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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915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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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983년 |
국적 | 미국 |
대표작 | 「At Newport」(1960) |
블루스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로 딱 한 사람을 뽑으라고 한다면 다양한 의견이 부딪힐 테지만 아마도 머디 워터스가 가장 많은 표를 획득하지 않을까 싶다. 그리고 여기에 '초기 블루스'라는 단서를 달거나 '시카고 블루스의 형성 과정에서'라는 조건을 붙인다면 그것은 더욱 분명해질 것이다.
머디 워터스! 그는 1950년대 블루스의 성지였던 시카고에서 일렉트릭 블루스의 태동과 부흥을 이끌었으며 그에 관한 다수의 영화와 다큐멘터리가 있을 정도로 블루스의 역사에 뚜렷한 발자취를 남긴 인물이다. 블루스가 대중음악의 인기 장르로 자리 잡는데도 결정적 역할을 담당했던 그는, 1960년대 영국발 블루스 폭발이 일어났을 때에는 그 배후 인물로 지목되기도 했다. 당시 영국의 많은 R&B 밴드들이 머디 워터스를 영향 받은 인물로 앞다투어 언급했는데 특히 롤링 스톤스는 아예 그룹의 이름을 머디 워터스의 히트곡 〈Rolling Stone〉에서 따왔을 정도였다. 그래서 그는 '시카고 블루스의 아버지'라고 불린다.
영국발 블루스 폭발의 진원지
머디 워터스는 1915년 미국 미시시피주 롤링 포크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맥킨리 모건필드(McKinley Morganfield)이다. 미국 남부 태생의 대다수 흑인들이 그렇듯 그는 어려서부터 대농장에서 가족과 함께 일했다. 어렸을 때 그는 흙탕물이 고여 있는 곳에서 놀기를 좋아했는데, 그런 습관과 유난히 검은 얼굴색이 별명이자 무대명인 '머디 워터스'(muddy : '진흙투성이의'라는 형용사어)를 만들었다.
열일곱 살 무렵 기타를 잡고 파티에서 연주하기 시작했는데, 처음에는 손 하우스와 로버트 존슨의 곡을 카피하는 수준이었다. 두 사람은 머디 워터스의 우상이었으며 특히 손 하우스는 그에게 개방현 튜닝과 슬라이드 주법 등을 직접 가르쳐주기도 했다.
1940년대가 시작되자 머디 워터스는 시카고로 진출했는데 당시 시카고에서는 이미 블루스에 일렉트릭 기타를 도입하려는 시도들이 싹트고 있었다. 머디 워터스에게 시카고는 신천지였고 그곳에서 그는 새로운 음악적 조류에 눈을 떴다. 초기에 주로 기존 인기 연주자들의 뒤에서 어쿠스틱 기타를 쳤던 그는 이내 일렉트릭 기타의 가능성과 필요성을 절감했다. 1945년 그는 삼촌으로부터 자신의 첫 번째 일렉트릭 기타를 선물 받았고 빠르게 실력을 키워나갔다.
1948년에는 〈I Can't Be Satisfied〉와 〈I Feel Like Going Home〉이 클럽가를 중심으로 인기를 얻었다. 그는 체스 레코드와 계약을 맺었고 1950년에는 자신의 시그너처 송이 될 〈Rolling Stone〉을 발표했다. 그리고 계속해서 〈Hoochie Coochie Man〉 〈I Just Want to Make Love to You〉 등의 히트곡을 내며 하모니카 연주자 리틀 월터 제이콥스(Little Walter Jacobs, 1930~1968), 기타리스트 하울링 울프(Howlin' Wolf, 1910~1976), 엘모어 제임스 등과 함께 당대의 시카고 블루스 씬을 지배했다.
블루스와 록큰롤이 대중적인 인기를 얻는데 혁혁한 공을 세운 체스 레코드는 머디 워터스와 연관해서도, 또 블루스의 역사를 이야기할 때에도 반드시 언급되어야만 하는 음반사이다. 체스 레코드의 창립자는 레너드 체스(Leonard Chess, 1917~1969)라는 사람인데 그는 원래 시카고에서 작은 블루스 바를 운영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 바에서 연주하던 사람 중에 머디 워터스가 있었다. 손님들이 머디 워터스의 노래를 좋아하자 그는 싱글 앨범을 한 번 제작해 봤고 이것이 괜찮은 반응을 얻자 내친 김에 레코드 회사를 설립하고 본격적으로 음반사업에 뛰어들었다. 처음에는 이름이 아리스토크랫 레코드였지만 곧 자신의 성을 따 체스 레코드로 바꾸었다. 그리고 이후 체스 레코드는 잘 알려진 것처럼 윌리 딕슨(Willie Dixon, 1915~1992), 하울링 울프, 척 베리, 보 디들리 등 초기 블루스와 록큰롤의 거장들을 대거 영입해 인기스타로 키워내며 블루스와 록큰롤의 전성시대를 활짝 열어젖혔다. 체스 레코드는 1960년대 후반 문을 닫았지만 1987년 록큰롤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며 시카고 블루스의 전성기를 장식한 레코드사로 영원히 이름을 남겼다.
우리는 모두 머디 워터스의 제자들이다
머디 워터스가 음악계에 끼친 영향은 전방위적이다. 그는 R&B와 록큰롤은 물론 포크와 컨트리, 재즈와 소울에 이르기까지 다방면에서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그가 블루스에 일렉트릭 기타를 도입한 첫 번째 인물은 아니지만 그 확실한 흐름을 만들고 가장 주도적인 역할을 해낸 인물인 것만은 분명하다. 그는 엘모어 제임스, 하울링 울프 등 함께 기억해야 할 몇몇 동료들과 더불어 그 이전의 모든 시도들을 압도할 만큼 창의적이고 탁월한 활약을 펼쳤다. 그의 인상적인 보틀넥 슬라이드 기타 솔로는 언제나 청중을 열광의 도가니로 몰아넣었고, 〈Hoochie Coochie Man〉과 〈Mannish Boy〉에서 보여준 코드 진행은 이후 로커들이 전 세대에 걸쳐 영향 받는 전범이 되었다.
그의 영향을 받은 뮤지션들의 이름을 열거하는 것은 무의미하며 어떤 의미에서는 모두가 그의 영향력 아래에 있다고 볼 수 있지만 그럼에도 대표적인 인물을 몇 사람만 꼽는다면 1970년대 머디 워터스가 오랜 침묵을 깨고 컴백했을 때 함께 투어를 하며 도움을 주었던 조니 윈터와 1976년 샌프란시스코 윈터랜드에서 열린 자신들의 저 유명한 고별공연 'The Last Waltz'에 이 거장을 초대했던 더 밴드(The Band), 그리고 앞서도 언급한 롤링 스톤스를 들 수 있을 것이다. 롤링 스톤스의 키스 리처드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모두 머디 워터스의 제자들이다."
록큰롤은 블루스에 일렉트릭 기타를 도입할 무렵에 탄생되었다. 그런 의미에서 1950년대의 블루스 뮤지션이라면 그 상당수가 록큰롤과 연관되는 지점을 가진다. 머디 워터스는 그 강력한 증인이다. 그는 1987년 록큰롤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으며, 록큰롤 명예의 전당이 선정한 '록큰롤을 만든 500곡' 리스트에도 〈Rolling Stone〉(1950) 〈Hoochie Coochie Man〉(1954) 〈Mannish Boy〉(1955) 〈Got My Mojo Working〉(1957) 등 네 곡을 올려놓았다. 2011년 「롤링 스톤」이 선정한 '역사상 가장 위대한 기타리스트 100' 순위에서는 17위에 랭크되었다.
마틴 스콜세지(Martin Scorsese)는 음악에 관심이 많은 영화감독이다. 그는 우드스톡 페스티벌을 다룬 다큐멘터리 필름을 제작했고 위에서 말한 더 밴드의 고별 공연 'The Last Waltz'를 기록한 필름도 남겼다. 마틴 스콜세지 감독이 2003년에 만든 [Godfathers and Sons]라는 영화가 있다. 자신이 기획한 〈The Blues〉 7부작 가운데 제5편에 해당하는 이 영화는 체스 레코드사의 흥망성쇠를 통해 블루스의 역사를 살펴본다. 영화에는 당연히 머디 워터스가 등장한다. 다넬 마틴(Darnell Martin) 감독이 메가폰을 잡아 2008년 개봉된 [캐딜락 레코드]도 머디 워터스와 체스 레코드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이다. 영화의 제목이 [캐딜락 레코드]인 이유가 재미있는데, 체스 레코드가 당시 음반이 히트하면 로열티 대신 캐딜락 차를 가수에게 선물하곤 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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