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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민

다른 표기 언어 Li Shihmin , 李世民 동의어 Li Shimin, 태종, 太宗, 문무대성대광효황제, 文武大聖大廣孝皇帝, 소릉, 昭陵
요약 테이블
출생 600
사망 649
국적 중국, 당(唐)

요약 중국 당(唐:618~907)나라의 실질적인 창건자이자 제2대 황제(626~649 재위).
(병). Li Shimin. (웨). Li Shihmin.

이세민(李世民)

당 태종, 당나라의 창건자, 제 2대 황제

ⓒ Hardouin / wikipedia | Public Domain

묘호는 태종(太宗). 아버지인 고조(高祖) 이연(李淵)을 도와 당의 창건에 결정적 계기가 되었던 반란(618)을 주도했다.

재위기간중 돌궐족을 몰아냈고 중국을 통일했다.

이세민은 한족과 선비족(鮮卑族)의 혼혈인 귀족가문의 자손으로, 수(隋)나라 태원유수(太原留守)인 이연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20세도 되기 전인 618년 아버지에게 무너져가는 수나라에 대해 반기를 들 것을 권유했으며, 새로 세운 당나라의 군대를 이끌고 다른 11명의 경쟁자들을 무찔러 천하를 장악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626년 고조의 뒤를 이어 황제가 되었고, 649년 죽을 때까지 제위에 있었다. 당시 중국은 선비족의 북조(北朝)와 한족의 남조(南朝)로 272년 동안 갈라져 싸우다가 590년 수나라에 의해 통일되었다. 그러나 수는 오래 지탱하지 못하고 제2대 황제인 양제(煬帝) 때 크게 어지러워졌다. 이 혼란을 틈타 이세민은 일련의 전투에서 승리한 뒤 당을 창건하고 중국의 통일을 완성할 수 있었다. 수나라가 붕괴되자 각 지방의 유력한 무장(武將)들이 저마다 독립하여 천하를 장악하려고 서로 싸웠다.

남부지방은 이전의 남조를 계승한다는 취지하에 자립했다. 만리장성 밖의 유목민족 중 가장 강성했던 돌궐족은 중국으로 쳐들어와 변경에 괴뢰왕조를 세워놓고 본격적인 대규모 침공을 노리고 있었다.

6년간(618~624) 이세민은 돌궐족을 만리장성 밖으로 몰아내고 남부 지방을 정복했으며 다른 모든 경쟁세력을 물리쳤다. 당나라에 대항하여 싸웠던 많은 반란 지도자들은 패배하여 처형되었으나, 그중 일부는 싸우지 않고 항복하여 당나라의 작위를 받았다. 나라가 통일되어야만 평화가 오기 때문에 당의 중국 통일은 일반 백성들에게 크게 환영받았다.

그러나 이세민은 궁중 내에서의 권모술수에는 능하지 못했다. 태자로 책봉된 세민의 형인 건성(建成)은 동생보다 무능했으며, 태자의 자리를 빼앗길 것을 두려워해 세민을 공직에서 해임시킨 뒤 암살 음모를 꾸몄다. 이세민은 그를 지지하는 휘하의 장군들과 참모들의 도움을 받아 이 음모를 사전에 봉쇄하고, 궁궐문인 현무문(玄武門)에 매복해 있다가 형 건성과 그 일행을 모두 화살로 쏘아 죽였다.

이 사건을 '현무문의 변'이라고 한다. 이 사건이 일어나자 고조는 그 사변이 건성의 정권욕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설명과 함께 세민(태종)에게 양위했다. 이 사건에서 태종은 정치적 갈등을 무력으로 해결한 좋지 못한 선례를 남겼는데, 나중에 이같은 일이 다시 생겨 왕권의 안정을 크게 해치게 되었다. 태종은 후계자 선택에서도 실패했다. 이는 이전의 관례와 정치적 압력 때문에 정비(正妃) 소생의 아들 중에서만 태자를 세울 수 있었기 때문이다.

태종은 정비인 장손황후(長孫皇后)와의 사이에 승건(承乾)·태(泰)·치(治)의 세 아들을 두었는데, 그 가운데 장자인 승건을 태자로 책봉했다. 그러나 승건이 어리석어 모반에 연루됨으로써 643년(貞觀 17)에 폐위되었다. 셋째 아들 치가 그다음 태자로 책봉되어 태종이 죽은 후 제위를 이어받아 고종(高宗)이 되었으나, 그는 병약했을 뿐 아니라 성격이 우유부단하고 무능하여, 그의 왕비가 된 야심많고 총명한 측천무후(則天武后)가 실권을 잡았다.

태종은 통치자로서는 뛰어난 업적을 남겼다.

옛 제도를 되살리고 개량했으며, 그의 권위에 누구도 감히 도전하지 못했다. 관리의 선발방법으로 과거제도를 정착시킨 것은 가장 중요한 개혁조치 중의 하나였다. 이 제도의 시행으로 과거 소수의 귀족계급이 장악하고 있던 조정의 권력은 훨씬 폭넓은 지식인 계급에서 선발된 관료들에게로 점차 옮겨졌다. 중국이 272년 동안이나 남과 북으로 나뉘어 혼란한 상태에 빠져 있었던 것은 귀족문벌들의 끊임없는 권력투쟁이 주된 원인이었기 때문에, 태종은 이같은 권력구조의 변화를 의도했던 것이었다.

군대도 귀족가문에서 기르는 사병(私兵)을 점차 줄이고, 직업 군인을 징집하여 주로 변방에 주둔시켜 국방에 전념하게 했으며, 평범한 가문 출신의 지휘관이 군대를 통솔하게 했다. 따라서 당나라 초기의 군제는 정권의 안정을 촉진하는 역할을 하게 되었고, 후대 제도의 모범이 되었다. 태종은 국자감(國子監)을 세워 교육을 진작시키고 관리가 될 인재들을 교육시켰다.

또한 지방행정조직·재정·조세·토지사용 등 거의 모든 방면의 제도를 재정비하게 했다. 당나라의 조정은 그당시로는 세계에서 가장 발달하고 치밀하게 조직된 체제를 가지고 있었다. 이같이 훌륭한 태종의 치세를 가리켜 '정관(貞觀)의 치(治)'라고 부른다.

공산주의 사가(史家)를 제외한 모든 후대 사람들은 태종을 중국 역사상 가장 뛰어난 황제라고 칭송해왔다.

그의 치세는 그후 중국의 역사·문화에 막대한 영향을 미쳤다. 학문을 애호했던 태종은 직접 남북조사(南北朝史)를 편찬했고, 서예에도 뛰어나 비석에 새겨진 그의 글씨(溫湯碑, 晉祀碑)는 1,000년 이상이나 각급 학교에서 본받을 만한 서체 중의 하나로 여겨져왔다. 8세기의 중당(中唐)시대는 중국사상 가장 찬연한 문화를 꽃피운 시기 중의 하나였는데, 이는 태종이 나라를 안정시키고 제도를 개혁하여 사회적·경제적 발전을 이룩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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