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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수를 본떠 효율적인 정치·행정 체제를 발전시켰고, 문화예술의 황금시대를 이루었다.
초대 황제 이연은 621년 중국 동부 평원을 장악했고 624년에 북부와 남부지역도 차지했다. 국가의 기본제도를 확립하고 화폐제를 운영하고 법을 재정비하였다.
2대 황제인 태종은 역사상 위대한 업적을 남긴 황제였다. 정치력을 발휘했을 뿐만 아니라 중국 역사상 서쪽으로 가장 멀리 진출한 황제이기도 했다.
8세기초에는 당의 부와 권력이 절정을 이루었으며, 예술면에서도 황금기였다. 무후 시절에 쫓겨났거나 옥에 갇혔던 귀족들이 복권되어 개혁시대를 이끌었다. 8세기 후반에 안녹산의 난 이후 황제가 권위를 되찾고 국가의 기강을 바로잡았으나 9세기 후반부터 약해져 다시 반란이 일어나기 시작했고, 907년에 결국 망하고 말았다.

수를 본떠 효율적인 정치·행정 체제를 발전시켰고, 문화예술의 황금시대를 이루었다. 묘호가 고조였던 초대 황제 이연은 원래 수의 관리로 제위를 노리던 사람들 가운데 하나였다. 결국 경쟁자와 반군들을 물리치고 621년 중국 동부 평원을 장악했으며, 624년에는 왕조가 끝날 때까지 반란군이 남아 있던 북부 일부를 뺀 중국 북부와 남부지역도 차지했다. 초대 황제로서 매우 어려운 군사작전을 여러 차례 지휘했으며, 의 법제를 이어받아 중앙정부와 지방에 효율적인 행정관료조직을 세우는 등 국가의 기본제도를 확립했다.

당은 재정이 매우 어려워 경비를 줄이고자 행정부 조직을 단순화했다. 수의 토지분배제도인 균전제를 받아들여 과세대상이 되는 모든 남자에게 땅을 나누어 주고 대토지 사유를 최대한 줄이려고 애썼다. 세제 역시 수의 조용조 제도를 받아들였으며, 조폐소를 만들고 동전화폐를 쓰게 했다. 이 화폐는 당이 망할 때까지 계속 사용되었다. 법을 재정비하여 사례 별로 일정한 형량을 정하고 20년마다 다시 검토하도록 했다.

2대 황제인 태종 이세민(李世民)은 형제 2명을 죽이고 아버지 이연을 물러나도록 해서 제위에 오른 인물이지만, 중국 역사상 위대한 업적을 남긴 황제 였다. 그의 치세는 '정관의 치'라고 불려져 후대 황제들에게 모범이 되었다. 지방세력의 분포를 고르게 하기 위해 궁중에 출입하는 귀족들을 조정했고, 수와 같이 시험(문학·문화)을 통해 관리를 등용했으며 수도에 고급과정의 학교제도를 확대했다. 고전을 중히 여겨 고전의 결정판을 발간하기도 했다. 동동궐을 무찔렀으며, 서부에 있는 부족들 사이의 불화를 조정하여 중국 역사상 서쪽으로 가장 멀리 진출했다.

중국 역사에서 손꼽히는 여걸인 측천무후는 고종이 통치하던 때에 여제가 되기 위한 계략을 꾸몄다. 그녀는 뤄양[洛陽:서쪽 수도]에 거주지를 확보하고 고종이 병들어 있는 동안 관료들을 포섭하여 자신의 세력을 강화시켜나갔다. 이런 지나친 행위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오랫동안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다가 마침내 주변의 압력으로 80세에 물러났다.

8세기초에는 당의 부와 권력이 절정을 이루었으며, 예술면에서도 황금기였다. 무후 시절에 쫓겨났거나 옥에 갇혔던 귀족들이 복권되어 개혁시대를 이끌었다. 그러나 8세기 후반에 동북쪽에서 안녹산이 반란을 일으켜 그 세력이 빠르게 퍼져나가자, 현종(玄宗)은 서쪽의 쓰촨[四川] 지방으로 피신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안사의 난)반란은 결국 진압되었지만 그 뒤에도 지방 분할과 반란은 계속 일어났다.

818년에 이르러 대부분의 지역에서 황제의 권위를 되찾고 국가의 기강을 바로잡았다. 그러나 9세기 후반부터 조정은 점점 약해져 다시 반란이 일어나기 시작했고, 907년에 이르러 결국 망하고 말았다. 약 50년 뒤 송에 의해 다시 통일될 때까지 여러 개의 독립왕국들이 난립해 있는 상태가 계속되었다.

예술

당대에는 예술이 찬란하게 꽃을 피웠다. 황실의 주요의식이 재현되었고, 옛 악단과 궁중무용단이 그 의식을 더 화려하게 해주었다. 악공(樂工)들은 종·편경(編磬)·피리·북을 연주했다.

외국의 문물을 기꺼이 받아들이던 이 시기에는 아라비아와 페르시아 선원들이 항구를 통해 오갔으며, '서양'의 음악과 춤이 중앙아시아를 거쳐 들어오기도 했다. 장안(長安:지금의 시안[西安])의 선술집에서는 이상한 악기를 연주하는 서양인 악사들의 반주에 맞추어 서양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었다. 이국적인 소녀 무용수들은 그림과 진흙으로 빚은 작은 입상(立像)들로 재현되었으며, 그림의 소재가 되기도 했다. 궁정에 있던 이원(梨園)은 음악가와 무용수의 연습실로 쓰였다. 외국음악은 아악(雅樂)과 속악(俗樂) 다음가는 제3의 분야가 되었다. 당이 망하기 전까지 10개의 음악분야가 있었는데 그 일부가 외국음악이었다. 관현악 악보는 남아 있지 않으나 독주를 위한 작품은 몇 개 남아 있다. 당 말기 그림에서 현악기·관악기·타악기가 합주되고 있는 궁정 연회의 모습을 볼 수 있고, 악단과 무용수들을 위한 안무도(按舞圖)도 보존되어 있다. 당대 중기에는 실물보다 큰 불상의 제작이 두드러졌다. 이런 불상은 지금 중국에 남아 있지 않고 일본에만 몇 작품이 보존되어 있다. 이를 통해 일본이 행정·예술·종교·문화 분야에 당의 영향을 많이 받았음을 알 수 있다.

회화는 이 시대 문화에서 중요한 몫을 했고, 화가들은 중요한 궁중 인물들이었다. 궁중 대신이었던 염입본(閻立本)은 정치가보다는 화가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인물화의 대가인 오도현(吳道玄)은 뤄양과 장안에 있는 사원들에 벽화를 300개나 그렸다.

군마가 군인의 생사를 결정지을 만큼 중요했으며, 궁중 여인들이 마상 경기를 즐기던 시대였던 만큼 말을 그리는 화가가 대단히 인기를 끌었다. 산수화에서는 당시 서경(西京)이었던 뤄양의 궁정관리이기도 했던 왕유(王維)가 가장 뛰어났다. 자유분방한 붓놀림이 새롭게 개발되어 질감과 색조에 더욱 다양한 효과를 낼 수 있게 되었고, 선(禪) 화가들은 종교화 분야에서 한층 자유로운 화풍을 일으켰다. 도자기 부분은 침체기였던 육조시대(六朝時代)를 지나 큰 발전을 이루었다. 백자의 광택, 삼채(三彩) 도자기, 3색의 작은 입상(立像), 검은 유약을 충분히 써서 만든 오지그릇 및 청자 등이 모두 이 시대에 개발되었다. 외국 것에 관한 일반의 관심이 높아지자, 이국적인 형태와 제재로 만들어진 도자기가 많이 만들어졌다. 묘지 소입상도 많이 만들었고 금속공예품과 보석에는 은을 많이 썼다. 제기(祭器) 중에는 외국 것의 형태를 본뜬 것도 있었다. 금·은 그릇은 얇은 판을 두들겨 동그랗게 세워 만든 것 외에는 만들어지지 않았다. 술잔은 두 겹으로 만들어 그 사이에 공기가 들어 가게 했다. 장식된 청동거울도 인기가 있었다.

문학

중국의 문학은 일반적으로 한문·당시·송사·원곡으로 불려지는 데서도 알 수 있듯이, 특히 이 시기에는 시가가 최고로 번성했다. 이전의 모든 운문형식을 쓰되 이를 다듬어 새 형식을 개발했다. 율시와 간결한 형식의 절구가 새로 도입되어 크게 인기를 끌었다. 오늘날 약 2,200여 명의 당대 시인이 지은 작품 5만 여 수가 전해지고 있다.

대체로 당시의 발전시기는 초당·성당·중당·만당의 4기로 구분된다.

초당(618~712) 시기에는 시의 형식미, 음률, 아름다운 표현 등을 중시했다. 왕발·양형·노조린·낙빈왕은 초당4걸로서 궁정시인과는 별도로 독자적인 작품활동을 했다.

성당(713~765)은 중국 시가 최고로 발전한 시기였다. 자연시를 쓴 왕유(王維:701~761), 맹호연(孟浩然:689~740), 전쟁이 잦은 변방의 서정을 노래한 잠참(岑參:715~770), 고적(高適:702?~765) 등이 활동했다. 이 시기에 '시선'이라 일컬어지는 이백(李白)과 '시성'으로 불리는 현실주의적 시인 두보(杜甫)가 있었다.

중당(766~835)은 안사의 난이 끝난 이후의 시기로서, 나라 전반에 걸친 혼란과 변혁으로 인해 문학작품에서도 현실주의적 경향이 짙었다. 이러한 배경 아래 백거이(白居易)의 신악부 운동과 한유(韓愈)·유종원(柳宗元)의 고문운동이 일어났다. 고문운동은 한유가 창도했는데, 그는 1,000여 년 동안 숭상해온 변려체의 문장을 일소하고, '문장복고'와 '문이재도'를 주장했다. 같은 시대의 유종원은 고문운동의 또 다른 대표자로서, 고문체를 운용하여 산수유기문과 소품문을 창작했다. 고문운동은 또한 당대 전기의 발전을 촉진시켰다. 전기는 일반적으로 고문으로 기술하여, 편폭은 짧지만 구성이 비교적 짜임새가 있다. 애정고사·협의고사·신선전기·귀신지괴 등의 다양한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 이외에도 변문이 성행했다.

만당(836~907) 시기에는 유미주의 풍조가 다시 일어나 시에서는 이상은(李商隱)과 같은 작가가 나왔고, 산문에서는 변려문이 다시 유행했다. 특히 이 시기에는 민간에서 유행하던 노래의 형식을 응용한 사(詞)가 유미주의 풍조와 맞물려 본격적으로 씌어졌다.

당에 대한 평가

당대의 특징을 몇 가지로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당은 처음부터 외국으로 세력을 확장하는 정책을 써서 당시로는 세계 최대의 제국을 건설했으며, 이를 통해 세계 여러 나라와 문화적·경제적 교류를 갖게 되었다. 둘째, 상공업이 발달하여 도시가 형성되었으며, 이런 도시에서 생겨난 상인·노동자 등이 새로운 세력을 형성했다.

아울러 과거제도의 확립으로 하층 지식인들이 대거 고급관료로 진출하여, 진보적인 사회세력이 되었다. 셋째, 다양한 종교가 자유롭게 성행했다. 정치·사회의 기본인 유교 외에도 도교·불교가 존중되었고, 서역으로부터 이슬람교 등이 들어와 유행했다. 당은 외국과의 무역을 통해 서역과 인도 등지의 문화를 대량 받아들임으로써 예술 전반에 큰 자극을 받았다. 또한 다양한 사상·종교가 성행하고 새로운 사회계층이 형성되어 갖가지 문학이 발달되었다.

당은 대부분의 나라들이 그러하듯 음모와 살인을 통해 건립되었다가 무정부 상태가 되어 침몰했으나, 여러 가지 사회적·정치적 기반을 통해 이룩한 찬란한 예술과 문화 업적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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