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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아스

다른 표기 언어 Franz Boa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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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858. 7. 9, 프로이센 베스트팔렌민덴
사망 1942. 12. 22, 뉴욕 시
국적 독일/미국

요약 독일 태생 미국의 인류학자.

20세기에 주류를 이룬 상대주의적이고 문화중심적인 인류학을 확립했다.

1899~1942년 뉴욕 시 컬럼비아대학교 교수로 있는 동안, 이 대학교의 인류학과를 미국 최고의 학과로 만들었다. 보아스는 북아메리카 인디언 문화와 언어 분야의 뛰어난 연구자였고 미국의 인류학을 발전시킨 여러 학자들의 위대한 스승이기도 했다.

상인의 아들로 태어난 보아스는 어릴 때 몸이 약해 대부분의 시간을 책 읽는 일로 보내야 했다. 그의 부모는 1848년 혁명의 이념을 신봉하는 자유사상을 가진 진보주의자들이었다. 보아스는 유대인이었지만 완전한 독일인으로 자랐다. 5세 때부터 식물학·지리학·동물학·지질학·천문학 등 자연과학에 관심을 가졌다.

민덴 김나지움에서 공부하는 동안 문화사에 깊은 관심을 갖게 되었지만, 학교에서 문화사를 배운 것은 아니었다. 하이델베르크·본·킬 대학교에서 관심에 따라 여러 학문을 배웠으며, 1881년 킬대학교에서 물리학과 지리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1년 동안 병역을 마친 후에 베를린에서 공부를 계속했다. 1883~84년의 1년간 배핀 섬으로 과학탐험여행을 떠났다. 이 여행을 계기로 인간의 문화에 대한 관심을 확고히 가진 보아스는 베를린 민족학박물관과 베를린대학교 지리학과에서 일자리를 얻게 되었다.

1886년 밴쿠버 섬 인디언에 대한 연구를 마치고 돌아 오는 도중 뉴욕 시에 잠시 들렀다가 미국에 아주 정착하게 되었다.

잡지 〈사이언스 Science〉의 편집인을 지냈으며, 마리 A.E.크라코비처와 결혼한 뒤 오랜 학문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1889년 새로 설립한 클라크대학교(매사추세츠 우스터)에서 처음으로 강의를 하게 되었다. 그뒤 시카고에서 한동안 머물면서 1893년 미국박람회의 인류학 전시회 준비를 도왔으며 필드 자연사박물관에서 일했다. 1896년 컬럼비아대학교 형질인류학강사가 되었으며 1899년 인류학교수가 되었다. 또한 1896~1905년 뉴욕의 미국자연사박물관 인류학 부장을 지내기도 했던 보아스는 시베리아 원주민과 북아메리카 원주민의 관계를 조사·연구한 제섭 북태평양 탐험대의 보고서를 검토하고 편집했다.

보아스는 미국에서 학문생활을 시작할 때부터 학자로서 혁신적인 연구업적을 많이 남겼다.

인디언의 민속과 예술에 대한 중요한 연구를 포함해서 통계학적인 형질인류학, 서술언어학과 이론언어학, 미국 인디언 민족학에 이르기까지 고르게 업적을 남겼다. 개인적인 연구업적만으로도 과학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며, 스승으로서도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 20세기를 전후해서 미국 인류학에 대한 보아스의 영향력은 절대적이었다. 48세가 되는 1906년 동료들로부터 기념논문집을 증정받았다. 기념논문집은 은퇴가 가까워진 학자에게 주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러나 그뒤 36년 동안에도 그의 업적이나 영향력 또는 명예는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다. 〈국제 언어학 저널 International Journal of American Linguistics〉을 창간했으며, 미국인류학회 창설에 참여했다. 1931년 미국과학발전협회 회장을 맡았으며, 여러 과학단체 회원을 지냈다.

1911년 문화와 인종에 관한 일련의 강연을 모은 〈원시인의 마음 The Mind of Primitive Man〉을 출판했다.

1920년대 인종적인 차이를 근거로 한 미국의 새로운 이민 규제조치를 반대하던 사람들은 이 책을 인용하는 경우가 많았다. 1930년대 독일 나치 정권은 보아스의 책을 불태우고 그의 박사학위를 취소했으나 1931년 킬대학교에서 다시 박사학위를 수여했다. 1937년 발간된 〈원시인의 마음〉 개정증보판은 1950년대 미국에서 일어난 민권투쟁에 영향을 미쳤다.

보아스가 미친 영향

보아스 저작의 혁명적인 중요성은 인간에 관한 인류학자들의 다양한 신념이라는 측면에서만 이해할 수 있다. 거의 모든 인류학자들은 언제나 인류는 하나의 종(種)이라고 믿어왔다. 그러나 보아스 시대에는 여러 인종이 똑같이 여러 문화 형태를 발전시킬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다고 믿는 인류학자가 많지 않았다.

모든 민족에게는 똑같이 여러 문화형태를 발전시킬 수 있는 인간적인 능력이 있다는 명제를 오늘날 거의 보편적으로 받아들이게 된 것은 보아스의 영향 때문이다. 인류학자들이 결과의 차이를 유전적인 요소보다 역사 '문화적인' 요소의 탓으로 보게 된 것 역시 그의 영향력이 컸다.

이러한 공통적인 사고 안에서도 특정 민족의 실제적인 성과에 대해서는 경우에 따라 견해 차이가 있어왔다. 흔히 '진화론자'를 자처하는 일부 인류학자들은 다른 민족들에 앞서 적어도 일시적으로나마 '더 높은' 수준의 문화를 이룩한 민족도 있다고 주장한다. 이 인류학자들은 '문명화된' 민족과 '원시'민족의 차이는 환경적·문화적·역사적인 상황의 결과라고 믿는다.

흔히 문화적 상대론자로 불리는 다른 인류학자들은 진화론적인 견해가 다른 집단을 열등한 집단으로 규정하려는 인간의 경향에서 비롯된 자기 민족 중심적인 견해라고 말하면서 현재의 모든 민족은 똑같이 진화해왔으나 발전 경로만이 다를 뿐이라고 주장한다(→ 문화상대주의, 문화적 진화).

보아스는 문화적 상대주의자에 속했다. 19세기말 영국과 미국 인류학자들은 특히 이 문화적 상대론을 지지하지 않았기 때문에, 보아스가 상대론을 압도적으로 우세한 이론으로 확립한 사실은 더 한층 주목할 만한 일이었다. 원래 자연과학자였던 보아스는 다양한 민족들이 어떤 식으로 독특한 생활방식을 이루어 왔는가를 설명할 수 있는 보편적인 법칙이 틀림없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어떤 보편적인 해결방법을 찾기에는 문제가 너무 복잡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문화적인 인과법칙은 가정되기보다는 찾아내야 할 문제였다.

보아스의 견해에 따르면 인류학자는 민족의 역사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모든 요소를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따라서 문화의 차이가 생물학적인 차이가 아니라고 주장하기 위해서 인류학자는 생물학을 어느 정도 알아야 하며, 인간과 환경의 관계를 알려면 민족의 이동, 영양상태, 육아풍습, 질병과 같은 것들뿐만 아니라 민족과 문화의 변동 및 상호관계를 이해해야 한다. 이와 같이 종합적·절충적인 학문으로 바뀐 인류학은 모든 특정 분야의 과학 또는 학문과 관련을 맺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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