시기에 이슬람 공동체의 행정·사법 조직이 확립되었고 마호메트가 시작한 이슬람을 새로운 지역에 확대하는 정책이 추진되었다. 630년대에 이슬람 제국은 시리아·요르단·팔레스티나·이라크를 정복했으며 645년 이집트를 비잔틴의 세력으로부터 빼앗았고, 북아프리카·아르메니아·페르시아로 여러 번 원정을 했다.

우스만이 암살되고 그의 후계자인 알리가 칼리프의 직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자 이슬람 공동체 최초의 종파분열이 일어났다.

알리의 정적으로 우스만의 집안인 우마이야 가문의 일원이었던 무아위야 1세는 661년 칼리프의 자리를 찬탈했다. 그의 치세중에 우마이야 칼리프조의 기틀이 잡혀 750년까지 존속했다. 무아위야 1세는 대체적으로 훌륭한 통치를 했으나, 그가 죽은 뒤 부족간·종파간 분열이 다시 일어났다. 680~685년에 3명의 칼리프가 있었으며 거의 20년 동안의 무력충돌을 겪은 뒤에야 차기 칼리프인 아브드 알 말리크가 다마스쿠스에서 우마이야 왕조 칼리프의 권위를 다시 확립할 수 있었다.

아브드 알 말리크는 또한 예루살렘에 반석 사원(Dome of the Rock)을 세운 것으로 유명하다. 그의 아들인 알 왈리드(705~715)의 통치 기간에 이슬람 군대는 북아프리카를 영구적으로 차지하고 원주민인 베르베르족을 이슬람교로 개종시켰으며, 이베리아 반도에 있던 서고트 왕국이 멸망하자 이베리아 반도의 대부분을 침공했다.

또한 동방으로도 진출하여 인더스 강 유역에 이슬람 정착지를 만들었다. 그러나 우마이야 왕조의 권력은 한번도 확고한 적이 없었으며 칼리프 히샴의 오랜 통치(724~743) 후 급격하게 붕괴되었다. 747년 우마이야 왕조에 대한 큰 반란이 일어났으며, 750년 우마이야 왕조 마지막 칼리프인 마르완 2세는 대(大)자브 전투에서 아바스 가문의 추종자들에게 패했다.

마호메트 삼촌의 후예인 아바스 칼리프조가 반란을 승리로 이끌 수 있었던 것은 여러 경건주의자, 극단론자, 단순불만세력들의 호응을 얻은 덕분이었고 특히 시아파의 도움이 중요한 요소로 작용했다.

시아파는 칼리프 위(位)는 당연히 알리의 후손이 차지해야 한다는 의견을 가진 주요 불만세력이었다. 그런데 아바스 가문 자신이 권력을 잡음으로써 시아파의 기대를 저버리자 시아파는 하나의 종파로 발전하여 전통적 다수파인 수니파의 영원한 적이 되었으며 이들은 이따금 기존 정부에 대해 반란을 일으켰다.

아바스조의 초대 칼리프인 앗 사파흐(749~754)는 우마이야 가문을 몰살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우마이야 가문의 중요 인물들 중에서 아브드 알 라흐만이 유일하게 살아남아 스페인으로 도망가 그곳에서 우마이야계 왕조를 세웠다. 이 왕조는 1031년까지 계속되었다. 786~861년, 특히 하룬(786~809)과 알 마문(813~833)의 통치기간이 아바스 왕조의 전성기였다.

아바스 왕조의 동방진출정책은 알 만수르가 수도를 763년에 바그다드로 옮기고, 뒤에 비아랍계와 혼인정책을 썼으며, 또한 터키족과 슬라브족 같은 이민족을 궁정 수비대로 채용했던 사실에 잘 나타나 있다. 칼리프 알 마문 통치 시절에는 페르시아의 예술과 사상이 꽃피었고, 페르시아 관료들이 요직을 차지했다. 861년 이후 무정부 상태가 되면서 반란이 제국을 위태롭게 했다. 튀니지와 동페르시아는 바그다드를 명목상의 종주국으로만 인정하는 세습 총독들에게 넘어갔다. 다른 지방들도 점차 확실한 수입원이 되지 못했다.

시리아의 카르마트파와 아프리카의 파티마 왕조를 포함한 시아파와 유사 집단들이 아바스 칼리프조의 종교적·정치적 권위에 도전했다.

아바스 왕조는 945년 북서부 페르시아 지방의 거친 부족인 부와이흐가(家)가 바그다드를 점령함으로써 끝이 났다. 그들은 아바스 왕조의 칼리프를 명목상의 국가원수로 남겨놓았다. 호라산과 트란스옥사니아에서 일어난 사만 왕조와 중앙 아시아와 갠지스 강 유역의 가즈나 왕조는 아바스 왕조 칼리프들을 수니 이슬람교도의 정신적 지도자들로 인정했다.

반면에 파티마 왕조는 920년 튀니지에 있는 알마디야를 수도로 새로운 칼리프 통치국가를 선포했으며 아바스 왕조를 찬탈자라고 혹평했다. 스페인의 우마이야 왕조 통치자인 아브드 알 라흐만 3세는 928년 아바스 왕조와 파티마 왕조 양쪽에 대항해 자신이 칼리프라는 명칭을 사용했다. 아바스 왕조의 명목상 귄위는 1171년 살라흐에 의해 이집트에서 복원되었다. 1055년 부이 왕조로부터 술탄의 직위를 빼앗았던 셀주크 왕조가 쇠퇴함에 따라 아바스 왕조는 다시 권력을 되찾기 시작했다.

칼리프 안 나시르(1180~1225)는 동쪽 몽골과의 분쟁을 외교적 수완으로 잘 해결했으나, 알 무스타심(1242~58)은 그러한 성과도 거두지 못했으며 몽골이 바그다드를 공격할 때 피살되었다. 이로써 바그다드의 아바스 칼리프조는 끝이 났다. 아바스 왕조의 한 후손이 몇 년 후 카이로에 불려가 괴뢰 정부인 칼리프 국가를 세웠는데 이 나라는 1517년까지 계속되었으나 실제 권력은 전혀 없었다(부이 왕조).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저자 또는 제공처에 있으며, 이를 무단으로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출처

다음백과
다음백과 | cp명Daum 전체항목 도서 소개

다양한 분야의 전문 필진으로 구성. 시의성 이슈에 대한 쉽고 정확한 지식정보를 전달합니다.

TOP으로 이동
태그 더 보기


[Daum백과] 칼리프조다음백과, Daum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저자 또는 제공처에 있으며, 이를 무단으로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