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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923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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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992년 |
국적 | 미국 |
대표작 | 「I'll Play the Blues for You」(1972) |
앨버트 킹은 흔히 비비 킹, 프레디 킹과 함께 블루스계의 3대 킹으로 불린다. 그만큼 그는 블루스 기타계의 거성이다. 키가 2미터에 육박하고 몸무게는 110킬로그램에 달하는 이 거구의 기타리스트에게 붙여진 별명은 '비단 불도저'(The Velvet Bulldozer)이다. 거대한 체구의 사나이가 울려내는 소리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 그의 목소리와 기타 소리의 질감은 비단결처럼 부드럽고 섬세하다. 사실 이 별명은 앨버트 킹이 한 때 불도저 기사로 일했던 경력 때문에 붙여진 것이기도 하다. 그는 1950년대에 음악활동이 여의치 못하자 생계를 위해 6년 넘게 공사장에서 불도저를 운전하며 막노동꾼으로 일해야 했다.
관조와 유연함이 배인 거장의 애티튜드
앨버트 킹은 1923년 미국 미시시피주 인디애놀라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가족과 함께 교회 성가대에서 노래를 불렀는데 이 때 그의 아버지가 성가대에서 기타를 쳤다. 당시 대부분의 흑인들이 그랬듯이 가정 형편은 매우 곤궁했고 앨버트 킹의 가족 역시 큰 농장에서 목화를 따며 근근이 생계를 이어갔다. 열두 살 때 처음 기타를 잡은 앨버트 킹은 엘모어 제임스와 티본 워커의 음악을 들으며 연주법을 익혀나갔다. 그는 가족을 따라 자주 이사를 다녀야만 했는데 아칸사스주 오세올라와 인디애나주 개리, 미주리주 세인트루이스 등 가는 곳마다 클럽에서 연주자로 활동하며 음악가로서의 인생을 꿈꾸었다. 여러 악기를 다룰 줄 알았던 그는 잠깐 동안이지만 지미 리드(Jimmy Reed, 1925~1976)의 밴드에서는 드럼을 치기도 했지만 이내 블라인드 레몬 제퍼슨과 로니 존슨(Lonnie Johnson, 1899~1970) 등에 매료되어 일렉트릭 기타에 정착했다. 앨버트 킹은 초기부터 줄곧 깁슨 플라잉 브이 기타를 주로 썼는데 자신의 분신과도 같은 이 기타에 '루시'(Lucy)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1956년 앨버트 킹은 세인트루이스에 정착한 후 자신의 밴드를 결성하고 본격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1959년에 발표한 〈I'm a Lonely Man〉이 소폭의 히트를 기록해 첫 번째 히트곡이 되었으며, 1961년에 빌보드 R&B 싱글차트 14위까지 오른 〈Don't Throw Your Love on Me So Strong〉은 첫 번째 메이저 히트곡이 되었다. 1966년에 앨버트 킹은 멤피스로 이사했는데 이곳에서 블루스 전문 레이블인 스택스 레코드와 계약을 맺고 부커 티 & 더 엠지스(Booker T. & The MG's) 등의 유명 뮤지션들과 함께 활동하면서 본격적으로 이름을 알려나갔다. 1967년에 발표한 앨범 「Born under a Bad Sign」은 앨범의 동명 타이틀곡 〈Born under a Bad Sign〉이 크게 히트하면서 성공을 거두었다. 이 곡의 히트로 앨버트 킹은 미국 전역에서 명성을 얻게 되었는데 이때부터 그의 연주 스타일은 록이 융합된 퓨전화 경향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는 백인 블루스 뮤지션들에게도 영향을 끼치기 시작해서 이 곡은 크림 등 많은 후배 뮤지션들이 리메이크하기도 했다. 이 밖에 이 시기 그의 앨범으로 꼭 기억해야 할 중요한 음반으로는 프로모터 빌 그래험(Bill Graham, 1931~1991)과 손잡고 필모어 비너스에서 오랫동안 펼친 공연실황 중에서 발췌한 편집 라이브 앨범인 「Live Wire/Blues Power」(1968)가 꼽힌다. 이 앨범은 지미 헨드릭스와 에릭 클랩튼, 로비 로버트슨, 그리고 개리 무어와 스티비 레이 본에게도 큰 영향을 끼친 명작이다.
1970년대 들어 앨버트 킹은 도어스(Doors)의 캐나다 밴쿠버 공연에 참여해 〈Little Red Rooster〉 〈Rock Me〉 〈Who Do You Love〉 등의 곡에서 멋진 블루스 기타 연주를 보여주는가 하면 펑크(Funk)를 적극적으로 수용하면서 활동 폭을 넓혀갔다. 1972년에는 자신의 가장 유명한 앨범이자 영원한 블루스 명반 가운데 하나로 꼽히는 「I'll Play the Blues for You」를 발표했는데, 여기서는 그동안의 진중하고 무거운 분위기에서 벗어나 펑키하고 리드미컬한 연주를 들려주었다.
1967년에 처음 발표된 이후 그 자신이 여러 차례 리메이크했던 〈Oh, Pretty Woman〉도 그의 대표곡 가운데 하나이다. 이 곡은 개리 무어가 1990년 발표한 앨범 「Still Got the Blues」에서 리메이크하기도 했는데 앨버트 킹도 거기에 참여해 기타를 쳐주었다.
1999년에 뒤늦게 발표한 앨범 「In Session」도 기억할 만하다. 앨버트 킹과 스티비 레이 본의 합작 앨범으로 거장과 천재의 조우로 관심을 모은 이 앨범은 1983년 두 사람이 공연에서 잼 연주를 펼치는 순간을 포착한 작품이다. 젊은 나이답게 휘몰아가는 천재의 옆에서 기본을 알려주듯 빈 곳을 채우며 받쳐주는 거장의 기타가 절묘한 하모니를 이룬다. 스티비 레이 본이 불타오르는 화염과 같이 뜨겁다면 앨버트 킹은 검붉은 숯불처럼 은은하다. 앨버트 킹의 플라잉 브이 뒤에서 고개를 숙인 채 스트라토캐스터에 열중하는 스티비 레이 본의 모습이 담긴 재킷 사진도 인상적이다. 천재는 거장에 대한 존경의 자세를 잃지 않고 있다. 이 앨범에서는 스티비 레이 본이 곳곳에서 앨버트 킹의 릭을 따라하고 있어서 그가 앨버트 킹의 영향을 받았음을 확인시켜 준다.
오른손잡이용 기타를 거꾸로 메고 연주한 왼손잡이 기타리스트
앨버트 킹은 평생 동안 고집스럽게 플라잉 브이 기타를 고집했다. 입에 파이프를 문 채 플라잉 브이를 연주하는 그의 모습은 블루스 음악계에 남은 가장 선명한 사진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블루스의 역사를 사진첩에 담는다면 반드시 들어가야만 하는 사진이 아닐까 생각된다.
앨버트 킹은 펜타토닉 마이너 스케일을 기본으로 블루스 프레이즈를 전개했는데, 그는 매우 강렬한 블루스 필을 담으면서도 때론 리듬감 넘치는 연주를 들려주곤 한다. 앨버트 킹은 왼손잡이였지만 오른손잡이용 기타를 썼다. 그것도 줄도 바꿔 메지 않은 채로 그냥 오른손잡이용 기타를 거꾸로 메고 그대로 쳤다. 그래서 그는 보통 연주자들이 블루스 노트 벤딩시 위로 밀어 올리는 업 벤딩을 거꾸로 밑으로 끌어내리는 다운 벤딩으로 대신하곤 했다. 알려진 바에 따르면 그는 각각의 줄을 마이너 키로 떨어뜨린 변칙 튜닝을 사용했으며 6번 줄은 아예 쓰지 않았다고 한다. 그의 육중한 톤과 유니크한 벤딩 플레이는 이런 독특한 구조에서 비롯되었다. 줄을 세게 당겼다 놓아 지판과 부딪히면서 둔탁한 소리를 만들어내는 핀치 아웃 주법도 그가 즐겨 사용한 연주법이다. 오른손 왼손을 자유자재로 쓰면서 피크 대신 엄지손가락으로 피킹하는 그의 연주는 마치 갖가지 재료를 능숙하게 다루어 진미를 만들어내는 요리사의 그것처럼 능수능란했다.
1980년대가 지나가면서 건강이상으로 활동이 크게 줄어든 앨버트 킹은 1992년 테네시주 멤피스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그의 장례식은 멤피스 악단이 〈When the Saints Go Marching in〉을 연주하는 가운데 엄숙히 거행되었으며 그에게 큰 영향을 받은 후배 기타리스트 조 월시가 조사를 낭독했다. 앨버트 킹의 유해는 어릴 때 그가 살던 곳 근처인 아칸사스주 에드몬슨에 묻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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