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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영제국

다른 표기 언어 British Empire , 大英帝國 동의어 영국제국, 英國帝國

요약 영국은 16세기에 처음으로 해외 식민지 확립을 위한 노력을 기울였다. 프랑스와의 경쟁과 상업적인 야심에서 추진된 해상팽창은 17세기에 가속화되었다. 프렌치인디언 전쟁을 매듭지은 1763년 파리조약은 북아메리카와 인도에서 영국의 우위를 가져다주었다. 19세기는 대영제국의 최전성기였다.
대영제국은 방대한 영토로 이루어졌으므로 모국인 영국과 의존관계를 유지하면서 자치정부를 인정하는 정책이 긍정적으로 검토되었고, 20세기에 영국의 상징적인 종주권을 인정하는 자치 속령지들을 포괄한 '영연방'의 개념으로 발전했다. 모국인 영국과, 사실상 주권을 보유한 자치령으로 구성된 영연방은 1931년 제정된 웨스트민스터 법에 의해 승인되었다. 오늘날 영연방은 과거 대영제국의 구성국들을 주권국가들의 자유연합체 형태로 포함하고 있다.

대영제국(British Empire)

ⓒ Anomie/wikipedia | Public Domain

대영제국은 방대한 영토로 이루어졌으므로 모국인 영국과 의존관계를 유지하면서 상당한 정도로 자치정부를 인정하는 정책이 긍정적으로 검토되었으며, 20세기에 들어와 영국의 상징적인 종주권을 인정하는 자치 속령지들을 포괄한 '영연방'(British Commonwealth)이라는 개념으로 발전했다.

영연방이라는 용어는 1931년에 제정된 법률로 구체화되었다. 오늘날 영연방은 과거 대영제국의 구성국들을 주권국가들의 자유연합체 형태로 포함하고 있다.

영국은 16세기에 처음으로 해외 식민지를 확립하기 위한 시범적인 노력을 기울였다(식민주의). 프랑스와의 경쟁과 상업적인 야심에서 추진된 해상팽창은 17세기에 가속화되었다. 1670년경 영국의 식민지로는 뉴잉글랜드·버지니아·메릴랜드·버뮤다·온두라스·앤티가·바베이도스·노바스코샤 등이 있었다.

자메이카는 그전에 이미 영국의 식민지가 되어 있었고 허드슨베이사(社)는 캐나다에 거점을 확보하고 있었다. 동인도회사는 1600년 인도에 교역소를 설치하기 시작했으며 1661년에는 최초의 아프리카 식민지(제임스 아일랜드)가 확립되었다.

일찍이 시에라리온에서 노예무역이 시작되었으나 이곳은 1787년까지 영국의 속령은 아니었다. 황금해안(지금의 가나)·감비아·나이지리아가 이후 서아프리카 속령에 포함되었다.

영국이 광활한 해외 식민지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던 데에는 몇 가지 요인이 있다. 특히 1651년 제정된 항해조례는 영국과 그 식민지를 폐쇄적인 경제관계로 묶어두었다. 즉 모든 식민지의 물품이 수출될 경우에는 영국 선박만을 이용해 영국 시장으로 가야 했고, 또한 식민지 수입품은 영국을 경유해야만 했다.

로버트 클라이브, 에어 쿠트, 조지 로드니, 호레이쇼 넬슨 등이 지휘하는 영국의 군사력과 해군력은 다른 유럽 국가들이 대영제국의 영역을 침범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프렌치인디언 전쟁을 매듭 지은 1763년의 파리 조약은 북아메리카와 인도에서 영국의 우위를 가져다 주었다. 1783년 아메리카 식민지의 상실은 1788년 오스트레일리아에 새로운 식민지를 확보하고 1840년 뉴질랜드를 얻음으로써 상쇄되었다.

1802년 아미앵 조약으로 트리니다드와 실론 섬을 확보했으며 1814년 파리 조약에 의해 프랑스는 토바고·모리셔스·세인트루시아·몰타를 양도했다. 1795년 말라카가 대영제국에 들어왔으며 토머스 래플스 경은 1819년 싱가포르를 손에 넣었다. 앨버타·매니토바·브리티시컬럼비아 등으로 이루어진 캐나다 식민지는 태평양에 대한 영국의 영향력을 확대시켰으며 인도에서 영국은 아그라-오우드 연합주, 마디아프라데시, 동(東) 뱅골, 아삼 등을 정복했다.

19세기는 대영제국의 최전성기였다.

영국 식민부는 식민지 경영에 관한 매우 느슨한 체계를 이어받았으나 광활한 영토에 보다 정교한 통제를 가하기 위한 정책과 방법들을 채택했다. 1877년 서태평양 제도를 관장하는 고등판무관제가 신설되었으며 인도제국에 미얀마, 펀자브, 영국령 발루치스탄을 합병시키는 한편 상하이를 통해 중국에서도 '비공식적인 제국'으로서 사업을 진행했다. 아프리카에서 이집트와 수단, 케냐, 우간다, 영국령 소말릴란드, 잔지바르, 니아살란드, 북로디지아, 남로디지아, 나탈, 오렌지 자유주(自由州), 트란스발, 케이프 식민지 등으로의 세력 확장은 '희망봉에서 카이로까지' 이어지는 아프리카 제국 구상을 실현시켰다.

그러나 영국이 나폴레옹 시대와 제1차 세계대전 사이에 벌어진 최대의 전쟁인 보어 전쟁(1899~1902)에 휘말려든 것은 바로 남아프리카에서의 일이었다.

1839년 더럼 경은 캐나다에 제한적인 성격의 자치정부를 세우는 방안을 제안했다. 일부 식민지들이 영국이 임명한 총독의 통치하에서 스스로의 문제를 관장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것을 내용으로 한 '책임있는 정부'라는 구상은 급속히 확산되어나갔다. 오스트레일리아의 일부분, 뉴질랜드, 나탈과 케이프 식민지가 19세기말 이같은 지위를 얻었고 캐나다·오스트레일리아·뉴질랜드·남아프리카로 구성된 식민지 연맹은 1907년 스스로의 문제에 관한 완전한 통제권을 얻었으며 자치령(dominion)이라는 새로운 지위가 부여되었다.

이들의 주권은 사실상 완전히 확립되었으며 이들은 주로 영국왕에 대한 충성을 매개로 해서 영국 및 자치령 국가 상호간에 유대를 맺었다. 실질적으로 유럽인들로 이루어져 있으며 영국적인 생활양식과 관습에 대한 오랜 경험을 간직하고 있는 이같은 대영제국 내 국가들의 집단은 흔히 영연방으로 언급되곤 한다.

제1차 세계대전 과정에 수반된 요구사항들과 그에 따른 긴장, 그리고 전후의 여파로 자치령의 특별한 지위는 더욱 공식적으로 인정되었다. 모국인 영국과, 사실상 주권을 보유한 자치령으로 구성된 영연방은 1931년 웨스트민스터 법에 의해 승인됐다.

이밖에 대영제국의 나머지 부분은 주로 대부분의 토착인구가 영국적인 것에 대한 경험을 간직하고 있지 않은 속령지들로 구성되어 있다.

이들 속령지에서는 다양한 종류의 행정적인 관리방안이 시도되었는데, 그 가운데는 민법과 행정에 원주민의 관습을 효율적으로 채택한 인도의 복잡한 관리체계에서부터 아프리카 여러지역에서 시행된 매우 느슨하고 간접적인 감독체계 등 여러 가지 방안이 있었다.

아프리카 지역에서는 영국인 정착민들과 상인들은 방임되다시피 했지만 아프리카 원주민들은 지정된 구역에 분리되어 있었다.

이와 같은 지역에서 제1차 세계대전 후 민족주의 감정이 급속하게 성장했으며 제2차 세계대전 후에는 더욱 심각하게 확산되었다. 그결과 1947년 인도를 시작으로 이들 국가에 독립이 주어졌으며 이 과정에서 독립국가들은 영국 및 영연방 내의 과거 속령들과 협력관계를 유지할 것을 스스로 결정했다(1946년 이후 '영령'이라는 형용사는 공식적으로 사용되지 않았음). 1980년대에 와서는 과거와 같은 대영제국의 흔적은 거의 남아 있지 않은 상태이나 한편으로 영연방은 상당한 유연성과 지속성이 있는 제도임이 입증됐다.→ 영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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