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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사레아의 에우세비오

다른 표기 언어 에우세비오 , Eusebius of Caesa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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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그의 〈교회사〉에 실려 있는 그리스도교의 처음 몇 세기에 관한 기록은 그리스도교 역사기록의 이정표이다. 〈교회사〉에는 4개 대교구의 주교들과 로마 황제들의 즉위 내용이 들어 있고, 개정판에는 니케아 공의회가 열리기 1년 전인 324년까지 일어난 사건들이 다루어져 있다.
그느 또 다른 저서 〈예비〉에서 그리스의 가장 훌륭한 사상은 유대교 사상과 일치하거나 유대교 사상에서 유래한 것이라고 주장했으며, 〈복음의 실증〉에서는 히브리 성서가 그리스도에 대해서 예언해놓은 것이 성취되었다고 기록했다. 에우세비오는 313년경 팔레스타인 수도대주교가 되었다. 그는 유스타티우스, 아타나시우스, 마르켈루스를 추방하는 데 가담했으나, 콘스탄티누스가 그의 공로를 배려해 제의한 안티오키아 주교직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아타나시우스가 황제에게 항소했을 때 에우세비오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콘스탄티노플로 소환당했으나, 여전히 황제의 총애를 잃지 않았다.

에우세비오(Eusebius of Caesarea)

ⓒ Tomisti/위키피디아 | Public Domain

그의 〈교회사 Ecclesiastical History〉에 실려 있는 그리스도교의 처음 몇 세기에 관한 기록은 그리스도교 역사기록의 이정표이다.

카이사리아에서 세례와 성직임명을 받은 뒤 학자이자 장로인 팜필리우스에게 배웠는데, 이 스승에게 깊은 존경심과 정(情)을 느꼈으며, 그에게서 에우세비오 팜필리('팜필리우스의 아들 혹은 종'이라는 뜻)라는 이름을 받았다.

스승 팜필리우스는 로마의 박해 기간 동안 신앙을 포기하지 않아 박해를 당한 뒤 310년에 순교했다. 에우세비오도 카이사리아와, 후에는 이집트에서 로마의 권력자들에게 체포당해 투옥되는 일을 겪었던 것 같다.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 그는 신앙을 포기한 대가로 풀려났다는 비판을 받았다. 그러나 그당시 그런 비판은 흔한 것이었고, 또한 에우세비오가 의도적으로 배교했다면 박해가 끝나자마자 그렇게 빨리 카이사리아의 주교가 되지도 않았을 것이다. 카이사리아의 그리스도교 학파에 속한 학자들은 그리스도교에 관련된 모든 분야에 걸쳐서 집필 활동을 했는데, 에우세비오 자신은 신플라톤 철학자 포르피리우스가 그리스도교를 비판한 내용을 반박하는 장문의 논박서를 썼고(271 이후), 아울러 유력한 관리이자 박해자인 비티니아의 총독 히에로클레스를 반박하는 글도 썼다.

전생애를 통해 복음서에서 병행을 이루는 본문들과 서로 어긋나는 본문들에 대한 해설서와 성서 주석서를 썼다. 그의 주석 방법(해석 비평)은 될 수 있는 대로 메시아에 초점을 맞추어 해석하려는 경향을 가지고 있었으며, 부분적으로는 문자적이고 부분적으로는 우의적이었다.

그뒤 여러 세기 동안 그가 명성을 얻은 이유는 〈교회사〉때문이었다(이 책은 로마의 박해기간중 쓰기 시작한 듯하며, 312~324년에 여러 번 개정되었음). 이 책은 긍정적으로 평가하면 충분한 사료를 참조한 역사책이고, 부정적으로 평가하면 사료들에서 추려낸 내용을 짜맞춰놓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세계의 역사를 개관한 〈연대기 Chronicle〉(후에 예로니모가 개정·보완했음)를 편찬한 바 있는 그는 그때 사용한 분석 방법을 그대로 사용했으나, 이야기 중간중간에 4개 대교구(알렉산드리아·안티오키아·예루살렘·로마)의 주교들과 로마 황제들의 즉위를 삽입하는 방법으로 〈교회사〉를 썼고, 개정판에서는 내용을 확대하여 니케아 공의회가 열리기 1년 전인 324년까지 일어난 사건들을 다루었다. 그러나 에우세비오는 대역사가는 아니었다.

예를 들어 역사가로서는 부적절한 태도로 이단을 다루었고, 서방교회 이외의 사실에 대해서는 무지했다. 사실상 그의 역사 저서들은 교회가 이단설과 이단자들에 맞서 어떻게 스스로를 옹호했는가를 사실(史實)에 입각해서 제시하는 호교적 성격을 지닌다. 그 가운데서도 더욱 호교적 성격을 띠는 저서는 〈예비 Praeparatio〉·〈복음의 실증 Demonstratio evangelica〉 같은 대작들이다.

〈예비〉에서 에우세비오는 이교 신화·신탁·점성술을 비판했고, 유대교 경전들을 해석했으며, 그리스의 가장 훌륭한 사상은 모두 유대교 사상과 일치하거나 유대교 사상에서 유래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 책을 쓰면서 에우세비오는 플라톤의 글을 250회 이상 인용했고, 몇몇 신플라톤주의 저서를 사용했다. 〈복음의 실증〉은 히브리 성서가 그리스도에 대해서 예언해놓은 것이 성취되었다는 주제를 다루었다.

에우세비오는 313년경 팔레스타인 수도대주교가 되었다. 그 직위는 그에게 부담스러웠음에 틀림없으며, 집필 활동도 그만큼 줄어들었다. 더욱이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와 후임 황제들의 박해가 끝난 313년 이후의 시기는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다시 입회하기를 바라던 재건의 시기였다.

알렉산드리아의 사제 아리우스가 성자가 성부에게 종속된다고 가르쳐서 그의 신학사상이 쟁점이 되었을 때(318경) 에우세비오도 곧 이 논쟁에 참여했다.

왜냐하면 그는 이미 〈복음의 실증〉 등의 책을 통해 쟁점이 된 이 주제들을 논했기 때문이다. 이단 혐의로 알렉산드리아에서 추방된 아리우스는 카이사리아에서 있으면서 동정을 얻어냈다. 이것은 사실상 아리우스가 에우세비오를 주요지지자로 선포한 것을 뜻한다. 에우세비오는 아리우스를 전적으로 지지하지는 않았으나, 사벨리우스주의(하느님이 점진적으로 진화하는 양식들로 나타난다고 가르친 이단설)로 치우친 듯한 알렉산드리아의 주교 알렉산데르(313~328 재위)도 지지하지 않았다.

그는 알렉산데르에게 편지하여 아리우스가 오해를 당하고 있다고 주장했고, 아리우스에게도 직속 주교인 알렉산데르와 화해하라고 촉구했다. 그러나 사건은 너무 빨리 진행되어 325년 1월경 안티오키아에서 열린 강력한 반(反) 아리우스주의성향의 교회회의에서 에우세비오와 동료 2명(라오디케아의 테오도투스 및 킬리키아 네로니아스의 나르키수스)은 아리우스의 사상에 찬동했다는 이유로 잠정적인 파문을 당했다. 그해 하반기에 콘스탄티누스의 소집으로 니케아 공의회가 열렸을 때 에우세비오는 자기 변호를 했고, 황제의 명확한 승인을 받음으로써 혐의를 벗게 되었다.

에우세비오와 콘스탄티누스는 2번 만났던 것 같다.

첫번째 만남은 325년 니케아에서 있었고, 2번째 만남은 10년 뒤 콘스탄티누스의 '트리케날리아'(즉위 30주년 기념식)에서 있었던 것 같다. 니케아 공의회가 끝나고 몇 년이 지난 뒤 황제는 연합 쪽으로 기울었고, 니케아 공의회의 진정한 지지자들은 곧 이견파(異見派)로 전락했다. 에우세비오는 안티오키아의 유스타티우스(337경), 알렉산드리아의 아타나시우스(335), 앙키라의 마르켈루스(336경)를 추방하는 데 가담했으나, 콘스탄티누스가 그의 공로를 배려하여 제의한 안티오키아 주교직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아타나시우스를 단죄한(물론 교리 때문에 그를 단죄한 것은 아니었음) 335년의 티레 공의회에 참석하여 아마도 그 회의를 주재한 듯하다. 아타나시우스가 황제에게 항소했을 때, 에우세비오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콘스탄티노플로 소환당했으나, 여전히 황제의 총애를 잃지 않았으며, 그의 '트리케날리아'에서 기념연설을 했다. 이 연설에서 새 시대의 변화된 상황에 대처하기 위한 그리스도교적 제국론을 내세웠다. 하느님·황제·교회의 관계에 대한 그의 사상은 황제가 하느님의 은총에 힘입어 다스리고 있으므로 과거의 신격화된 황제들과 비슷하다는 견해에 근거한 것이다.

그러나 황제의 아들 콘스탄티우스 2세(337~361 재위) 때 황제와 대다수 교회가 대립하자 그 사상은 무너지게 되었다. 콘스탄티우스가 죽은 뒤(337) 에우세비오는 〈콘스탄티누스의 생애 Life of Constantine〉를 써서 그를 칭송했다. 이 찬사는 1차 사료를 주로 사용했기 때문에 어느 정도 역사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에우세비오는 아첨가만은 아니었다. 언젠가 황제의 의붓누이 콘스탄티아가 그리스도의 초상화로 알려진 그림을 갖고 싶어하는 것을 질책한 적도 있다.

그러나 그녀에게는 정치적 영향력이 없었다. 336년경 니케아 공의회의 주요지지자였던 앙키라의 마르켈루스는 사벨리우스주의자라는 혐의를 받고 유배당했다. 마르켈루스와 오랫동안 적대적인 관계를 유지해왔던 에우세비오는 〈마르켈루스를 반박함 Against Marcellus〉·〈교회의 신학에 대해서 On the Theology of the Church〉를 써서 마르켈루스를 공격하고 여러 동료들을 옹호했다.

이 저술들은 그가 여전히 니케아 교리의 옹호자가 아니지만 전보다 그 입장에 더 가까워졌음을 보여준다.

카이사리아에서 에우세비오에게 배우고 또 그를 계승한 아카키우스는 에우세비오의 전기를 썼으나 이 책은 현존하지 않는다. 만일 아카키우스와 또다른 제자인 에메사의 에우세비오가 스승의 신학을 대표한다고 가정할 수 있다면, 그것은 반(半)아리우스주의 형태의 신학이었을 것이다.

후세대들은 에우세비오가 그리스도교 학문에 기여한 내용이 아리우스의 사상을 연상시키는 것이었기 때문에 혼동을 겪었다. 그를 전적으로 지지한 사람은 교회사가인 소크라테스(380~445경)밖에 없다. 결국 니케아에서 열린 제7차 세계 공의회(787)는 에우세비오가 모든 면에서 이중성과 비일관성을 보여준 사실을 지적하고 그를 단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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