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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945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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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적 | 캐나다 |
대표작 | 「Everybody Knows This Is Nowhere」(1969) |
1994년의 그 잔인했던 봄날에 스스로 세상을 등진 그런지각주1) 의 영웅 커트 코베인의 유서에는 이런 글귀가 씌여 있었다. "기억해 주기 바란다. 점차 희미해져가기보다는 한 순간에 타버리는 것이 낫다는 것을……" 그것은 닐 영의 노래 〈Hey Hey My My〉의 가사에서 따 온 것이었다. 1995년 닐 영이 록큰롤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을 때 펄 잼(Pearl Jam)의 에디 베더(Eddie Vedder)는 헌정 연설에서 이렇게 말했다. "타버리지 않는 유일한 방법은 끊임없는 자기혁신 뿐이라는 것을 닐 영은 결코 머무르지 않는 끝없는 열정으로 보여주었다. 그래서 그는 록큰롤 시대의 가장 뛰어난 아티스트 가운데 한 명이다." 닐 영은 변화무쌍한 사람이라 아무도 그가 어디로 튈지 모른다. 「뉴욕 타임스」는 "닐 영은 예측불허라는 사실만을 예측할 수 있는 사람이다"라고 썼다. 그것이 닐 영이다.
그런지의 대부
닐 영이 음악 씬에 처음 모습을 드러낸 것은 미국 캘리포니아로 이주해 온 1966년이었지만 고국인 캐나다에서는 이미 1960년부터 활동을 시작했다. 닐 영은 1945년 캐나다 온타리오주 토론토에서 태어나 위니펙에서 자랐다. 위니펙의 포크 클럽에서 활동하던 중 같은 캐나다 출신의 세계적인 포크 뮤지션 조니 미첼을 만나 우정을 나누었다. 1966년 캘리포니아로 이주한 그는 스티븐 스틸스와 함께 버펄로 스프링필드를 결성하고 그룹 동명 데뷔 앨범 「Buffalo Springfield」를 발표했다. 밴드의 첫 히트곡은 〈For What It's Worth〉였는데 스티븐 스틸스가 만든 이 곡에서 닐 영은 예리한 일렉트릭 기타 연주로 큰 힘을 보탰다. 차기작인 「Buffalo Springfield Again」(1967)에서는 수록곡 중 〈Mr. Soul〉과 〈Expecting to Fly〉 〈Broken Arrow〉 등을 만들며 뛰어난 송라이팅 능력을 뽐내기 시작했다.
1968년 스티븐 스틸스가 버펄로 스프링필드를 떠나 데이비드 크로스비, 그래험 내쉬와 함께 크로스비 스틸스 & 내쉬(이하 'CSN')를 결성하자 닐 영은 충격을 받고 잠시 무대를 떠나기도 했지만 1969년 다시 돌아와 솔로 데뷔 앨범 「Neil Young」을 발표했다. 두 번째 앨범은 새롭게 결성한 밴드 크레이지 호스(Crazy Horse)와 함께 했다. 1969년 닐 영 앤 크레이지 호스의 이름으로 발표한 두 번째 솔로 앨범 「Everybody Knows This Is Nowhere」는 싱글차트에서 히트한 〈Cinnamon Girl〉을 비롯해 앨범 동명 타이틀인 〈Everybody Knows This Is Nowhere〉와 〈Running Dry (Requiem for the Rockets)〉, 그리고 런닝타임 10분에 달하는 두 개의 대곡 〈Down by the River〉와 〈Cowgirl in the Sand〉에 이르기까지 매력적인 트랙들이 가득했다.
1969년 닐 영은 스티븐 스틸스의 요청으로 CSN에 합류했다. 그의 가입으로 인해 밴드의 이름은 크로스비 스틸스 내쉬 & 영(이하 'CSNY')으로 확장되었다. CSNY은 1969년 시카고에서 데뷔무대를 장식한 후 곧이어 우드스톡 페스티벌에 출연하면서 다시 한 번 록 음악의 중심부로 진출했다. 닐 영은 CSNY의 일원으로 「Deja Vu」(1970)와 「4 Way Street」(1971)를 냈고 앨범은 모두 큰 호평을 받았지만 정작 밴드의 내부는 닐 영과 스티븐 스틸스의 주도권 다툼으로 바람 잘 날이 없었다.
닐 영의 음악 인생에서 전성기를 설정한다는 것 자체가 별다른 의미는 없어 보이지만 그래도 굳이 한다면 그의 양대 명반으로 꼽히는 「After the Gold Rush」와 「Harvest」 사이의 시기, 그러니까 1970년에서 1972년 사이를 꼽는 것이 일반적이다. 담장 앞을 걸어가는 닐 영과 교차하는 노파의 모습을 흑백으로 처리한 커버 디자인으로도 관심을 모은 「After the Gold Rush」는 그의 천재적 감각이 표출된 초기의 걸작이며, 솔로 4집에 해당하는 「Harvest」는 영국과 미국에서 모두 앨범차트 정상을 차지했을 뿐 아니라 수록곡 〈Heart of Gold〉가 빌보드 싱글차트 1위에 오르며 닐 영에게 가장 큰 대중적 성공을 안겨준 앨범이다.
1974년 앨범 「On the Beach」를 발매할 무렵 닐 영은 결국 CSNY을 탈퇴했다. 스티븐 스틸스와 닐 영의 불화에도 불구하고 CSNY이 거둔 음악적 성과는 뛰어난 것이었고, 이것은 향후 닐 영이 솔로로서 좋은 커리어를 쌓는 데에도 큰 힘이 되었다.
CSNY 시절의 노래 가운데 가장 널리 인구에 회자되는 곡으로는 〈Ohio〉가 있다. 반전시위 도중 주방위군이 쏜 총에 맞아 학생들이 사망한 비극적 사건이었던 켄트 주립대 사태에 충격을 받아 만든 〈Ohio〉는 닐 영의 정치적이고 사회참여적인 이미지를 만드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이밖에 그의 기타 연주가 빛나는 곡으로는 1977년 앨범 「American Stars 'N Bars」에 수록된 〈Like a Hurricane〉도 빼놓을 수 없다. 이 곡은 그의 공연에서 항상 하이라이트를 장식하며 베스트 앨범에도 매번 수록되는 명곡이다.
1976년 더 밴드의 고별공연인 'The Last Waltz' 공연에 참여해 우정 어린 장면을 연출한 그는 1980년대 이후로는 실험적인 면모를 더욱 강화했다. 대중적으로는 다소 침체기를 겪는 모습이었지만 어차피 변화무쌍한 실험성과 기인의 풍모가 그의 본모습이다. 1989년 닐 영은 앨범 「Freedom」이 인기를 얻고 싱글 〈Rockin' in the Free World〉가 빌보드 메인스트림 록 차트 2위에 오르는 성공을 거두면서 대중성을 회복했다. 한편 이 앨범에서 닐 영은 무겁고 두터운 피드백과 디스토션 사운드를 선보여 그런지의 시대가 임박했음을 알리고 있었다.
'닐 영스러움'이란 고정되지 않으려는 몸부림
닐 영은 독창적인 기타 연주와 영감이 넘치는 시적 가사로 무장한 탁월한 송라이팅으로 팝 음악사에 뚜렷한 족적을 남겼다. 그는 피아노와 하모니카 등 많은 악기를 능숙하게 다루지만 주력 악기는 뭐니뭐니해도 기타이다. 그의 음악과 연주는 특정한 장르로 묶이는 것을 한사코 거부하지만 그래도 편의를 위해 거칠게나마 구분해 본다면 어쿠스틱 기타를 앞세운 포크와 컨트리 록 스타일의 작품과 일렉트릭 기타를 들고 크레이지 호스와 함께 했던 보다 파워풀하고 하드 록적인 작품으로 나눌 수 있다.
닐 영이 주로 쓰는 기타로는 일명 '올드 블랙'(Old Black)이라고 불리는 1953년산 깁슨 레스 폴 골드탑 일렉트릭 기타와 마틴 D-45 어쿠스틱 기타가 있다.
닐 영의 별명 가운데 하나는 '그런지의 대부'(Godfather of Grunge)이다. 그런지의 양대 영웅인 너바나의 커트 코베인과 펄 잼의 에디 베더를 필두로 수많은 그런지 뮤지션들이 그를 가장 영향 받은 인물로 꼽았다. 1989년에 발표된 트리뷰트 앨범 「The Bridge : A Tribute to Neil Young」에는 소닉 유스(Sonic Youth)와 닉 케이브(Nick Cave), 소울 어사일럼(Soul Asylum), 다이나소 주니어(Dinosaur Jr.), 픽시스(Pixies) 등의 그런지 밴드들이 대거 참여해 그에게 경의를 표하기도 했다. 닐 영은 그런지 전사들의 사상적, 음악적 스승이었다.
닐 영은 1995년 록큰롤 명예의 전당에 솔로로서 먼저 이름을 올렸고, 1997년에는 버펄로 스프링필드의 일원으로 다시 한 번 이름을 올렸다. 2000년 「롤링 스톤」은 '역사상 가장 위대한 아티스트 100' 명단에서 닐 영을 34위에 올려놓았고, 2003년 선정한 '역사상 가장 위대한 앨범 500' 리스트에는 그의 앨범이 다섯 개나 포함되었다. 2006년 닐 영은 「페이스트」 잡지가 선정한 '현존하는 위대한 송라이터' 명단에서 밥 딜런에 이어 2위에 올랐고, 같은 해 VH1이 선정한 '위대한 하드 록 아티스트' 순위에서는 39위에 랭크되었다.
록큰롤 명예의 전당은 닐 영에 대해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개성 있는 목소리와 거칠고 풍부한 기타, 그리고 완벽한 송라이팅 능력까지 다채로운 요소들이 특정한 스타일에 고정되지 않으려는 닐 영의 자유로운 음악 여행에 저마다의 역할을 했다." 닐 영은 버펄로 스프링필드와 CSNY, 그리고 솔로 시절을 통틀어 40장이 넘는 앨범을 발표했다. 중요한 것은 그 때마다 그의 음악이 항상 변화했고 진화했다는 점이다.
그의 예측불허에 대해서는 재미있는 일화가 많다. 1982년 닐 영이 예상을 뒤엎고 컴퓨터와 신디사이저 사운드를 받아들여 발표한 앨범 「Trans」가 사람들의 외면을 받자 소속사이던 게펜 레코드는 "우리는 '닐 영스러운' 음악을 원했다. 이것은 계약위반이다"라며 거액의 배상금을 요구하는 소송을 제기했다. 도대체 '닐 영스러운' 음악이라는 것이 무엇이었을까?
닐 영은 한 때 인종차별 문제로 구설수에 오르기도 했다. 그의 노래 〈Southern Man〉은 미국 남부 백인들에 대한 조롱을 담고 있는데 서든 록의 대가 레너드 스키너드(Lynyrd Skynyrd)가 〈Sweet Home Alabama〉로 이에 답했던 것도 잘 알려진 얘기. 하지만 후에 닐 영이 자신은 레너드 스키너드의 팬이라고 밝히고 레너드 스키너드의 로니 반 잰트(Ronnie Van Zant, 1948~1977)가 앨범 커버에 닐 영의 히트곡 〈Tonight's the Night〉 티셔츠를 입은 사진을 실으면서 사건은 해프닝 혹은 오해로 일단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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