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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848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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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903년 |
국적 | 프랑스 |
대표작 | 〈후광이 있는 자화상〉, 〈레미제라블〉, 〈해바라기를 그리는 고흐〉, 〈우리는 어디서 왔으며 누구이며 어디로 가는가?〉 |
자화상에 투영된 예수와 장발장 그리고 루시퍼
고흐가 이십 대를 훌쩍 넘은 나이에 화가의 길로 들어섰다면 그의 절친한 친구 고갱은 한술 더 떠 서른다섯 살에 미술계에 입문한 늦깎이 화가다. 고갱은 화가가 되기 전에 증권 브로커 일을 하면서 아마추어 화가지망생 신분으로 그림을 그리거나 인상파 화가들과 교류하며 그들의 컬렉터가 되기도 했다.
화가가 되기 직전 고갱의 그림 실력에는 다소 애매모호한 부분이 있었다. 아마추어 화가지망생 치고는 수준급의 회화 실력을 갖추고 있었지만 직업을 그만두고 기성 화가가 되기에는 여러모로 부족했다. 가뜩이나 고갱은 이미 삼십 대를 훌쩍 넘긴 한 집안의 가장이었다.
고갱은 결국 직업화가로의 길에 들어서지만 현실은 그리 녹록치 않았다. 생활은 날로 궁핍해져 갔고, 작품 활동도 아마추어로 그림을 그리는 것 하고는 차원이 달랐다. 그의 그림을 찾는 컬렉터는 거의 나타나지 않았고 이로 인한 절망감은 헤아릴 수 없이 컸다.
고갱도 친구인 고흐처럼 꾸준히 자화상을 그렸다. 모델을 사서 그림을 그릴 형편도 못 됐거니와 습작에 자화상만큼 좋은 소재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고갱의 자화상은 다른 화가들의 자화상과는 분명 달랐다. 그는 다른 인물에 자신을 이입시켜 자화상을 즐겨 그렸다. 그의 자화상에 등장한 인물로는 예수 그리스도와 『레미제라블』의 주인공 장발장이 있다. 또 악당으로 전락한 천사 루시퍼도 보인다.
〈노란 그리스도를 배경으로 한 자화상〉은 자신의 작품인 〈노란 색의 그리스도〉와 〈기괴한 모습을 한 고갱〉이라는 작품을 함께 병치시켜 완성한 것이다. 이 그림을 그릴 당시 마흔두 살의 고갱은 아직 화가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었다. 경제적으로도 많이 힘든 상황을 겪고 있었는데, 급기야 아내와 자식하고 떨어져 지내야 하는 처지에 놓이고 말았다.
고갱은 방값이 싼 파리 근교를 전전하다 브레타뉴에 위치한 퐁타방이라는 시골 마을에 머무르게 된다. 고갱은 이 마을에 있는 트레말로 성당에 걸린 예수상을 보고 크게 감동하여 그 모습을 곧바로 캔버스에 옮겼다. 이 그림이 바로 〈노란 색의 그리스도〉이다. 고갱은 핍박 받고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를 보면서 처량한 자신의 모습을 생각했던 것 같다. 그는 훗날 자신의 작품이 많은 이들에게 예수 못지않게 커다란 감흥을 줄 것이라고 스스로를 위로한 듯하다.
〈노란 그리스도를 배경으로 한 자화상〉에 그려 넣은 또 다른 자화상인 〈기괴한 모습을 한 고갱〉도 매우 이색적이다. 도자 조각인 이 작품의 원본을 보면 모델에 귀가 없는 것이 눈에 들어온다. 비슷한 시기에 만든 〈두상 모양의 물 주전자 자화상〉에도 역시 귀가 보이지 않는다. 심지어 이 작품에는 얼굴 주변에 피까지 흘러내린다. 많은 미술사가들은 고갱이 만든 이들 조각 작품을 두고 고흐의 〈귀를 자른 후의 자화상〉을 언급한다. 19세기 서양 미술사에서 가장 충격적인 사건 가운데 하나로 꼽히는 고흐의 귀 절단 자해 소동 현장에는 고갱이 있었고, 이로 인해 고갱은 큰 충격을 받았다. 고갱은 〈노란 그리스도를 배경으로 한 자화상〉에서 그리스도의 모습을 한 자신과 기괴한 모습을 한 자신을 함께 배치함으로써, 귀가 잘린 처절한 자아를 그리스도의 모습을 한 자아를 통해 구원 받고자 한 듯하다.
자신을 악마 루시퍼의 모습으로 묘사한 〈후광이 있는 자화상〉은 〈노란 그리스도를 배경으로 한 자화상〉과 소재만으로도 재미있는 대조를 이룬다. 이 그림은 고갱이 마흔한 살 되던 해에 그린 것이다. 뚜렷한 윤곽선을 지닌 넓은 평면에 강한 색채를 사용하여 장식적인 효과를 높였다. 하늘로부터 퇴출당한 대천사이자 악마인 루시퍼의 모습을 한 화가의 인상은 마치 캐리커처를 보는 듯하다.
고흐의 〈해바라기〉는 고갱의 심장을 멎게 했다
미술사에서 전해오는 수많은 뒷 담화 가운데 고흐와 고갱에 관한 이야기만큼 귀를 쫑긋 세우게 하는 것도 없을 것이다. 두 사람이 실은 동성애 관계였다는 얘기에서부터 고흐의 귀를 자른 것은 고흐 자신이 아니라 고갱이라는 주장까지 두 사람에 얽힌 소문은 거대한 산을 이룬다.
아를에서 고갱이 오기만을 손꼽아 기다리던 고흐는 어느 날 재미있는 제안을 한다. 자화상을 그려 서로에게 선물하자는 것이다. 고갱은 고흐의 제안을 선뜻 받아들이지 못했다. 자신의 그림을 바라보는 고흐의 눈빛에 '이것 밖에 못 그리나?'라는 조소가 섞여 있다고 고갱은 생각해왔기 때문이다. 고흐의 독촉이 거세지자 결국 고갱은 고흐에게 보내기 위한 자화상을 한 점 그리는데, 그것이 바로 〈레미제라블〉이라는 이름이 붙은 자화상이다. 고갱은 당시 빅토르 위고의 소설 『레미제라블』에 나오는 주인공 장발장이라는 인물에 대해 큰 매력을 느끼고 있었다. 고갱은 장발장의 모습을 하고 있는 자신을 그린 〈레미제라블〉을 고흐에게 선물했다. 고갱은 이 그림 오른쪽에 그 당시 가깝게 어울려 지내던 화가 베르나르(Emile Bernard, 1868~1941)의 초상을 함께 그려 넣었다. 자화상에 자신의 다른 작품을 배경으로 그리는 것은 평소 고갱이 자주 시도하던 방식이었다. 이 그림을 받아본 고흐는 뛸 듯이 즐거워했다. 그리고 곧이어 자신의 자화상도 한 점 그려 고갱에게 보냈다.
이에 고무된 고갱은 내친 김에 고흐의 초상까지 그렸다. 바로 〈해바라기를 그리는 고흐〉이다. 고갱이 고흐를 만나러 처음 아를에 갔을 때, 그는 고흐의 작업실 캔버스에 놓여 있는 〈해바라기〉를 보고 숨이 머지는 듯 했다. 아를의 뜨거운 태양은 마치 고흐의 〈해바라기〉에서 에너지를 받은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이 그림은 고갱의 눈 속으로 너무나 강렬하게 들어왔다. 고흐의 정신발작에 놀라 다시 파리로 돌아왔을 때도 고갱의 머릿속에는 온통 캔버스 앞에서 시름하며 해바라기를 그리는 고흐의 모습만 떠올랐다.
두 사람의 관계는 결국 오래가지 못했다. 그러나 아를에서 함께 했던 짧은 시간은 고갱에게 평생 잊을 수 없는 충격이자 아픔이었다.
위대한 작품? 거대한 작품!
1897년, 고갱은 〈우리는 어디서 왔으며, 누구이며, 어디로 가는가?〉를 그렸다. 화가의 설명에 따르면 이 그림은 그가 혼신의 힘을 기울여 완성한 철학적인 작품이라고 한다. 그 당시 고갱은 가난과 질병으로 인해 크게 위축되어 있었다. 그는 경제적인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해 한때 죄악의 도시라고 부르던 파리를 향해 자신의 예술을 인정해달라며 구걸하기도 했다. 이 일로 세상에 대한 증오는 더욱 커졌고 자살을 결심하기에 이르렀다. 고갱은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서 독초를 먹었다. 당시 그는 죽은 뒤 산짐승이 자신의 시체를 먹는다면 완벽한 해탈을 얻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다행히도 고갱은 마을 사람들에게 발견되어 죽음을 면할 수 있었다.
그 일이 있은 뒤 고갱은 전에 없이 창작에 강한 집념을 불태웠다. 그는 죽기 전에 반드시 위대한 작품을 그리겠다는 결심으로 밤낮을 가리지 않고 꼬박 한 달을 작업에만 매달렸다. 그는 어느 날 너무나 생생한 꿈을 꾸었다. 꿈에서 깨어난 뒤 캔버스를 마주하자 그의 눈앞에는 간밤의 꿈이 생생하게 펼쳐졌다. "우리는 어디서 왔을까?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는 어디를 향해 가는가?"라는 철학적인 명제가 이 그림의 제목이 되었다.
화면 오른쪽에는 이제 막 태어난 갓난아이가 있고, 가운데에는 한 젊은이가 나무 열매를 따고 있다. 화면 왼쪽에는 인생의 말년을 맞이한 노파가 등장한다. 그림 속의 인물들은 인류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의 삶을 비유적으로 보여준다.
이 그림은 1898년 파리에서 전시되어 화제를 일으켰지만, 고갱이 기대했던 것만큼 호응을 얻진 못했다. 고갱은 이 작품을 두고 자신의 최고 역작이라고 누누이 말했지만 많은 사람들은 그 의도를 의심했다. 즉 계획적으로 의도된 대작이라는 것이다. 고갱은 나이를 먹을수록 화가로서 자신의 삶에 대해서 매우 조급해했다. 그래서 세상으로부터 인정받을 만한 대작을 남겨야 한다는 절박함 속에서 이 그림을 그린 것이다. 그러나 이 그림은 '거대한' 작품의 반열에는 올랐지만, '위대한' 작품으로는 추앙받지 못했다. 고갱은 또 다시 좌절했다.
예술가로서 실패만 거듭한 삶
고흐와 마찬가지로 고갱 역시 살아생전에 그리 성공한 화가는 되지 못했다. 고갱을 미술로 이끈 것은 인상파 화가들의 작품이었지만, 직업화가의 길을 걷게 되면서부터는 인상주의 사조에서 벗어나려 애썼다. 고갱은 자연을 객관적으로 재현하려는 인상주의에 동의하지 않았다. 결국 고갱은 "예술이란 사물의 객관적인 형상과는 다르며 작품에는 예술가의 주관적인 감정이 개입되어야 한다"라고 주장하며 인상주의와 결별을 선언했다.
고갱은 1888년에 '종합주의'(synthétisme, 고갱은 인상주의가 해체한 색채의 단편들을 강렬한 윤곽선으로 두른 넓은 면으로 종합했다–역주)라는 세로운 사조를 만들었다. 그리고 1889년 인상파전이 열리던 전시장 건물 앞 볼피니 카페를 빌려 '인상주의와 종합주의 화가 전람회'를 열었다.
그러나 당시 기성 화단과 평론가 집단은 고갱의 예술적 재능에 큰 호감을 얻지 못했다. 컬렉터들도 고갱의 작품에 매력을 느끼지 못했다. 고갱은 이곳저곳을 떠돌며 작품 활동을 계속해 나갔지만 나이만 먹고 있을 뿐 뚜렷한 족적을 남기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그대로 파리에 남아 있을 수 없었다. 결국 파리에서의 생활을 접고 타히티로 떠났다.
고갱은 타히티의 풍경과 사람들을 소재로 다시 그림 그리기에 열중했다. 고흐가 아를로 거처를 옮기면서 창작 활동에 전환점을 마련했듯이 고갱 역시 새로운 환경에서 다시 시작하고 싶었다. 그는 이곳에서 이른바 '원시미'가 돋보이는 새로운 그림들을 그렸다.
1893년 고갱은 다시 파리로 돌아왔다. 그의 손에는 타히티에서 그린 새로운 그림들이 들려 있었다. 그는 파리의 동료들에게 자신의 새로운 작품들을 하루빨리 보여 주고 싶었다. 드가는 고갱의 그림들을 위해 전시를 주선해 주었고, 피사로를 비롯한 다른 동료들도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하지만 고갱에 대한 미술계의 반응은 여전히 냉담했다. 일부 미술관에서는 고갱의 그림을 전시하는 것조차 거절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그 즈음에 그린 또 한 점의 자화상은 당시 고갱의 현실을 그대로 반영한다. 고갱은 이 자화상 안에도 자신의 그림을 전시(!)해 놓고 있다. 이 자화상 안에 전시된 그림은 고갱이 타히티를 배경으로 그린 그림 가운데 가장 애착을 갖던 〈죽음이 지켜보고 있다〉라는 작품이다.
1895년 고갱은 또 다시 파리를 떠났다. 파리에서 그에게 남은 거라곤 냉소와 조롱뿐이었다. 그가 향한 곳은 역시 타히티였다. 1903년 심장병으로 숨을 거둘 때까지 고갱은 그곳에서 쓸쓸한 말년을 보내야 했다. 고갱이 자화상에 남긴 그림의 제목처럼 그를 끝까지 지켜봐 준 것은 '죽음'이라는 그의 작품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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